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264
“아, 순양갤러리와 접촉할 때 그쪽 작품만 매입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도록 다른 곳 작품 몇 개를 함께 사들여도 됩니다. 비용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잠깐만 실례해도 될까요?”
벳 포터는 황급히 레이첼의 손을 잡고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은 십여 분이나 이야기를 나눈 후에 다시 나타났다.
“미안해요, 하워드. 제가 좀 무례했어요.”
“아뇨. 괜찮습니다. 내가 누구나 당황하기 마련인 말을 했으니까요.”
“하나만 묻겠습니다. 만약 내가 순양갤러리의 작품을 구매하지 못한다면 웬트워쓰 아트 갤러리의 지원은 무산되는 것인가요?”
“이미 말했을 텐데요? 난 예술에는 문외한이라고. 없었던 일이 될 겁니다.”
벳 포터는 입술을 깨물었다.
덥석 물기에는 뭔가 찝찝한 조건임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사적인 질문이 될 텐데, 괜찮을까요?”
“말씀해보세요.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라면 노코멘트하죠.”
“하워드는 순양그룹의 오너 가족이라고 들었어요. 순양갤러리 역시 그 그룹이 운영하는 재단이고요. 그런데 왜 이리 복잡하게 일을 하는 거죠?”
“복잡한 집안 문제니 노코멘트. 흐흐.”
그녀는 내 웃음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오케이. 한번 해보죠.”
“그 정도로는 안 돼요.”
“네?”
“한번 해본다? 그럼 마음으로 순양갤러리에 접근했다가는 변변한 답변조차 못 얻어요. 바늘구멍 하나 없는 완벽한 계획으로 접근해야 순양갤러리의 빗장이 풀릴 겁니다. 순양이라는 이름 뒤에 앉아 있는 것들은 전부 괴물입니다.”
난 손가락을 들어 나를 가리켰다.
“날 봐요, 내가 상식적인 놈으로 보입니까?”
* * *
“밖에서 단둘이 무슨 이야기 했어요?”
“네 정체가 뭔지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뭐라고 했어요?”
“의문 갖지 말고 원하는 대로 맞춰주라고 했어. 그럼 인생이 바뀔 거라고 슬쩍 알려줬지.”
“레이첼 말을 따를 것 같아요?”
“아마도…. 아니, 거의.”
“왜 그렇게 확신하죠?”
“벳 포터, 그 바닥에서 실력도 있고 야심도 보통이 아니야. 단지 아직 운이 따르지 않았지. 예술 쪽이 아무래도 좀 보수적인데 그녀는 좀 급진적인 성향이거든.”
“그 유별난 성향을 내가 돈으로 감싸주는 꼴이군요.”
“어차피 크게 신경 쓰는 것도 아니잖아. 갤러리가 아무리 성공 가도를 달려도 네겐 용돈 수준의 이익을 남길걸?”
“제 용돈, 얼마 안 됩니다. 돈 쓸 시간이 없거든요.”
레이첼의 말은 사실이었다. 벳 포터는 자신의 야심을 위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빈틈없는 계획을 세웠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첫 번째는 바로 소문이었다.
웬트워쓰 아트 갤러리는 엄청난 후원자를 만났고,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는 한참 미치지 못할지라도 사설 갤러리 중에는 세 손가락 안에 꼽힐 규모로 성장하는 것도 꿈은 아니라는 소문이었다.
소문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미국은 물론, 세계 곳곳의 갤러리가 웬트워쓰 아트 갤러리의 메일을 받았다.
각 갤러리의 소장품 중 매입하고 싶은 작품 목록도 함께.
이런 짓을 장난삼아 할 수 없다. 그냥 한번 찔러보며 가격만 확인하는 정도라면 웬트워쓰 아트 갤러리는 물론 벳 포터 역시 이 업계에서 매장된다는 것은 상식이기 때문이다.
물론 순양갤러리 역시 같은 메일을 받았다.
* * *
순양갤러리 운영진들은 메일 때문에 그리 큰 고민을 하지 않았다. 진위 여부는 순양그룹 뉴욕 법인에서 조사하고 확인해줬기 때문이다.
“이건 뭐 새롭게 탈바꿈한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네요.”
“그렇습니다. 이미 뉴욕 바닥에 소문이 쫙 깔렸다고 할 정도면 정식 제안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죠.”
