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286
간절한 진태준을 보며 난 입을 떡 벌렸다.
“6백억?! 우와…. 태준 형 돈 많구나!”
“놀리냐? 진짜 알짜 부자는 너잖아. 뭘 놀라는 척해?”
“난 6백억을 날릴 만큼 부자는 아니거든.”
“야! 염장질 그만해!”
웃는 내 모습에 속이 타는지 소리를 버럭 지른다.
“혹시 영준이 형에게는 부탁해 봤어? 순양전자라면 6백억 정도는 기밀비로 빼내 올 수 있을 텐데?”
진태준은 손부터 내저었다.
“미쳤냐? 그 인간이 어떤지는 잘 알잖아? 절대 남 도와줄 인간이 아냐. 대신 빌려줄 듯 말 듯 사람 속이나 태우겠지.”
“진짜 그 이유야? 영준이 형에게 말했다가는 6백억 날린 게 흘러 흘러 둘째 큰아버지 귀에 들어갈까 봐 말하지 않은 건 아니고?”
“너도 영준이 형 닮아가냐? 줄 듯 말 듯 자존심 밟아가며…. 애태우는 내 모습이 그렇게 보고 싶어?”
여기까지가 진태준의 인내심이다. 6백억이라는 큰 사고를 쳤지만 수습하는 데는 잠깐의 부탁이 전부다. 자존심은 잠시 묻어두고 끈질기게 매달리는 보통 사람의 인내는 기대하기 어렵다.
“형은 날 핏줄로 봐? 진짜 사촌 동생으로 생각하는 거야?”
“무슨 말이야, 그게?”
“몰라서 그래? 내가 둘째 큰아버지와 지분 놓고 티격태격하잖아. 진심으로 도와줄 그런 사이는 아니지 않아?”
인내를 잃고 인상 쓰던 진태준이 심각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만큼 급하다면 대답이 되겠냐?”
이달 안에 지급해야 할 돈이다. 거래처에 줘야 할 돈을 차일피일 미뤘거나 어음으로 돌려막기 했다. 그렇게 몇 달을 버티다 더는 미룰 수 없어진 거다.
더 미루다가는 6백억 날린 게 모두의 귀에 들어갈 지경까지 궁지에 몰린 것이다.
“명동도 있잖아. 순양의 신용이면 문제없을 텐데?”
“그 즉시 아버지 귀에 들어간다. 이것도 대답이 됐어?”
잠깐 그의 심각한 표정을 보다 웃으며 말했다.
“6개월. 이자는 안 받지만, 기한은 지켜.”
진태준의 표정이 환해졌다.
“도준아.”
“됐어. 나중에 밥이나 한번 사.”
그에게 손을 내저으며 수화기를 들었다.
“장 부사장님. 6백억 인출 준비해 주세요.”
진태준이 안도의 한숨을 길게 쉴 때 그를 향해 말했다.
“형은 순양건설 어음 준비해줘.”
“응? 아…. 그렇군. 차용증이 필요하다, 이거지?”
“기한 지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 아냐? 그리고 태준 형도 어음이 좋지 않아? 공금 손댄 거 들킬 염려도 없고.”
그의 안색이 붉게 물들었다.
“너 눈치 빠른 걸 깜빡했다.”
“걱정 마. 비밀은 지켜줄 테니까. 적어도 우리가 고자질할 만큼 싫어하는 건 아니잖아.”
그를 향해 눈을 찡긋했다.
6백 억짜리 폭탄을 선물로 준 사촌 형에게 감사하는 마음도 들 만큼 호감도 있다.
* * *
고등학생을 중심으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을 때, 18대 총선이 시행되었다.
작년까지 집권여당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맥없는 모습을 보여준 야당은 아니나 다를까 처참한 패배를 기록했다.
투표율이 46.1%밖에 안 되어 전국단위 선거 사상 최악이었지만 여당과 그 지지세력이 의회마저 장악했다.
금융위기의 진정한 쓰나미가 아직 한국을 덮치지 않았지만, 전국이 정치에 매몰되어 있는 동안 체력 약한 지방이 먼저 쓰러지기 시작했다.
약한 체력이다 보니 은행이 조금만 돈줄을 죄어도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쓰러진 빈자리는 대기업이 야금야금 먹어치웠다.
“사람 욕심은 끝이 없어. 그렇지?”
신임 대통령과 첫 경제인 만찬을 끝내고 돌아온 이학재 회장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진동기 부회장님 말씀이십니까?”
“그 사람도 포함해서.”
“청와대 반찬이 입에 맞지 않으셨습니까? 불만이 많아 보이십니다. 흐흐.”
