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268
“어림없는 소리!”
큰소리는 치지만 할머니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내 말을 믿어서가 아니다. 옳은지 그른지 판단 자체를 못하기 때문이다.
사건을 가장 크게 확대하는 방법은 정치를 이용하는 것인데 할머니는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쪽으로는 뉴스나 신문을 제대로 본 적 없는 평범한 노파일 뿐이다.
“하나 더 말씀드릴까요? 진짜 최악의 상황을?”
큰아버지였다면 이런 말은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척하면 척 아닌가?
“야당이 국회에서 순양갤러리의 미술품 밀수에 외교부가 개입됐다고 터트리는 순간, 이건 한국과 미국의 외교 문제로 번집니다. 한국 정도의 국가가 밀수 같은 걸 하리라고는 미국도 생각 못 했겠죠? 할머니는 그걸 이용한 것일 테고요.”
할머니의 생각이겠는가? 누군가 알려준 것이겠지.
“이제 미국은 우리나라에 대한 꼬투리 하나 잡은 겁니다. 미국은 이걸 덮어주지 않습니다. 웬트워쓰 아트 갤러리부터 조사를 시작할 테고…. 전 그 그림이 전부 가짜라고 할 겁니다.”
“그림은 진짜야!”
“압니다. 하지만 밀수나 일삼는 순양갤러리의 말을 누가 믿겠습니까? 특검에서 순양예술재단의 소장품 전수 검사를 시작하겠죠? 그럼 몰래 팔아먹은 그림 대신 가지고 있는 위작이 쏟아져 나올 테고, 웬트워쓰 아트 갤러리의 주장은 진실이 됩니다.”
가짜 그림을 가지고 있는 순양갤러리.
이 일은 세계적인 뉴스가 될 테고 미술업계는 발칵 뒤집힌다. 그럼 지금까지 순양갤러리의 그림을 은밀히 사들은 고객들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이제 국제적인 소송이 줄을 잇는 건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다.
“아 참, 계약서에 나와 있죠? 위약금은 거래액 6억 달러의 3배, 뭐…. 괜찮겠죠? 보험사가 처리해줄 테니까.”
우리 할머니, 이제야 이 일이 얼마나 커질지 감 잡았다. 꽉 쥔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네놈은 고작 위약금이나 받으려고 이런 짓을 한 게야?”
“설마요? 돈 버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지 않았습니까? 이런 협상 테이블에서는 상대가 뭘 원하는지 확인하는 게 우선이라고요.”
“그, 그래서? 네놈이 원하는 게 뭐냐?”
“하나 더 알려드리죠. 칼자루를 쥔 자는 원하는 게 뭔지 먼저 말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고 싶으시면 할머니가 뭘 줄 수 있는지부터 말씀하세요. 그게 순서입니다.”
더 말할 필요는 없다. 아직 알아내야 할 것이 남아있다. 진짜 알아내야 할 것이.
“생각할 시간을 드리죠. 똘똘한 아랫사람을 불러 상의하든지, 자랑스러운 아들을 불러 상의하든지 하세요. 그래야…. 나라가 시끄러워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요.”
의자에서 일어나 서재를 먼저 나가는 놈이 쎈 놈이라는 것도 알았을 것이다. 나오기 전에 꼼짝도 못 하는 할머니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던졌다.
“거, 손자가 왔는데 커피 한 잔도 내주지 않는 건 너무 야박한 거 아닙니까? 할머니 맞아요?”
다시 천천히 걸어왔던 정원을 둘러보며 집을 나왔다.
초조하게 기다렸던 김윤석 대리와 직원들이 내 모습을 보자 황급히 차에서 내려 달려왔다.
“사람 더 충원하세요. 오늘부터 이 집을 드나드는 사람을 확인해야 합니다. 혹시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면 끝까지 뒤를 쫓아요.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정체를 파악해야 합니다. 아시겠죠?”
“네. 실장님.”
“그럼 수고 좀 해 주세요.”
누구든지 가장 빨리 오는 놈, 그놈이 이필옥 여사의 브레인이다.
* * *
입술을 깨문 채 서재를 서성이던 이필옥 여사는 수화기를 들었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려면 자신의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천 이사. 급해. 지금 당장 집으로 와줘야겠어.”
그녀가 연락한 지 삼십 분쯤 지났을 때, 중년 사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입니까? 이사장님.”
“아, 천 이사. 어서 와.”
급히 달려온 천 이사는 물 한 잔 마실 틈도 없이 이필옥 이사장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진도준이? 이게 전부 그놈이 꾸민 함정이었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그래. 이걸 봐.”
