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291
이학재 회장은 채권단 모임을 요청했다. 순양과 대현이라는 거대 기업의 눈치를 보던 은행들은 얼씨구나 하며 달려왔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겠다고 나서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모임에서 던진 이학재의 말에 그들은 등골이 서늘해짐을 느꼈다.
“난 그리 너그럽지 못해요. 공짜로 실컷 부려먹은 사람의 사정을 왜 고려해야 합니까?”
가지고 있는 어음을 전부 던진다는 말에 은행장들은 이구동성으로 손을 내저었다.
“이 회장님. 순양건설과 대현건설의 자금 사정은 우리가 잘 압니다. 그거 전부 던지면 못 막아요. 부도가 확실합니다.”
“회장님. 부도나면 채권회수는 불가능합니다. 정상화하는 데 몇 년이 걸릴지도 모르고요.”
“채권회수 방법을 찾자고 모인 건 줄 알았습니다. 두 기업 문 닫게 하려고 모인 건 아니지 않습니까?”
이학재 회장은 화들짝 놀란 은행장들에게 머리를 저었다.
“망할 놈은 망해야죠. 부실 덩어리인 놈들, 덩치 크다고 사정 봐주다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벌써 잊으셨습니까?”
10여 년 전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은행원들이다. 그때부터 철밥통이라고 생각했던 은행도 망하기 시작한 것 아닌가?
“그리고 받을 돈 안 받아도, 아니 못 받아도 됩니다. 대신 두 회사 문 닫고 길거리에 나 앉는 꼴을 보며 실컷 비웃어주렵니다.”
못 받은 돈이 최소 조 단위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걸 내던질 배포가 어디서 나오는지 모두 잘 안다. 든든한 물주가 있으니 저런 배짱을 부릴 수 있다.
하지만 은행은 다르다.
부도나는 순간 채권회수는 물 건너가며, 두 건설사 밑으로 줄줄이 딸린 자회사들의 연쇄부도는 기정사실 아닌가?
은행은 또다시 엄청난 손실을 입고 휘청거릴 테고 이 중에 몇몇은 은행장이라는 명함을 뺏긴다.
가장 무서운 일은 정부가 부실은행 퇴출 및 통폐합 카드를 만지작거리는 거다. 살아남은 은행은 두 배로 덩치가 커진다.
그러나 살아남은 놈만 더 잘 먹고 잘사는 것보다 조금 덜 먹더라도 다 같이 먹고 사는 게 동종업계의 의리 아닌가?
모두 기를 쓰고 이학재 회장의 기분을 풀어주며 그를 만류했지만, 이 회장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뜻을 같이하는 사람까지 불렀다.
또 한 명의 인물이 등장했을 때, 아무도 이들을 막을 수 없다는 걸 은행장들은 알아버렸다.
* * *
“여러분들은 이 친구에게 꽤 많은 채무가 있으실 겁니다.”
이학재 회장은 이런 말로 날 은행장들에게 소개했다.
“채무라니요? 그게 무슨…?”
은행장 한 명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인 양 발끈했으나, 틀린 말은 아니다.
“제 돈, 은행에 빌려준 거 맞지 않나요? 돈을 빌려줬으니 은행에서 꼬박꼬박 이자 준 거 아닐까요? 빌려준 게 아니면 투자라는 뜻인데, 투자자에게 이자 주는 경우도 있습니까?”
예금주는 모두 빚쟁이고 통장은 차용증이다. 돈을 은행에 맡긴다, 혹은 예금한다는 그럴듯한 말로 슬쩍 바꿔 놨지만, 빌렸다는 말이 정확하다.
그래서 갖가지 금융 상품을 만들어 빚쟁이들인 예금주를 유혹한다.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다는 달콤한 말로 꼬드겨야 빌린 돈을 안 갚아도 되기 때문이다.
난 금융 상품에 투자한 것이 아니라 단순한 예금주이기 때문에 빚쟁이가 맞다.
“제가 은행에 큰돈을 빌려줬습니다. 그런데 그 돈으로 부도날 게 뻔한 회사를 살리겠다면 어쩔 수 없죠.”
은행장들은 내 뒷말을 예상했는지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순양금융그룹이 빌려준 돈, 제 개인이 빌려준 돈, 전액 돌려받고 싶습니다. 내일 아침 영업 시작하면 인출하겠습니다.”
은행장들은 어음을 던지겠다는 이학재 회장과 예금을 전액 찾아버리겠다는 내 말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린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걸 눈치챘고, 진짜 원하는 목적이 뭔지 정확히 알아야 했다. 우리 두 사람이 막무가내 고집부릴 만큼 멍청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한동안 침묵하던 그들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이 회장님 그리고 진 실장님. 혹시 우리가 제대로 된 토픽을 놓치고 있는 겁니까?”