“지방 아파트 건설에 뛰어들고 싶어서 규제 좀 풀어달라고 다들 난리 치더라.”
“새삼스럽게 왜요? 규제 때문에 못 들어간 것도 아니면서. 대기업 아파트가 지방마다 다 들어섰지 않습니까?”
“경치 좋고, 입지 조건 좋은 곳은 전부 그린벨트니까. 그거 규제만 풀어주면 노다지 아니겠어? 개발 제한구역이니 땅값은 바닥이고 아파트만 세우면 수도권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이익이 많이 남잖아.”
“그래서 청와대는 뭐라고 해요?”
“적극 검토. 해준다는 말이지. 지방 경기가 안 좋으니 그걸로라도 부양책을 쓰겠다는 건데….”
“잘됐네요. 지방은 아파트 브랜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순양과 대현, 두 이름이면 어딜 가더라도 밀리지 않으니까요.”
이학재 회장은 내 말의 진의를 알아채고 슬며시 웃었다.
“넌 이번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으려고 작정했구나.”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니까요. 둘째 큰아버지와 이야기 나누셨죠?”
그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이번에 완공한 버즈 두바이, 그거 때문에 순양건설의 위상이 대현을 누를 정도잖아. 세계 최대의 빌딩이니까. 주가도 상당히 뛰었고. 진동기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은 거지.”
“원하는 건 우리 HW가 시공해 달라는 거겠죠?”
“그래. 두바이에서 돈 들어오려면 아직이고, 있는 돈마저 두바이에 다 쓸어 박았잖아. 엄두도 못 낼 지경인데 청와대에서 가장 강력하게 요구하더라.”
“어차피 순양건설은 제 손에 들어올 테니까 원하는 대로 들어주죠, 뭐.”
“그게…. 재미있는 일이 생겨서 말이야. 선뜻 결정할 필요가 없어.”
“재미있다니요?”
“똑같은 제안을 대현에서도 했다.”
“네?”
깜빡했다. 대현도 두바이에 올인했고 자금 사정은 순양과 마찬가지다. 대현 그룹도 아들 여럿이 그룹을 나눠 가진 채 서로 기회만 노리며 품 안의 칼을 꼭 쥐고 있다. 언제든 찌르고 뺏어오기 위해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대현이다. 두바이 몰락이라는 네 예측이 맞다면 대현 건설은 부도야. 두바이에 물린 돈만 2조8천억인데 어떻게 버텨?”
“순양이 아니고 왜 대현이죠?”
“냉정한 기업 평가지. 순양건설이 대현과 나란히 서는 건 아직이야.”
“그럼 둘 다 인수하면 어떻습니까? 초대형 건설사가 탄생하는 건데 경영이 버겁다면 안 되겠지만요.”
이학재 회장은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 내 말처럼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에 돈을 잔뜩 들고 있으니 부도 날 회사를 인수하는 건 식은 죽 먹기 아닌가?
“자신만만한 걸 보니 미국에서 돈 많이 벌었나 보네?”
“좀 벌었습니다. 두 건설사 인수할 정도는 충분해요.”
이학재 회장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검토 시작할게. 두 회사 인수해서 겹치는 부분은 팔아치우던지, 정리하면 괜찮을 게야.”
“그런데 HW 건설이 이 모든 걸 감당하겠습니까? 인력이나 장비가 턱없이 부족하지 않아요?”
“돈만 준다면 우리 밑에서 일할 회사 수두룩하다. 지금 건설경기로 보면 우리가 가뭄의 단비라고.”
“날씨를 돈으로 조절할 수 있다면 단비 정도가 아니라 소낙비라도 가능합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고 두 회사의 인수 뒤를 논의했다.
그리고 망하기 일보 직전인 미국의 거대 기업 두 곳은 뉴욕 미라클의 CEO 레이첼 아리에프에게 간절히 애원했다.
* * *
“이제 그만 인정하시죠. 담보부채권은 가치가 없습니다. 부도율이 15% 넘으면 끝장이라는 게 이 바닥 통설 아닙니까? 지금 60%를 넘었고 끝도 없이 추락 중입니다.”
“부정하는 게 아닙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부탁입니다.”
“마지막 남은 자산 다 처분하고 엄청난 퇴직금 챙길 시간을 달라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아닙니까?”