이필옥 여사는 계약서 사본을 내밀었다.
“그걸 그놈이 쥐고 있더라고. 아무래도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아.”
천상필 순양예술재단 이사는 영문 계약서 사본을 보자마자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이 수십 번이나 검토한 계약서니 힐끗 보기만 해도 가짜가 아님을 알았다.
“이걸 야당에 뿌리겠다고 했습니까?”
“그래. 특검이니, 청문회니, 외교 문제가 될 거라느니 하면서 협박까지 하더라고.”
“언론이 아니라 야당? 거 참…. 허허.”
천상필 이사는 어이가 없는지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똑똑한 놈이군요. 손에 쥔 무기를 어떻게 하면 가장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 아는군요.”
이필옥 여사의 눈꼬리가 올라갔다.
“지금 내가 그놈 칭찬 들으려고 천 이사 부른 거야?”
“죄송합니다. 진도준이가 핵심을 찔러서 그만….”
천 이사가 고개 숙이며 입을 다물자 서재는 침묵만 감돌았다.
한참의 침묵 끝을 참지 못한 이필옥 여사가 입을 열었다.
“하나만 이야기해봐. 그놈이 이거 야당에 흘리면 정말 외교 문제가 커질까?”
“외교보다 국내 문제가 더 심각합니다. 총선에서 패배한 야당에게 이것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을 겁니다. 없던 문제라도 더 키우려고 발악할 겁니다.”
“내가, 이 순양의 안주인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도?”
“내년에 재보궐 선거가 있습니다. 그때 야당이 이기면 여당의 과반의석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지금 여당은 간당간당하게 딱 2석 앞서있으니까 역전도 가능합니다.”
“그놈 말이 사실이라 이거지?”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알았어. 나가 봐.”
“네. 이사장님. 제가 진도준이를 한번 만나보겠습니다.”
“당연히 그래야지. 해결하기 전까지는 내 얼굴 볼 생각하지 마.”
천상필 이사는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는 이필옥 여사에게 머리를 숙이고 서재를 빠져나왔다.
* * *
“이야, 이 자식. 선수구먼. 할머니 잡으려고 6억 달러짜리 함정을 파?”
이학재 회장은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더니 혀를 내둘렀다.
“네 할머니 이제 큰일 났다. 이건 순양그룹의 힘으로 못 덮을 정도야. 휠체어 타고 검찰청 출두는 피할 수 없을 것이고, 야당이 짹짹대면 실형이야. 빠져나오려면 집행유예 혹은 병보석뿐이네. 빼박이다. 흐흐.”
“순양예술재단은 문 닫아야겠죠?”
“그건 덤이고.”
이학재 회장은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그런데 재판 3심까지 가는 데 몇 년이나 걸릴지 몰라. 내년 보궐 선거 끝나면 네 할머니 사건은 흐지부지…. 그 안에 지분 싹 정리해버리면? 넌 얻는 거 하나 없다.”
“재판 가기 전에 끝내야죠.”
“무슨 방법이라도 있어?”
“할머니의 해결사가 있습니다. 이 사람 한번 보시죠.”
인화한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밤에 찍은 거라 선명하지는 않지만 얼굴을 알아볼 정도는 된다.
“혹시 아십니까? 누군지?”
이학재 회장은 사진을 유심히 보더니 한참을 생각했다.
“아! 이 친구. 천… 상필. 맞아 천상필 이사다.”
“아시는 분입니까?”
“그래. 이 친구 그만둔 지 꽤 오래됐는데? 예술재단 이사였지 아마?”
“어디 출신입니까?”
“그룹 법무팀이었는데 재단으로 차출됐지. 똘똘한 친구였는데 몇 년 근무하지도 않고 그만뒀어. 비주류로 밀려나서 그만둔 걸로 알고 있는데?”
“법무팀이면 변호사겠군요.”
“아마도 그렇겠지? 그런데 이 친구는 왜?”
“제가 할머니에게 선전포고하자마자 그자가 가장 먼저 달려왔습니다.”
“그래? 그럼 그 친구가 최측근인 건가?”
“브레인이겠죠. 할아버지께서 곤경에 빠졌을 때 가장 먼저 찾은 분이 바로 회장님이듯이요.”
이학재 회장은 자신을 가리키는 내 손을 보며 피식 웃었다.
“수족을 자르면 이필옥 여사는 꼼짝을 못하지. 여분으로 가지고 있는 수족이 없거든.”