“그런데 이사장님이 그림을 팔까요? 예술에 대한 욕심은 아무도 못 말리지 않습니까?”
“그래도 보고는 해야죠.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림 사겠다는 제안은 꼭 보고하라고요. 그래야 작품의 실질적인 현재 가치를 알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럼 보고 올리죠. 엘리자베스 포터 관장은 뉴욕에서 평판이 좋다고 합니다. 이 기회에 우리 갤러리와 관계를 맺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그들은 뉴욕 법인의 조사 자료와 메일을 재단 이사장인 이필옥 여사에게 올렸다.
이필옥 여사는 갤러리 운영본부장이 올린 보고서를 유심히 살펴보다 입을 열었다.
“확실해? 우리 그림 사고 싶다는 거? 살 능력은 있고?”
“그렇게 보입니다. 뉴욕 법인이 확인한 사실이니까요.”
“그래? 알았어 나가 봐.”
“네. 이사장님.”
운영본부장이 머리를 숙이고 나가자마자 이필옥 여사는 인터폰을 눌렀다.
“송 비서 들어오라고 해.”
일 분도 지나지 않아 사십 대로 보이는 사내 한 명이 들어와 허리를 숙였다.
“찾으셨습니까?”
“이거 한번 봐.”
그녀는 보고서를 쓱 내밀었다.
송 비서는 메일까지 꼼꼼히 확인한 뒤 머리를 들었다.
“어때? 괜찮지 않아?”
“이사장님. 이 목록 중에 이미 은밀하게 매각한 것도….”
송 비서는 목소리를 착 가라앉혔다.
“알아. 그러니까 우리가 가진 것으로 다시 목록을 만들어봐. 값나가는 거로 골라서.”
“네.”
송 비서가 나가려 했지만 이필옥 여사의 지시는 끝나지 않았다.
“뉴욕 가야겠지? 거기 메일 보낸 포터인지 트럭인지 하는 애도 직접 만나봐. 우리 조건을 받아들일지 아닌지도 확인하고.”
“네. 이사장님.”
송 비서가 나가자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낌없이 퍼부어야 할 때 딱 적당한 물주가 등장했으니 이 기회를 잘 살리고 싶었다.
* *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미스터 송. 비행은 어떠셨습니까?”
“좋았습니다. 이렇게 환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벳 포터는 순양갤러리에서 이처럼 빠른 반응을 보이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재빠른 메일의 회신, 그것도 직접 만나서 논의하고 싶을 만큼 서두르는 이유는 진도준이 말한 대로 복잡한 사정 때문일 것이라는 것만 짐작했을 뿐이다.
“미술품 매입에 꽤 공격적이시던데, 갤러리의 정책입니까?”
“정책이라기보다는 새롭게 태어난다는 게 정확한 표현이 되겠군요. 전폭적인 후원자가 나타났거든요.”
그녀의 설명에 송 비서의 눈이 반짝였다.
“혹시 그 후원자가 누군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벳 포터는 처음 보자마자 대뜸 심문하듯 말하는 이 남자 때문에 눈꼬리가 올라갔다.
“유감스럽게도 그건 말씀드릴 수 없어요. 이상하군요. 그림을 매입하는 곳은 후원자가 아니라 우리 갤러리입니다.”
“아, 실례했습니다. 사실 우리 순양갤러리는 개인에게만 작품을 판매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갤러리의 주요 고객인 개인인 건 잘 알려진 사실 아닙니까? 혹시 우리를 통해 후원자와 거래하시려는 생각입니까?”
“외람되지만 그렇습니다. 가능할까요?”
벳 포터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그림 매입 대금은 후원자를 통해 나온다. 후원자와 직접 거래하더라도 후원자가 갤러리에 그림을 기증하면 같은 결과 아닌가?
멀리 한국에서 날아온 이 남자는 지금 무의미한 말을 하고 있을 뿐이다.
갤러리와 개인 거래의 차이라면 단 하나, 공공장소에 그림을 걸어 두는가 아니면 사적인 공간에 걸어 두는가 하는 차이뿐이다.
벳 포터는 드디어 이 남자가 원하는 거래를 눈치챘다.
“혹시… 그림의 대중 공개는 불가, 그리고 거래 사실도 비밀리에 진행하고자 하는 건가요?”
송 비서의 표정이 밝아졌다.
“정확합니다. 그게 우리가 원하는 거래입니다.”
