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301
서초동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도착하자 차에서 내렸다.
“혹시 모르니 시동 끄지 말고 대기해요. 여차하면 총알처럼 도망쳐야 할지도 모르니까.”
무슨 뜻인지 몰라 눈만 깜빡거리는 수행원들을 남겨 두고 법원 계단을 뛰어올랐다.
서너 번 왔던 곳이지만 여전히 어색하다. 스쳐 가는 사람들이 날 힐끔거리는 것도 편하지 않았지만, 오늘은 신경 쓸 여유도 없었다.
7층 판사실 중의 하나를 찾아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 오셨어요? 오랜만이네요.”
나를 보자마자 벌떡 일어난 사내는 환하게 웃으며 반겼다.
“계장님, 서 판사 계십니까?”
“이런, 약속 안 하셨어요? 지금 재판 중이신데….”
“어디죠?”
“425호입니다.”
“단독이군요.”
“네. 가만있자…. 곧 끝날 것 같긴 한데….”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425호 법정의 문을 조용히 열고 들어가자 판사석의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싱긋 한 번 웃어주고 방청석의 뒷자리에 앉았다. 재판을 지켜볼 여유가 없었다. 손을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몇 번 하자 그녀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때만큼 그녀가 판사인 게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지금의 425호 법정에서는 그녀가 회장이며 총수다. 가장 강력한 힘이 있다.
몇 분 후 그녀는 시계를 슬쩍 보더니 말했다.
“한 시간 동안 휴정하겠습니다. 증언은 오후에 이어서 하도록 하겠습니다.”
어리둥절한 검사와 변호사를 못 본 척하며 그녀는 재빨리 일어섰고 나도 방청석을 나왔다.
“뭐야? 연락도 없이 갑자기?”
복도에서 만난 그녀는 조금 짜증 섞인 목소리였다. 배가 고프거나, 재판이 답답하게 진행된다는 뜻이다. 아니면 내가 짜증나거나.
“점심 먹었어?”
“아니.”
“밥 먹자. 맛있는 거 사 줄게.”
“못 들었어? 한 시간이 전부야. 대충 먹어.”
“대충 뭐 먹어?”
“몰라서 물어? 요 앞에 곰탕집 가는 거지.”
뭐라 말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는 법복을 벗어 팔에 걸치고는 휘적휘적 앞장서서 걸었다.
젠장, 그냥 가버릴까?
내가 어떤 마음으로, 왜 갑자기 달려왔는지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나?
하긴, 내가 입버릇처럼 말한 게 있으니 어쩔 수 없다.
“말을 해.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알아? 마음은 벙어리라고.”
그녀가 섭섭한 표정을 지을 때마다 내가 했던 말이다.
식당에 들어서자 식사 중이던 사람들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했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그러려니 하며 곰탕 두 그릇을 시켰다.
“너 오늘 무슨 일 있었어? 표정이 영….”
“내 표정이 어때서?”
그녀가 뭐라 말하려 할 때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곰탕이 나왔다.
깍두기와 김치를 잘라 접시에 놓자 그녀는 밥 한 공기를 말기 시작했다.
밥때가 한참 지나서인지 그녀는 숟가락을 바삐 움직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천천히 말했다.
“결혼하자.”
“큭, 푸―!”
입안의 밥을 고스란히 뱉어낸 그녀에게 얼른 냅킨을 뽑아 건넸다.
서민영은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입가를 몇 번 훔치고는 다시 숟가락을 들어 곰탕만 괜히 휘저었다.
“싫어? 왜 대답이 없어?”
“기다려봐. 지금 찾고 있잖아.”
“뭘 찾아?”
“반지. 이 곰탕 안에 반지 없으면 넌 죽을 줄 알아.”
아차차. 큰일 났다.
그제야 그녀가 머리를 들어 나를 빤히 노려보기 시작했다.
“서로 죽이네, 살리네 싸우며 이혼 법정에 들어서는 막장 부부 중에 곰탕집에서, 반지도 없이 청혼 받은 사람이 몇이나 될 것 같아?”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단 한 명도 없어. 그 사람들도 처음은 샤방한 꽃길에서 출발했다고. 지금 이 상황이 말이 돼?”
앞으로 평생 울궈먹을 빌미를 줄 수는 없다. 무사히 넘겨야 한다.