“머리도 하나겠죠? 천 이사는 브레인이니까요. 여분이 있으면 곤란합니다.”
이학재 회장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독한 놈. 할머니 머리를 잘라 네 손에 철컥 붙이겠다는 거지?”
“왜요? 설마 천상필 이사가 이 회장님처럼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죠?”
“힘은 상대적인 거다. 꼭두각시 같은 할머니 대신 순양예술재단을 마음대로 움직이는 힘은 내가 순양의 이인자였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아니 더 크지. 난 용 꼬리, 천 이사는 뱀 대가리니까.”
됐다. 얻을 정보는 다 얻었다.
“용 꼬리를 자르려면 용을 잡기 위해 대규모 원정대가 필요하지만, 뱀 대가리 자르는 건 땅꾼 한 명이면 충분해요. 그게 뱀 대가리의 한계입니다.”
“땅꾼은 있어?”
“네. 무시무시한 땅꾼 하나가 있죠. 흐흐.”
이학재 회장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만 가라. 널 보고 있으면 내가 용 꼬리였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 * *
– 진도준 씨?
갑자기 걸려온 낯선 전화, 순간 느낌이 왔다.
이놈, 뱀 대가리다.
“그렇습니다만.”
– 이필옥 여사님, 그러니까 진도준 씨 할머님 문제로 만나고 싶습니다만…. 시간 좀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머리 아프고 귀찮은 일은 전부 아랫사람에게 미루는 할머니의 습성을 잠시 깜박했다.
이 정도 큰 사안이면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을 움직이는 게 당연하고, 그런 사람은 브레인이지 팔다리 역할은 아니다.
“누군지 모르겠지만, 최소한의 예의부터 구경합시다. 누굽니까? 당신?”
칼자루는 내 손에 있다는 걸 뱀 대가리가 똑똑히 알도록 해줘야 한다.
– 아, 이런 죄송합니다. 전 순양예술재단의 이사, 천상필이라고 합니다.
“천상필? 재단 이사들 중에 천상필이라는 이름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누구요? 당신?”
– 아…. ‘과거에’라는 말을 빼먹었습니다그려. 하하.
뱀 중에 능구렁이 과에 속하는 놈이다.
“좋습니다. 할머니의 대리인이라 치고, 얼마를 들고 와야 하는지 잘 생각하고, 할머니와 의견 조율한 뒤 다시 연락하세요. 끊습니다.”
전화는 끊었지만 뱀 대가리가 ‘어린놈이 싸가지는 어디에다 밥 말아 처먹었나’하는 구시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제 우리 할머니와 뱀 대가리의 그릇이 얼마나 큰지 두고 볼 일이다.
* * *
순양호텔의 방 하나를 빌렸다. 능구렁이가 마음 놓고 능청을 떨려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게 편할 것 같아서였다.
오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천상필은 능구렁이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은 날카로운 인상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진도준 실장님. 천상필입니다.”
“진도준입니다. 앉으시죠.”
“뭐 좀 아시네. 이런 밀실도 준비하실 줄 알고 말입니다. 하하.”
“재벌 나오는 드라마 흉내 좀 내봤습니다.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자리에 앉아 테이블에 놓인 커피잔을 보자 그가 또다시 웃었다.
“이럴 땐 커피보다 위스키 한잔이 더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당신이 가져온 숫자가 마음에 들면 발베니(Balvenie) 위스키를 박스째 가져다 드리죠.”
“역시 뭐 좀 아시네. 오늘 허리띠 풀고 거하게 한잔하게 생겼습니다그려.”
“김칫국은 그만 마시고, 가져온 숫자부터 들어봅시다.”
실실 웃던 천상필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원하는 걸 들으러 왔습니다. 단지 숫자뿐이라면 이런 큰 함정을 팔 이유를 못 찾았으니까요. 함정 파는 비용으로 6억 달러나 퍼부은 분이 돈을 원한다? 농담은 그만하시죠.”
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그를 향해 말했다.
“갑작스러운 통화 때문에 제 생각을 정확히 전달 못 했군요.”
“이제야 말이 통하겠습니다. 그래, 원하는 게 뭡니까?”
“원하는 건 숫자가 맞습니다. 단지 내가 원하는 숫자가 아니었을 뿐입니다. 천상필 이사, 당신이 원하는 숫자를 들고 오라는 뜻이었습니다.”
순간 천상필은 능청스러운 말도 못하고 날카로운 눈빛도 보내지 못했다. 눈만 껌뻑거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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