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270
혼자 남은 천상필은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직 잔뜩 남아 있는 술병을 들어 잔에 부었다. 많이 녹아버린 얼음 몇 개를 떨구고 잔을 흔들었다.
“씨발…. 조 단위라니… 저 어린놈의 새끼는 진짜 미쳤어.”
그는 독한 위스키를 물 마시듯 들이켰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조라는 단위가 떠나지 않았다.
자신이 관리하는 차명주식도 자꾸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물론 차명주식 역시 조 단위다. 이필옥 여사는 돼지저금통에 동전을 모으듯 이십 년 가까이 야금야금 주식을 사 모았다.
천상필이 이필옥 여사의 차명주식 목록을 처음 봤을 때 그냥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순양그룹의 지배지분 구조의 단면을 엿봤을 때 주식 시장의 거래가로 이 여사의 주식 가치를 계산하는 건 중단했다.
초창기에 진 회장이 주식을 분산하기 위해 증여한 주식은 비상장 상태였지만, 이십 년이 지난 지금은 그룹 지배지분으로 둔갑했다.
거래는 없지만 가치는 어마어마한 주식, 그리고 꾸준히 사 모은 주요 계열사의 주식. 이 주식은 꾸준히 오른 우량주들이다.
천상필은 이것들을 관리하고 이필옥 여사가 돈을 주면 추가로 매집했다. 그리고 골고루 분산하는 일을 십 년 넘게 도맡아왔다.
물론 충분한 보수를 받았다.
주변의 잘나간다는 변호사 친구들과 골프치며 그들이 돈 자랑할 때 속으로만 웃었다.
친구들이 렉서스나 벤츠에서 골프백을 꺼낼 때 그는 그랜저 트렁크를 열었지만 조금도 부러워하지 않았다.
벤츠나 렉서스보다는 십여 채의 강남 아파트를 가지는 게 더 현명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고, 십여 채의 강남 아파트 수십 배에 달하는 달러가 든 해외 계좌가 더 든든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그가 뿌듯해하던 십여 채의 강남 아파트와 달러 계좌가 너무나 하잘것없이 느껴졌다.
강남 아파트 대신 비벌리 힐즈의 대저택과 마이애미 빌라가 생각났고, 벤츠나 렉서스 대신 보잉사의 자가용 비행기가 손에 잡히는 듯했다.
지금껏 유지했던 가치관이 ‘조(兆)’라는 단 한 자 때문에 무너져버렸다.
兆는 점괘 또는 조짐이라는 뜻이다.
이 얼마나 적절한 뜻인가?
너무 커서 정확히는 알지 못하고 추측으로만 가늠할 수 있기에 이 단어를 단위로 쓰는 것이다.
천상필은 1조 원이라는 돈의 크기를 측량하기는 어려웠지만, 그 돈으로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었다.
그는 위스키 한 병을 다 비울 동안 호텔 방을 떠나지 못했다.
어린놈의 미친 제안을 받아들이기 전에 확인해야 할 것이 남아 있었다.
* * *
이필옥 여사의 장남과 차남은 망연자실한 채 계속 한숨만 쉬었다. 어머니가 아니고 아내였다면 머리카락을 죄다 뽑아버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도대체 그 많은 돈을 어디에 썼습니까? 쇼핑이든 뭐든 전부 회사 돈으로 처리하지 않았습니까? 현찰은 어디에 쓰시려고 그런 짓까지 저지른 겁니까?”
진영기 부회장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누르며 최대한 공손한 어조로 물었다. 평소 같았으면 이런 말투조차 거슬린다고 소리칠 법도 한데 지금은 지은 죄가 있으니 고분고분했다.
“너희를 위해 그런 거지 날 위해 그랬겠냐?”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요?”
“주식이다.”
진영기는 또 한숨을 쉬었다.
“그거, 별반 소용없다는 거 모르십니까? 시답잖은 계열사 주식 아무리 끌어모아 봤자 경영권 방어에 도움 안 됩니다. 몇 번이나 말했습니까?”
“지배지분의 3% 이상, 5% 이하. 이게 내가 가진 주식이다. 이래도 도움이 안 돼?”
두 아들은 숫자를 듣자 숨이 멎을 듯했다. 뒷방 늙은이로 돈이나 써대며 돌아다니는 줄 알았는데…. 큰 문제를 일으켰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다.
놀란 아들을 보자 이필옥 여사는 다시 순양의 안주인다운 표정으로 변했다.