“이 회의는 순양과 대현의 부도 대책이 아니라 인수 방법을 논의하기 위한 것인지요?”
우린 저절로 드러나는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HW 그룹은 무려 십조 원에 육박하는 돈을 때려 박았습니다. 전 여러분의 은행에 수조 원대의 돈을 빌려드렸고요. 이걸 시간으로 환산하면 초당 수백억은 될 겁니다. 이제야 황금 같은 시간을 헛소리나 하며 때우지 않겠군요.”
“그러니까 두 건설사를 가지기 위해서 그 많은 돈을 쓰신 겁니까?”
“그건 투자라고 해 주십시오. 본전은 물론이고 두둑한 수익까지 챙길 생각이니까 모두들 놀라지 않으셔도 됩니다.”
은행장들이 뿜는 긴 한숨은 그들의 안도감이다.
부실 채권 때문에 구조조정 당하는 일은 없어졌고, 은행장이라는 보직에서 멀어질 일도 없어졌다. 단, 이 인수 건이 잘 마무리된다면 말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인수 절차에 들어가기 전에 여러분들은 얼마를 안고 가실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슨 말씀이신지…?”
다 알아들었으면서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영감들, 손해는 절대 안 보려는 은행원답다.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부도난 회사 되살릴 때 은행도 거들어야죠. 두 건설사의 채권감면, 어느 선까지 하시겠습니까?”
노골적인 물음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누가 봐도 적당하다고 할 만한 금액. 그 정도는 은행도 지고 가셔야죠. 단 한 푼의 채권감면도 못 하겠다, 이런 생각이신 분은 이 자리를 뜨셔도 됩니다. 튼튼한 은행이라는 뜻이니까 제 돈을 다 빼도 괜찮으시겠죠?”
또다시 이어지는 침묵.
“아, 혹시라도 말입니다. 정부가 나서서 구제금융이라도 던져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접으세요. 청와대가 두 건설사의 전화는 일절 받지 않습니다. 여의도 국회의원 보좌관들조차 피하는 전화니까요.”
단 한 명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그들을 향해 이학재 회장이 입을 열었다.
“최대 채권자인 제가 키를 잡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제 손끝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열심히 노 젓기만 하세요. 이의 없으시겠죠?”
* * *
대현자동차 그룹의 주태식 회장은 조간신문을 보며 끙 하는 앓는 소리를 냈다.
언론은 연일 두바이 사태를 다루며 폭락하는 주가를 앞세워 순양과 대현의 위기를 증폭했다.
대현그룹과 순양그룹의 힘으로 언론 기사를 못 막았다는 건 되돌릴 수 없는 지경이라는 뜻이다.
주태식 회장이 신문을 내려놓자 머리를 푹 숙인 채 소파에 앉아 있는 동생이 보였다.
“두바이가 전부야?”
“응?”
“이거만 막으면 다 해결되는 거냐고?!”
건설 부문을 물려받은 고 주영일 회장의 삼남 주민식은 대답을 못 했다. 지방에 벌여놓은 아파트 공사, 재건축 쇼핑몰 등 전부 빚으로 진행 중이다.
쉬쉬하지만 누구나 아는 비밀도 있다. 분양대금으로 돌려막기 할 정도로 여기저기 구멍이 숭숭 뚫렸다.
“정부가 외면한다는 거 금융권에서 다 알아. 이거 네가 막아야 해.”
“큰형님. HW에서 어음 돌리면 부도 못 피합니다. 그룹 차원에서 해결하는 방법 밖에….”
주민식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지만 돌아오는 건 큰형님의 냉담한 반응뿐이었다.
“그룹 차원? 대현 건설그룹이라고 떠들고 다닌 건 너 아냐? 난 자동차그룹이라면서? 우린 한 가족이 아니다. 그룹 차원이라면 건설그룹에서 해결하면 되겠네.”
“형님.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아닌 거 안다. 하지만 우리가 동네 슈퍼 주인이냐? 딸린 식구만 수만 명이다. 너 구하자고 우리까지 굶어 죽을 수는 없다. 우린 순양과 달라. 계열사 분할까지 끝냈어. 네가 망한다고 해서 대현자동차그룹이 피해 볼 일은 없을 거다.”
“형님! 건설은 대현의 모태 아닙니까? 이걸 죽이는 건 돌아가신 아버지….”
