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244
진동기가 이런 복잡한 생각에 잠겼을 때 똑같은 경험으로 마음이 불편한 사람도 있었다.
‘이거, 예상은 했지만 좀 심한데…. 안면 몰수라는 말이 이런 거구먼.’
이학재 실장은 빈소를 방문하는 조문객 중에 예전처럼 자신을 대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에 기가 찼다.
며칠 전만 해도 허리를 굽신대던 사람들이 자신보다 진영기 부회장의 수족인 백준혁 실장에게 눈도장 찍으려 발버둥이다.
마치 예전의 자신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일었다.
백준혁은 그룹을 대표하여 진 회장의 사망 소식을 전했다. 그의 모습이 일제히 언론을 타고 흘러나가자 순양을 아는 사람들은 이학재의 역할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룹 회장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최측근.
그 자리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장례 첫날부터 실감하는 중이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승이 죽으면 문상객 맞는 마당이 빈다죠?”
“정승 자리를 계승하는 아들이 있으니 여전히 문전성시를 이루는데?”
“대신 죽은 정승이 키웠던 개는 이제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군요.”
“여전히 입이 맵군. 언제 왔나?”
“지금 공항에서 곧바로 오는 길입니다.”
“전투기 타고 온 게 아니면 너무 빠른데?”
“며칠 전에 윤기가 전화했습니다. 회장님께서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으니까 들어오라고요.”
“오 대표가 회장님과 그처럼 가까웠나? 임종을 지켜볼 만큼?”
“가깝지는 않지만 조금은 존경하는 구석도 있습니다. 물론 임종을 지키려 온 건 아니고요.”
“도준이?”
“네. 회장님 안 계시니 부회장님들이 움직일 테고 순양그룹의 지배지분을 가진 우리 미라클도 상황을 예의 주시해야죠. 우리도 대주주 아닙니까? 개나 소나 회장 자리에 앉는 꼴은 못 봅니다.”
오세현은 이학재 실장과 마당 한편에 나란히 서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고급 승용차의 행렬을 지켜보며 말했다.
“피곤할 텐데 한숨 자고 오지? 자네가 딱히 할 일은 없을 것 같네만.”
“전세기는 아니더라도 퍼스트 클래스에서 편히 푹 잤습니다. 정신은 말똥말똥합니다. 윤기와 도준이 얼굴은 보고 가려고요. 조문도 하고요.”
오세현은 이학재의 옆구리를 툭 건드렸다.
“제가 등장하면 상주들 모두 허리 숙여야 하는 거 아닙니까? 대주주님 납시었는데….”
“이 집안 아들들에게 자네는 도둑놈이고 사기꾼 취급일걸? 그 귀한 지분을 뺏어갔으니 말이야.”
“그럼 이 실장님은 어떤 취급입니까?”
“자네가 말하지 않았나? 죽은 정승이 키우던 개라고. 아니, 더 심한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으니 낙동강 오리알 신세라고 해야 맞는 것 같은데? 흐흐.”
“그럼 신세타령 그만하시고 도준이 제안을 받아들이시죠.”
“제안? 아, HW 그룹?”
“네. 정승까지는 아니더라도 판서 정도는 되지 않겠습니까?”
실실 웃음을 흘리는 오세현을 보며 이학재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이런 능글능글한 놈이 어떻게 진중한 윤기와 친구가 되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가만 보자…. 정승이 정1품, 판서가 정2품이지 아마?”
“아이고, 아는 것도 많으셔라.”
“이 정도는 상식이지. 자네가 무식한 거야.”
“저야 영국물 먹은 유학파다 보니… 한국사는 좀 어둡죠. 딴소리는 그만두고 생각해보시겠습니까? 진지하게.”
“순양이 정1품이면 HW는 정2품은 턱도 없고… 이제 겨우 과거 급제한 수준이지. 비유가 맞지 않아.”
“대신 자리가 다르죠. 이건 회장입니다. 용 꼬리가 아니라 뱀 대가리 아닙니까?”
“적당할 때 끝내. 농담도 길어지면 지겨워서 짜증 나. 참, 아예 오 대표가 그 자리에 앉지그래? 대표 떼고 회장 달면 되겠네.”
오세현은 손을 들어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제 때깔 한번 보십시오. 거의 동남아 원주민 같지 않습니까?”
원주민까지는 아니더라도 프로 스포츠 선수 이상으로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이었다. 두 달 남짓 지났을 뿐인데 이렇게 변한 건 그의 일상이 어떤지 알려주는 것이다.