메릴린치와 AIG 보험의 대리인인 두 변호사는 레이첼의 따끔한 일침에 주춤했고, 함께 온 두 회사의 모기지 채권 수석 회계사는 먼 산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내가 눈뜬장님으로 보여요? 메릴린치의 부실은 500억 달러가 넘는다는 걸 알아요. 우리 미라클의 스왑 체결은 23억 달러죠. 500억 달러를 감당하지 못할 게 뻔한데 침몰하는 광경을 구경만 할 만큼 내가 멍청해 보입니까?”
“레이첼. 솔직히 말씀드리죠, 우리 메릴린치는 지금 뱅크오브아메리카와 협상 중입니다. 틀림없이 그쪽에서 인수할 겁니다. 실질 손실이 클수록 협상이 불리해요. 미라클의 23억 달러는 우리가 아니라 뱅크오브아메리카가 지불합니다.”
메릴린치의 변호사가 황급히 말하자 레이첼은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 참, 뱅크오브아메리카에서 받을 돈도 19억 달러가 넘는데 서둘러야겠네. 500억 부실인 메릴린치를 인수하기 전에. 꼭!”
레이첼의 눈꼬리가 올라가자 사내들은 다시 한숨을 쉬기 시작했다.
“내가 웬만하면 여러분의 사정을 감안해서 스왑 청구를 뒤로 미루려 했어요. 가능하면 충격파가 덜하기를 바라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요. 월가의 몰락은 미라클에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건 사실이니까.”
다소 희망적인 그녀의 말에 사내들의 눈빛에는 한 줄기 기대가 서렸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더욱 날카로웠다.
“스탠 오닐 회장, 어제 정식 퇴임했죠?”
“네. 이제 임시 이사회 운영체제입니다.”
메릴린치의 대리인이 대답했다.
“퇴직금은 얼마나 받았죠?”
“네?”
“500억 달러의 부실이라면 퇴직이 아니라 해임했어야 정상이죠!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명예로운 퇴직이니 퇴직금도 받았을 것 아니에요!”
대리인은 다시 꿀 먹은 벙어리로 변했다.
“무려 1억6천만 달러를 퇴직금으로 챙겼죠? 500억 달러의 부실을 책임지고 재직 시절 받았던 연봉 4천5백만 달러를 전부 토해내도 용서가 될까 말까 한데 3년 치가 넘는 연봉을 별도로 챙겨요? 당신네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이런 비도덕적인 일을 자행하면서 내게 유예를 부탁하다니! 부끄럽지도 않아요?”
무려 500억 원의 연봉을 받던 CEO가 50조 원에 달하는 부실을 만들었지만, 나 몰라라 하며 2천억 원에 육박하는 퇴직금을 챙겼다.
“몇백의 가정이 집을 날리고, 직장을 잃고, 퇴직연금마저 사라져 버린 대가가 바로 퇴직금 1억6천만 달러라는 건 아세요?”
그녀의 분노가 AIG로 향했다.
“당신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AIG는 2천억 달러에 육박하는 부실을 안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셉 카사노 사장은 해고는커녕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 컨설턴트라는 해괴망측한 자리를 차지했죠?”
“그. 그건…. 조셉 칸사노 회장이 이 사태를 책임지고 사임했고 마지막까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모습이다? 그런 사람이 바하마 별장으로 전용기기를 타고 떠나요? 매달 백만 달러 이상의 컨설턴트 비용을 받아가며?”
AIG의 부실은 너무 거대해서 인수할 만한 기업이 없었다.
신용부도스왑은 일종의 보험이고 AIG는 세계 최대 보험사답게 엄청난 스왑 계약을 체결했다.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가 주는 위험을 AIG만큼 크게 받은 곳도 없다.
하지만 Too Big To Fail, 대마불사의 법칙이 어김없이 작동할 것이다. 1천8백억 달러의 부실이 터지면 그 영향은 돌이킬 수 없다. 결국, 긴급 구제금융을 투입하여 AIG를 되살리는 것이 부시 행정부의 마지막 일이 될 것이다.
“더 말하기에는 내 입이 더러워지는 것 같아 여기까지만 하겠어요. 모두 돌아가세요. 그리고 절대 잊으면 안 됩니다. 내일 오전 업무 시작과 동시에 우리 돈이 계좌에 들어오지 않으면 곧바로 소송을 진행할 겁니다.”
소송이라는 단어에 사내들은 식은땀을 흘렸다.
소송에 걸린 회사를 인수할 만큼 뱅크오브아메리카는 멍청하지 않다. 그리고 AIG도 마찬가지다. 소송 중이라면 정부가 긴급 구제금융을 수혈하려 해도 의회가 막아버릴 게 뻔하다.
두 회사는 황급히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빨리 돈을 마련해서 저 지독한 레이첼의 다음 행동을 막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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