“개인 간 거래에서는 흔한 조건이기도 하죠.”
수많은 예술품이 이런 식으로 사라진다.
그렇다면 우리 갤러리가 매입하더라도 그 조건만 지킨다면 문제없다는 의미이기도 하죠?”
“그렇습니다만, 갤러리가 대중 공개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이사회에서 논의해야 하겠지만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순양갤러리가 보유한 작품은 걸작이니까요. 보존을 생각한다면 가능할지도….”
그녀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송 비서는 대화를 조금 더 진척시켰다.
“이걸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는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철을 꺼냈다.
“요청하신 작품 중에는 우리가 팔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판매 가능한 작품 목록입니다. 검토 부탁드립니다.”
벳 포터가 목록을 받자 송 비서는 가볍게 머리 숙였다.
“그럼 결론 나는 대로 연락주십시오.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늦어도 모레까지는 알려드리죠. 괜찮을까요?”
“물론입니다. 그럼.”
송 비서가 나가자 벳 포터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휴대전화로 유명한 한국의 회사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참 궁금했다.
* * *
“역시 그런 조건이군요.”
벳 포터가 알려준 거래 조건은 우병준 상무의 보고가 사실임을 입증했다.
과연 순양갤러리의 수장고에는 몇 점의 작품이 보관되어 있을까? 특별 전시 때 잠시 걸리는 몇억 원대의 작품이 전부라는 걸 장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쪽에서 가져온 목록 좀 봅시다.”
난 우병준 상무가 조사한 순양갤러리의 작품 목록과 비교하며 빠진 것만 따로 정리해서 벳 포터에게 건넸다.
“그건 순양갤러리가 팔지 않을 것 같은데, 어느 정도의 가치일까요?”
손가락을 까닥이며 목록을 살펴보던 그녀는 점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움직이던 손가락이 멈췄을 때 그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지금 크리스티에서 경매에 부친다면 이 작품들의 낙찰가를 예측할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만약 한날한시에 경매한다면 세계적인 부호들의 경쟁심이 불붙어서 천정부지로 뛸걸?”
“정확한 가격을 물어본 게 아닙니다. 대략적인 추측가를 알려줘요.”
다시 생각에 잠기더니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숫자가 나왔다.
“최소 20억 달러.”
오래전 이미 팔아치운 것도 많을 테니, 절반만 잡아도 할머니는 1조 원 이상의 돈을 주식에 묻어 뒀다. 이제 숨어 있는 할머니의 전 재산을 까발려 봐야겠다.
“그럼 순양갤러리에서 가져온 작품을 전부 매입하려면 얼마면 될까요?”
20억 달러라는 말에 눈도 깜짝하지 않는 나를 희한하게 바라보던 그녀는 또 한 번 놀랐다.
“전부?”
“네. 물론 저쪽에서 가격을 제시하겠지만 무조건 받아들일 수는 없잖겠어요? 그러니까 거래가 깨지지 않을, 가장 최적의 금액을 생각해야죠.”
“6억 달러.”
이미 계산을 끝냈는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한다.
“전부 매입합시다.”
나도 망설이지 않았다.
벳 포터는 놀랍고 기쁜 표정이었지만 난 곧바로 제동을 걸었다.
“잠깐만, 벳. 이건 기부가 아닙니다. 그림 매입자는 미라클이거나 내가 될 겁니다. 단지 무상으로 웬트워쓰 아트 갤러리에 임대하는 형식입니다. 이건 정확히 해야 해요.”
그녀의 표정에 실망이 스쳤으나 이것 역시 기부의 흔한 방식이니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얼굴을 찌푸렸다.
“이런… 우리 갤러리가 그 작품들을 받아도 전시를 못 하니 이 모든 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그녀의 안타까운 마음이 전해졌다.
걸작을 꽁꽁 싸매 지하 깊숙이 보관만 하는 것은 작품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아닌가?
난 그녀를 향해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길어봤자 1년입니다. 1년 뒤에는 그 작품들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도록 만들어드리죠.”
“정말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거래부터 성사시켜야죠?”
“저쪽 조건을 들어준다면 거래는 이미 성사한 것과 다름없어요.”
“거래 처음 하시나…. 저쪽 조건은 들었으니 이제 이쪽 조건도 제시해야죠.”
실실 웃는 내 표정에 그녀의 혼란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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