“동기 네가 도준이 그놈이랑 공동의결권을 맺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런 무리수는 두지 않았다. 마음이 조급해서 그리된 게야.”
아들의 책망에서 벗어난 모친은 비난의 화살을 돌렸다.
입 다물고 있던 진동기가 말했다.
“도준이는 적당히 타협 보는 놈 아닙니다. 그놈은 항상 마음먹은 대로 끝까지 가는 놈입니다. 저도 그놈에게 당한 거라 잘 알아요. 빨리 대책부터 세워야 합니다.”
“이놈이 딴소리는….”
“딴소리가 아니라고요. 내게는 공동의결권을 요구했지만, 어머니에게 요구한 거 있습니까? 없죠? 그럼 이걸 크게 터트리겠다는 겁니다.”
진영기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놈 영악한 거 몰라? 곧 뭔가를 요구하겠지.”
“답답한 소리 좀 그만해. 몰라서 그래? 이건 복수라고! 형도 눈치챘잖아. 교통사고…. 아버지와 도준이가 죽을 뻔한 그 사고!”
진동기가 소리 지르자 진영기도, 이필옥 여사도 얼굴이 굳어지며 입을 다물었다.
“도준이 말대로 이 내용을 야당으로 흘리면 우리 순양의 힘으로도 못 막아. 그놈들도 지금 전쟁 중인데 우리 사정 봐줄 리 만무하잖아.”
동생과 같은 생각인지 진영기도 이견을 내지 않았다. 여의도는 지금 목숨과도 같은 과반 숫자 확보 싸움에 전력을 다하는 중이니까.
“그, 그래서? 지금 이 에미가 밀수범으로 감옥에라도 가라는 게냐? 이, 이놈들이 진정…!”
두 아들은 기가 막혀 부르르 떠는 모친의 심정 따위를 배려할 여유가 없었다.
“그 뒤로 도준이는 아무런 연락 없습니까?”
이필옥 여사는 냉정한 두 아들의 태도가 섭섭했으나 그만큼 위급한 상황이라는 걸 받아들였다.
“오늘 사람을 보냈다. 지금쯤 만나고 있을 게다.”
“누굴 보냈습니까?”
“내가 가장 믿는 사람이다. 천상필 이사야.”
두 아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확인했지만, 기억에 없는 사람이다.
어머니의 신뢰는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그자가 얼마나 충성스러운 놈인지가 중요하다.
항상 간신을 신뢰하는 주인이 더 많았다.
진영기 진동기 형제는 서로의 눈빛을 교환하는 것으로 대책은 하나뿐이라는 걸 확인했다.
“그 천상필 이사가 어머니 대신 이 사태를 책임질 만큼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믿을만한 사람인 건 틀림없다. 일 처리도 빠르고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원하는 게 뭔지 파악한다. 이필옥 여사도 잘 모르는 자신의 진심까지 읽어내는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아들이 말하는 믿음은 옥살이를 대신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주저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두 아들은 얼굴을 찌푸렸다.
단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이 나와야 한다. 그렇더라도 몇 번이나 더 확인하고 대가를 약속하고 신신당부해야 가능한 게 대신 옥살이하는 것이다.
천상필은 대타로서 적임자가 아니다.
“천상필 외에 미술품 팔아먹은 거 아는 놈은 몇이나 됩니까?”
“서너 명 된다.”
“그놈들은요? 천상필이보다 낫습니까?”
의미 없는 질문이었다.
진도준과 담판 지으러 간 놈이 가장 믿을만하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두 아들은 머리를 젓는 어머니를 보자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아주 다행인 것도 있다. 그들은 이런 일을 여러 번 처리해봤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며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고 동시에 휴대전화를 꺼냈다.
“순양예술재단에서 일했던 천상필이라는 놈이 있다. 그놈 인적사항 파악해서 먼지 좀 털어. 치명적인 걸 찾아야 한다. 한칼에 무릎 꿇을 정도로 강력한 거 말이야. 그래. 시간 없다. 인력 전부 동원해.”
두 사람은 같은 내용의 통화를 끝내고 어머니를 향해 말했다.
“차명주식 관리도 천상필이가 했습니까?”
“그래.”
“그럼 지금 짐 챙겨서 출국하세요. 이 일이 잠잠해질 때까지는 들어오실 생각은 꿈도 꾸지 마시고요. 입 무거운 놈들 붙여드릴 테니까 그놈들과 움직이세요.”
이필옥 여사는 입이 달싹거렸으나 차마 불만을 말하지 못했다. 두 아들의 표정을 보니 아끼던 천상필마저 날려야하는 아주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 * *
“이거 정확한 겁니까?”
