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267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진품 감정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오세현은 감정이 끝나는 대로 버진 아일랜드 계좌로 송금하기 위해 뉴욕에서 돈을 이리저리 돌리고 있을 것이다.
내심 정교한 위작이라도 하나 나오기를 기대했지만 두 달이 다되어갈 때쯤 모두 진품이라는 결과를 연락받았다.
그리고 괜시리 툴툴거리는 오세현의 연락도 받았다.
– 야! 6억 달러 송금했다. 그 돈 씻느라고 돈 많이 썼어. 손해 보는 짓 하지 말고 잘해.
“고맙습니다. 삼촌.”
– 내 일은 끝났지? 나 이제 돌아간다?
“한국…은 아니죠?”
– 당연하지. 깨끗한 바다 보며 좀 쉬어야겠다.
“뉴욕에서도 푹 쉬시지 않았어요?”
– 이놈아. 네가 시킨 일 하느라 놀지도 못했어!
“아, 예. 돌아가셔서 푹 쉬십시오. 가실 때 면세점에서 숙모님 드릴 선물 듬뿍 사십시오. 오랫동안 집 비우셔서 화가 잔뜩 나셨을 텐데.”
전화기를 통해 한숨이 흘러나왔다.
– 너도 어서 결혼해라. 삼십 년쯤 지나면 알게 될 거다. 오랫동안 집 비운 남편이 선물을 잔뜩 사야 하는 건 집을 비웠기 때문이 아냐. 집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사는 거다.
중년 남자의 신세 한탄을 다 들어주고 통화를 끝냈다.
이제 무대는 준비됐고 본 공연을 시작해야 한다.
가장 먼저 장도형 부사장을 불렀다.
“순양증권을 비롯한 여의도와 명동 인맥을 총동원해서 알아보셔야 할 게 있습니다.”
심각한 내 표정 때문인지 장 부사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마 다수의 명의로 순양그룹 주식, 특히 전자와 중공업, 건설, 물산, 상사의 주식을 집중 매입할 겁니다.”
“네? 그게 무슨! 설마 누군가 적대적 M&A를 시도한다는 겁니까?”
“아뇨. 단순한 주식 확보가 목적입니다. 6천억 이상의 자금이 움직일 테니까 분명히 눈에 띌 겁니다.”
다시 한 번 마른침을 삼켰다.
“6천억이나요? 도대체 누가?”
“그걸 찾아내라는 말입니다.”
“아, 네.”
“다수의 차명계좌가 움직일 겁니다. 그놈들을 추적해야 하는데 가능하시겠죠?”
불법적인 거래를 불법적인 방법으로 찾아내야 한다.
각 증권사의 인맥을 동원해서 순양그룹 주식을 대량으로 매집하는 계좌주인의 개인정보를 얻는 것, 명백한 불법이다.
하지만 장도형 부사장은 앓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위기를 한 번 겪고 나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바로 생존과 직결된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고 마지막까지 살아남기만 하면 부의 왕국을 차지할 수 있다. 왕국을 얻기 위해 불법을 저지르는 것쯤은 사소한 일일 뿐이다.
“문제없습니다. 개미를 찾는 것도 아니고 6천억이 움직이는 거래 아닙니까? 백 명이라고 해도 60억, 그것도 전부 순양그룹 주식. 이 정도면 무조건 눈에 띄죠. 전체 명단을 입수하겠습니다.”
“꼭 찾아내야 합니다. 그럼 그 주식을 전부 제 것으로 만들겠습니다.”
할머니가 6억을 위해 새로운 차명계좌를 만들지는 못한다. 분명 기존의 차명계좌를 활용할 것이고 그 계좌에는 6천억이 아니라 이미 은밀히 쓸어담았던 주식까지 들어있다.
우리 할머니, 주머니 탈탈 털면 얼마나 나올까?
다시 한 달이 지났을 때, 순양그룹 주력 계열사 주식이 조금씩 오르기 시작했다.
6억 달러 정도의 거금을 한 달 만에 한국으로 반입했다는 건 할머니 밑에 대단한 실력자가 있다는 의미다. 차명계좌를 두드리면 그도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주가 상승이 눈에 띄지 않게 매집하려면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대단한 실력자는 인내심도 대단했다. 순양그룹 주가 상승이 경제 뉴스에 나오지 않을 만큼 아주 천천히 쓸어담았다.
“차명계좌 파악이 힘든 건 아닙니까?”