“지랄한다. 네가 언제부터 아버지 명예를 생각했어? 이 자식이 어디서 함부로 아버지를 끌어들여! 나가, 이 새끼야!”
주태식 회장은 동생을 쫓아내고 한참을 씩씩거렸다.
대현 건설의 위기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다. 저런 멍청한 놈에게 그룹의 모태였던 건설을 물려준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분노였다.
흥분한 마음을 좀 가라앉혔을 때 비서가 조용히 문을 두드렸다.
“회장님. 이학재 회장 약속 시각입니다. 출발하시겠습니까?”
“가자. 기다리시게 하면 안 될 양반이다.”
* * *
“아이고 형님. 이게 얼마 만입니까?”
이학재 회장은 환히 웃으며 주태식 회장의 손을 덥석 잡았다.
“이 회장. 엄청난 돈을 물린 사람치고는 신수가 훤하네. 아직 쟁여놓은 돈이 많나 봐. 허허.”
“그런 말씀 마십시오. 죽겠습니다. 돌려받지도 못할 어음만 잔뜩 쥐고 골머리 썩히는 중입니다.”
굳게 악수를 나눈 두 사람은 서로를 향해 환히 웃었다.
잠깐 동안 서로의 안부와 신변에 대한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고 오늘의 비밀 회동의 목적을 꺼냈다.
“이 회장. 이 사태만 해결하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가는 건 확실한가?”
“물론입니다. 이미 미국 정부가 천문학적인 돈을 퍼부었어요. 두바이에 물린 돈은 넉넉잡고 2년이면 회수 가능합니다.”
“HW 건설은 두바이에 눌러앉았더구먼.”
“네. 회생을 믿지 않는다면 저도 철수했을 겁니다.”
“두바이가 살아나면 HW 형편은 확 피겠구먼. 의리 지킨 기업을 나 몰라라 하지는 않을 테니까 말일세.”
“그놈들도 장사치입니다. 돈 안 되면 의리고 뭐고 없죠. 하하.”
찻잔을 든 주태식 회장은 부러운 눈길로 이학재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든든한 돈줄이 대주주인 그룹을 맡아 장기적인 안목으로 회사를 이끈다. 자신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눈앞에 닥친 자식 놈들의 승계 작업 때문에 여유가 없다.
이학재 같은 전문경영인이 대현을 위해 일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잠깐 생각했다.
“아무튼, 형님. 건설을 살릴 생각은 없으신 거 맞습니까?”
“그렇다네. 그거 살리자고 천문학적인 돈을 때려 박는 멍청한 짓은 못해. 알다시피 자동차그룹도 대현 산업이라는 건설사를 쥐고 있어. 그 돈으로 내 회사 살찌우는 게 더 낫지.”
“그럼 제 제안을 받아들이는 걸로 알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서 이 회장과 웃으며 이야기하는 거 아닌가?”
이제 이학재 회장이 주태식 회장의 요구를 들어야 할 차례다.
“그럼 원하시는 회사 말씀하십시오.”
주태식 회장은 주머니에서 곱게 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이게 우리 애들이 꼭 챙기라고 신신당부한 거야. 한번 보시게.”
그가 내민 종이를 펴니 회사 이름 몇 개와 그 회사의 가치를 평가한 숫자가 적혀있었다.
대현 토건, 대현 시멘트, 대현 개발 등 전부 삼남인 주민식의 계열사 명단이다.
“너무하십니다. 건설만 가져가라는 말씀이십니까?”
“오해는 마시게. 우리 대현 산업에 꼭 필요한 회사만 적은 거야. 돈 되는 회사만 뽑은 건 아니라고. 그리고 대현건설의 알짜배기 자회사는 고스란히 넘겨 줌세.”
“대현건설의 자회사는 당연히 넘겨받아야죠. 돈은 우리가 다 썼고 청와대도 우리가 막았습니다. 은행도 우리 손에 있는데 이건 너무 야박한 거 아닙니까?”
“이 사람아, 이 회장. 우리 부친께서 일군 거야. 내가 이 악물고 나서면 대현건설까지 지켜낼 수 있다고. 그거 양보하는 건데 야박하다니? 도대체 얼마나 가져가야 성에 차겠는가? 설마 절반은 챙겨야 만족하시는가?”
“형님. 이럴 때는 눈 딱 감고 반으로 가르는 게 정석입니다. 코흘리개 어린애들도 아는 규칙 아닙니까?”
이 회장은 절반이나 가져올 생각은 없었다. 욕심 많은 주 씨 일가를 상대할 때는 훅 지른 다음 조금 양보하는 방법이 언제나 통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두어 개만 더 얻어내면 만족할만한 협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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