야당의 원내수석부대표는 내가 전한 서류를 흔들었다.
“그 서류에 나온 날짜에 영사관에서 나온 트럭, 그걸 운전한 사람은 영사관 직원입니다. 외교부를 통해 영사관 업무일지를 확인하십시오. 그들은 적절한 대답을 못 할 겁니다.”
“진 실장, 이거 확실하지 않으면 내가 곤란해져요.”
“수석님. 제가 실수할 일을 하겠습니까? 믿으세요.”
원내부대표는 여전히 수상쩍은 눈빛이었다.
“진 실장. 솔직히 털어놔요. 이거 마지막 과녁이 어딥니까?”
“수석님. 그거 파기 시작하면… 제가 장담하는데 최소 외교부 장관과 청와대 외교 특별보좌관은 옷 벗습니다. 또한, 미국에서 엄청난 항의도 쏟아질 겁니다. 최종 과녁이 어디든 청와대 기둥 하나는 뽑을 걸요?”
파괴력은 놓치기 아까울 정도니 부대표의 눈빛이 달라졌다.
“찝찝하시면 그냥 식사나 하고 돌아가십시오.”
“그냥? 그럼 이거 묻어버리려고?”
“아뇨. 다른 계파의 저격수에게 던져 주죠, 뭐. 머리 조아리며 받아갈 의원은 많습니다.”
머리 조아리며 라는 말에 부대표는 당황한 듯 보였다.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고,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시오? 오해하신듯한데, 미덥지 못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묵직한 한 방이니 확인 차 물어보는 겁니다. 허허.”
“이해합니다. 아무튼, 그 날짜에 있었던 그 일, 그거 하나만 파시면 외교부가 발칵 뒤집힐 겁니다. 참, 트럭을 직접 운전한 직원 이름도 있으니까 여차하면 그 직원을 소환하셔서 국회에 세우십시오.”
이름까지 있다고 하니 수석부대표가 만족한 듯 보였다. 다시 수저를 들 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진동기 부회장의 전화다.
아이고, 우리 할머니. 든든한 아들까지 불렀구나.
“네. 큰아버지.”
– 뭐 하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좀 보자.
“죄송합니다. 지금 손님과 식사 중이라 움직일 수 없습니다만.”
– 그럼 밥 먹고 와. 술 한 잔 하자. 삼청동 알지? 그리 와라.
통화를 끝내고 식사를 서둘러 끝냈다.
공동의결권을 가진 파트너 아닌가? 무시하면 안 된다.
* * *
천상필 변호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신호가 가면 곧바로 전화를 받던 이필옥 여사의 전화기가 꺼져있다. 수행비서도 마찬가지였고 문자를 보내도 회신이 없다.
위기를 느끼자 해외도피라도 한 것일까?
그렇다고 해도 연락까지 끊어버린 건 심하다는 생각이 들 때, 이필옥 여사를 대신해서 나서는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진영기 부회장의 비서실에서 온 전화는 조금 강압적인 느낌이었다.
“아들한테 뒤처리를 맡기고 도망쳤다 이거지?”
천상필은 단단히 마음먹고 순양그룹 사옥으로 향했다.
“우리 처음 보나? 낯이 익은데?”
대뜸 반말로 맞이하는 진영기 부회장의 태도가 불쾌했지만, 이 집안 사람 중에 예의 차리는 놈이 없다는 건 예전 그룹 법무팀 시절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예전 그룹 법무팀 소속이었습니다. 그때 몇 번 뵌 적 있습니다.”
“어쩐지, 초면은 아닌 것 같았어. 하하.”
진영기는 호탕하게 웃으며 천상필의 손을 잡았다.
“이거, 어머니 밑에서 애쓴다고 들었는데 내가 고맙다는 말도 못했어.”
“아닙니다. 제 일이었을 뿐입니다.”
“성격 한 번 깔끔하구만. 그럼 구질구질한 거 빼고 담백하게 가 보자고.”
“그런데 여사님께서는…?”
“아, 혹시나 해서 비행기 태워 보냈어. 어머니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역시 그렇군요.”
“일단 천 변호사 당신이 관리하는 차명주식 있지?”
“네.”
“그거 목록부터 줘봐. 명동 애들에게 뿌렸지? 싹 거둬서 실명전환부터 해야겠어.”
이것 봐라?
마치 옆집에 빌려준 그릇 돌려받는 듯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천상필 변호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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