“팔자 늘어졌나 봐?”
“아침에 느긋하게 일어나서 호텔 조식 먹고, 골프 한 바퀴 돌고. 풀장에서 수영도 좀 하고, 바닷가에 앉아 비키니 미녀들 감상하다 푸짐한 저녁에 와인 곁들이는 게 하루 일상입니다. 이젠 일 못 하죠. 낙원에서 사는데. 흐흐.”
“부인이랑 함께 가지 않았나? 비키니 미녀라니?”
“그러니까 감상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조금 아쉽긴 하죠.”
“오 대표는 참 희한해. 갬블러는 노름판을 떠나면 살 수 없는 법인데…. 내가 잘못 봤나?”
“때를 알고 판을 접을 줄 아는 사람이 진짜 갬블러 아니겠습니까?”
이학재 실장은 오세현을 힐끗 보며 미소 지었다.
“좀 쉬더니 감을 잃었군. 이번엔 패를 잘못 골랐어. 관심 없으니 빈소에 국화나 하나 올리고 가. 참, 낙원으로 돌아가기 전에 연락해. 저녁이나 한번 하자고.”
이학재는 오세현의 어깨에 손을 한번 올리고 휘적휘적 사라졌다.
“이대로 은퇴할 사람은 아닌데….”
그의 뒷모습을 보던 오세현은 머리를 갸우뚱했다.
난 이학재 실장이 사라지는 걸 확인하고 오세현에게 다가갔다.
“뭐라고 해요?”
“모르겠다. 말하는 걸로 봐서는 지금 처지가 마음에 안 드는 건 확실한데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아.”
“속을 벅벅 긁어야 하는데 또 엉뚱한 소리만 하신 거 아닙니까?”
오세현은 내 머리를 툭 쳤다.
“얌마! 정승 집 마당 개 취급까지 했는데 웃기만 하더라. 속내를 모르겠어.”
“아쉽네요.”
“자존심 긁어서는 답이 안 나온다. 작전 바꿔봐.”
오세현은 미덥지 못한 표정으로 나를 흘겨보기 시작했다.
“아무튼, 난 향이나 하나 올리고 갈 거다.”
“호텔에 계실 거죠?”
“그래. 장례 잘 치르고. 천천히 보자.”
“네. 오랜만에 오셨는데 사람들도 좀 만나고 그러세요.”
“그래. 친구 몇 놈 보고 소주나 한잔하며 시간 때울 생각이다. 고생해.”
그는 내 등을 가볍게 쓰다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 * *
오세현은 들어서자마자 자신을 노려보는 눈길을 느꼈다.
가볍게 볼 수 없는 순양그룹의 대주주.
하지만 이학재 실장의 말처럼 저들의 눈길에는 적의가 가득했다.
따뜻한 눈길은 친구인 진윤기뿐이다.
오세현은 공손히 분향하고 큰절을 했다.
“망극한 일을 당하셔서 어떻게 말씀드려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최대한 공손히 말하자 진영기는 표정을 풀었다.
“위로의 말씀 고맙습니다.”
하지만 그는 오세현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 잠깐 보고 가지?”
가볍게 머리를 끄덕인 오세현이 조용히 물러나자 진영기가 뒤따르며 그를 향해 눈짓했다.
진윤기는 이 모습을 보고 자신도 따라가려 했지만 진동기가 그의 손을 잡았다.
“주주와 경영자가 이야기하는 거다. 네가 낄 자리가 아냐.”
# # #
“몸이 좀 안 좋다고 하더니 엄살이구먼. 얼굴 탄 거 보니까…. 골프…?”
“엄살은 아니고 머리와 마음을 치료하는 중이죠. 안식년이라고나 할까요?”
두 사람이 이 층 거실에 마주 앉자 백준혁 실장이 달려왔다.
“마실 것 준비할까요?”
“아니. 금방 끝나. 아, 아무도 못 올라오도록 해줘.”
“네. 부회장님.”
단둘만 남게 되자 오세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맏상제가 자리 비워도 됩니까?”
“실없는 소리 그만하고. 바쁘니까 용건만 말하지. 곧 주총이 열릴 거야.”
“그렇겠죠. 빈자리를 그대로 둘 수는 없으니.”
“지분 내놓으라 소리는 하지 않을 테니 의결권만 내놓고 이대로 돌아가. 동남아에서 골프나 치며 지내라고. 내가 좋은 골프채 한 세트 보내줄 테니까.”