걱정하는 나와 다르게 장도형 전무는 여유를 보였다.
“시간이 걸릴 뿐 파악하는 건 문제 없습니다. 백여 개의 차명계좌가 돌아가면 패턴이 보입니다. 게다가 순양그룹이라는 특정 종목만 바라보고 있으니까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확실하죠?”
재차 물었지만, 장도형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머리를 끄덕였다.
“자신 있습니다.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바닥에서 평생을 보낸 사람이니 그를 믿어야 한다.
이제 슬슬 움직여 볼까?
* * *
대문 앞에 서니 감회가 새로웠다.
참 자주 들락거린 집이었지만, 할아버지 장례식이 끝나고 나서는 처음이다.
내게 이 집의 주인은 영원히 할아버지였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이필옥 여사의 집으로 변해버렸다.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렸다. 보통은 현관까지 차로 달렸지만, 오늘은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눈여겨본 적 없었던 정원수와 꽃이 잘 가꿔져 있었고 석등의 은은한 불빛이 여름밤을 비추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산책했을 때는 이런 것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신선하게 다가왔지만, 함께 걸었던 할아버지가 계시지 않으니 아름다운 정원이 슬프게 다가왔다.
현관문을 열고 거실에 들어서자 노기 가득한 할머니가 일하는 사람들을 꾸짖는 중이었다.
“내 허락도 없이 아무나 들여보내? 제정신인 게야?!”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연신 머리만 조아렸다.
내 눈을 마주친 할머니는 이를 악문 채 말했다.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어와? 썩 되돌아가지 못하겠니?”
어차피 정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할머니다. 물론 피는 이어받았으나 따뜻한 말은커녕, 늘 쌀쌀맞은 눈빛만 보냈을 뿐이다.
게다가 난 전생의 기억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이 노파는 할머니라기보다는 할아버지의 부인일 뿐이며 날 죽이려 했던 완전한 타인이다.
난 슬쩍 웃으며 말했다.
“조용히 드릴 말씀이 있으니 서재로 옮기시지요.”
“시끄럽다. 냉큼 나가지 못해?!”
저런 태도를 보이는 할머니에게 예의 있는 손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건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본론부터 꺼내게 만든다.
“무려 6억 달러어치나 물건을 사준 고객인데 차 한 잔쯤은 괜찮지 않습니까? 그 까다로운 조건을 전부 들어주는 고객이 그리 흔치 않을 텐데요?”
새하얗게 질려버린 할머니의 얼굴을 보니 아차 싶었다. 나이도 많은데 이대로 쓰러지면 큰일이다. 차명계좌의 주식도 찾아야 하고 꿍쳐놓은 돈도 찾아야 하는데 말이다.
다행히 건강만큼은 자신하는 할머니답게 핏기 사라진 안색이 전부였다.
“아랫사람들 다 듣는 앞에서 할머니와 손자 사이의 거래를 다 까발릴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너… 너….”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는 할머니를 못 본 체하며 주방 아주머니께 말했다.
“저 커피 한 잔만 가져다주시겠어요? 서재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재로 들어갔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리 없는 할머니는 분명히 따라 들어올 것이다.
할아버지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 장소였지만 처음 보는 물건이 곳곳에 놓여 있어 낯설다. 할머니의 손을 탄 만큼 할아버지의 체취가 사라진 것 같다.
자리를 잡고 기다리니 할머니가 들어왔다. 할아버지의 의자에 앉으려 할 때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할 건데 웬만하면 마주 보고 앉으시죠? 지금 윗사람한테 보고하러 온 거 아닙니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하실 텐데요?”
입술을 깨문 할머니가 발걸음을 돌려 맞은편에 앉았다.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이미 짐작하시는 거 아닙니까?”
“이놈이! 어디서 감히 건방을 떠는 게야?”
꼿꼿한 저 자존심이 얼마나 갈지 두고 보는 것도 재미다. 오늘 완전히 무너뜨려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대 순양그룹 안주인이 그림을 팔아먹고 위작으로 갤러리를 채워놓았다는 것을요. 이건 진짜 엄청난 스캔들이 될 겁니다.”
“흥!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알아듣지도 못하겠구나.”
“아직도 감을 못 잡으셨습니까? 아니면 모른척하시는 겁니까? 뉴욕의 웬트워쓰 아트 갤러리와의 거래는 제가 파놓은 함정이란 말입니다. 벳 포터는 제 장단에 놀아난 꼭두각시고요. 그림값 6억 달러도 제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라고요.”
“…….”
“할머니. 이미 끝났습니다. 제 손엔 할머니가 직접 사인한 비밀 계약서가 있어요. 또한, 버진 아일랜드의 비밀계좌번호까지 기억합니다. 이럴 땐 시치미 떼고 모른척할 게 아니라 상대가 뭘 원하는지 확인하는 게 우선입니다.”
“시끄럽다. 어디서 헛소문을 듣고 와서 나를 협박하는 게야?”
담대한 척 나를 노려보고 있지만 가늘게 떨리는 손끝은 어찌할 수 없나 보다.
난 가져온 계약서 사본을 할머니 앞에 던졌다.
“재단 소유의 수천억 원대 자산을 팔아먹었으니 횡령, 그림을 미국으로 밀반출했으니 밀수, 해외 유령회사를 세워놓고 돈을 빼돌렸으니 외국환관리법 위반. 제가 장담하는데 이 정도면 할머니는 더 이상 쇼핑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남은 여생을 수의(囚衣) 한 벌로 지내야 하니까요.”
“네… 네놈이…!”
“할머니는 이 손자를 잘 모르시죠? 아니다, 잘 아시려나? 제가 피도 눈물도 없는 할아버지와 똑같다는 것을? 전 제 손으로 할머니를 법정에 세우고 감방에 보내는데 눈곱만큼의 거리낌도 없어요. 웬 줄 아십니까?”
감방이라는 말이 나오자 할머니는 더욱 심하게 손을 떨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날 트럭으로 죽이려 한 것 때문이 아닙니다. 할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걸 자꾸 뺏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하얗게 질린 할머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내 입에서 트럭 사건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당신 잘못이라며 묻어두셨어요. 제게도 그러시더군요. 할머니를 용서하라고. 그래서 제 기억에서 지웠습니다. 하지만 순양그룹에서 절 밀어내려고 하셨기 때문에 어쩔 수 없어요. 끝장을 봐야겠습니다.”
딱딱하게 굳은 내 표정과 말투에서 내 뜻을 읽었는지 할머니는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어쩌면 제정신을 차리기 위한 시간일지도 몰랐다.
한참 만에 입을 연 할머니는 다시 본래의 모습을 보였다.
“그래서? 네놈이 날 어찌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네가 가진 증거라는 걸 만천하에 까발리려고 해도 뜻대로 안 될 거다. 순양그룹의 힘은 네놈이 쥐고 있는 게 아니라 내 아들이 쥐고 있어. 신문, 방송에 기사 한 줄 나오지 않을 거다.”
“대단한 아들을 두셨습니다.”
비꼬는 내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아들 힘자랑이 계속되었다.
“오히려 네놈이 당해. 버진 아일랜드? 그 계좌를 네놈 것으로 만들어 널 구속시킬 거야. 6억 달러나 빼돌린 천하의 잡놈으로 만들어 주지.”
가능성 없는 것도 아니다.
큰아버지들이 모든 연줄을 동원하고, 언론에 돈을 뿌려 그들의 입을 틀어막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이 싸움을 나와 큰아버지의 싸움으로 만들어 서로 피 흘리는 동안, 그녀는 차명 주식을 정리하고 해외로 도망가 버리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할머니도 생각하지 못하는 게 하나 있다. 모든 일은 단순하지 않다. 여러 가지가 서로 얽혀 결과를 만들어 낸다.
사회 경험이 없으니 전체를 읽는 눈이 있을 리 없다.
“순양그룹의 전 재산을 모두 때려 부어도 언론을 못 막을 겁니다. 왜냐하면 이건 정치 싸움으로 변질되기 때문이죠.”
할머니는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해 미간을 찡그리기만 했다.
“전 이 일을 언론이 아니라 야당에 흘릴 겁니다. 총선에서 진 야당은 호시탐탐 정부 여당을 공격할 건수만 찾고 있어요. 그런데 할머니는 외교부를 이용했더군요. 밀수나 하는 외교부. 이걸 야당이 보고만 있을 것 같습니까? 특검과 청문회가 열릴 겁니다.”
또다시 할머니의 표정이 변했다.
“야당 정치인이 순양의 돈을 아무리 많이 받아먹었어도 이건 안 덮어줘요. 자기들도 살아야 하니까요.”
당황한 할머니를 보며 웃었다.
“재미있겠죠? 할머니 때문에 나라가 시끄러워질 테니까.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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