오세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미소 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대주주가 주총에 빠지면 쓰나요? 성실하고 올바르게 주권을 행사해야죠.”
“농담 아냐.”
“저도 농담 아닙니다.”
서로를 노려보는 눈빛이 부딪혔다. 날카로운 눈빛을 먼저 거둔 이는 오세현이었다.
“문상 온 대주주를 이리 겁박하는 건 좀 심한 거 아닙니까?”
“보통의 대주주면 업고 다니지. 오 대표는 사실상 적대적 M&A의 기업 사냥꾼이나 다름없으니 내가 물 한잔도 안 주는 게야. 하하.”
여유 있는 모습을 보이는 진영기를 보며 오세현이 피식 웃었다.
“착각하시는군요. 전 M&A 관심 없습니다. 순양그룹은 삼키려다 목에 걸려 죽죠. 전 최고의 경영자를 선정하는 데만 관심 있는 주주입니다. 그리고 경영 자질로만 본다면 진영기 부회장님보다는 진동기 부회장님이 더 낫다는 게 제 판단입니다.”
“뭐야?”
“소리치지 마시고 과거를 돌이켜보십시오. 사업 말아먹은 사례가 누가 많은지. 그리고 미라클과 진동기 부회장의 지분을 합치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 아닙니까?”
오세현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주총 날짜 잡으면 연락 주십시오. 그럼…. 아,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이를 악물고 있는 진영기를 내버려 둔 채 오세현은 가볍게 머리 숙이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진동기 부회장과 눈이 마주친 오세현은 미소를 띠며 다가갔다.
그는 진동기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나중에 술 한잔 사쇼.”
* * *
“너 혹시 오세현이와 손발 맞추고 있냐?”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확실해? 만약 내 뒤통수칠 생각이면 그만둬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거다.”
“갑자기 왜 또 트집인데?”
단둘이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해서 이 층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첫 마디부터 시비조로 말하니 진동기는 짜증이 확 솟구쳐 올랐다.
진영기는 조금 전 오세현이 했던 말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전달했다.
“후…. 형님. 그 자식에게 말려들지 말자. 그놈은 우리 형제가 갈라서야 힘을 발휘하잖아. 캐스팅 보트가 그놈의 유일한 무기야. 그런 얕은 수에 이리 흔들리면 어떡하려고?”
진영기는 동생의 얼굴을 노려보다 크게 숨을 들이켰다.
“좋아. 내가 지나쳤다. 미안해.”
“괜찮아. 예민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동기야. 도저히 안 되겠다. 이런 식이면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 지주회사 서두르자.”
찝찝하긴 하지만 진동기도 별다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오세현의 캐스팅 보트가 언제라도 진영기에게 도움 될 수도 있다.
이런 불안 요소를 없애려면 주변을 정리하고 형제만 남는 게 최선이다.
“그래. 장례 끝나면 곧바로….”
“아니. 오늘부터 바로!”
“응?”
단호한 표정의 진영기를 보자 그냥 내뱉는 말은 아닌 듯싶었다.
“이학재부터 조지고. 그놈이 우리를 돕게 해야 해. 그럼 지주회사 전환은 훨씬 더 빨라지잖아.”
“아는데…. 오늘은 무슨 의미야?”
“아까 연락 왔잖아. 법무부 인사들 조문 온다고. 그 사람들과 조용히 이야기 좀 해야겠다.”
무슨 뜻인지 알았다.
법무부 관료들이라면 검찰 출신이 태반이다.
특히 법무부의 주요 보직은 검사들 중 선두에 선 사람이 차지하고 검찰을 주무른다. 그들이 나서면 이학재를 압박하는 건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진영기는 오늘 그들에게 부탁할 생각이다.
“아주 작살을 내고 살려주면 고분고분해질 거야.”
진동기는 흥분한 형님을 보며 말했다.
“다 좋은데 이젠 혼자 뛰지 마. 지주회사 설립하고 지분 확실하게 나눌 때까지는 이인삼각이라고.”
“무슨 뜻이야?”
“중요한 조문객을 왜 혼자 만나? 앞으로 그런 독대는 안 돼. 함께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그래야 조금 전 오세현이처럼 서로 오해하는 일이 생기지 않지. 안 그래?”
진영기는 심각한 표정의 동생을 보며 살며시 웃었다.
“산 사람을 화해시키고 하나로 만드는 건 죽은 사람이라더니 딱 그 짝이네. 아버지가 우리를 손잡게 만들었으니 말이다.”
오랜만에 두 사람은 진심으로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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