“방금 내게 엄청나게 비싼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밀며 유혹하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거 내던지고 왔어. 하지만 후회 안 한다.”
그녀의 눈빛이 흔들렸다.
“얼마짜린데 그래?”
“천억.”
그녀의 눈빛에 일렁이던 불꽃이 사그라들었다.
“대충 둘러대느라 구라치면 법정 구속한다.”
“증인 있다. 내 말이 진실이라고 증언할 사람이 있다고.”
“누군데?”
“김윤석 대리.”
“그 사람은 네 수족이잖아. 증인의 신빙성이 떨어져.”
“증거도 있는데 그건 차명 계좌 비자금이라 제출 못 해. 어쩌지?”
“이 식당 손님들 전부 판검사야. 입 닫아.”
목소리를 확 낮춘 그녀는 내가 처음 보는 표정으로 변했다.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이다.
“네게 결혼은 뭐지? 꼭 거쳐야 할 과정이야? 여러 가지 업무 중의 하나? 아니면…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것과 같아?”
이건 전략을 잘 짜서 대답 잘해야 한다. 솔직한 내 생각도 좋은 대답일 수 있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하다.
진솔한 대답이 아니라는 걸 그녀가 알아도 상관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바로 로맨틱이다.
“민영아.”
“말해.”
“연애는 3인칭의 여자를 2인칭의 그녀로 만드는 과정이고, 결혼은 당신에게 2인칭인 내가 ‘당신만의 2인칭’으로 존재하겠다는 약속이야. 이게 내가 생각하는 결혼이다.”
그녀의 얼굴에 번지는 환희를 발견했다.
이 정도면 상한가 친 대답이다.
서민영이 벌떡 일어났다.
“나가자.”
“어딜?”
“지금부터 한 마디라도 토 달면 청혼은 거절이야.”
난 손을 들어 입술에 지퍼를 채웠다.
식당 밖으로 나온 그녀는 택시를 불러 세웠다.
“기사님, 서초구청요.”
구청? 설마?
그녀의 팔을 툭 치고 눈을 깜빡거리자 입 여는 걸 허락받았다.
“말해.”
“이렇게 해치워도 돼?”
“네가 늘 말했지? 눈앞에 어른거리는 걸 보고 망설이면 다 놓친다고. 빠른 판단. 과감한 결단, 신속한 행동. 이 세 가지는 한 덩어리라고 하지 않았어?”
그녀는 살포시 미소 지으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구청에 도착할 때까지 난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구청에서 혼인신고서를 작성했다.
빈칸을 빼곡히 채웠지만 채우기 어려운 것도 있었다.
“증인 인적 사항을 적어야 하는데?”
서민영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고 난 스마트폰을 꺼냈다. 문자를 보내자마자 답신이 날아왔다.
“이거 적어.”
“누군데?”
“법원에서 날 기다리는 수행원들이야.”
“굿.”
재빨리 빈칸을 채우고 서류를 접수하자 나를 알아본 구청 직원이 입을 떡 벌렸다.
“더 필요한 거 있어요?”
서민영이 날카로운 눈빛을 보내며 말하자 구청 직원이 더듬거렸다.
“아, 아니에요. 접수됐고요. 처리하는 데 3일 정도 걸려요.”
“네. 수고하세요. 절대 빠트리시면 안 돼요.”
그녀는 신신당부를 잊지 않았고, 우린 다시 법원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덜렁대는 서민영으로 변했다.
시간을 확인하더니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어머, 큰일 났네. 재판에 늦었어. 나 먼저 간다.”
“야! 방금 결혼했는데 일하러 간다고?”
그녀의 눈꼬리가 확 올라갔다.
“결혼? 우리가 언제 결혼했어? 혼인신고만 했지. 순서만 바뀌었을 뿐이라고! 얼렁뚱땅 넘어가면 죽는다.”
불끈 쥔 주먹을 한 번 보이더니 법원으로 달려갔다.
난 그녀의 등을 향해 외쳤다.
“오늘은 빨리 일 끝내고 집으로 와! 알았지?”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을 들어 휙 흔드는 게 전부였다.
저런 여인과 방금 결혼한 것이다.
늘 곁에 있었고, 가족을 제외하고 단 한 번도 뭔가를 요구한 적이 없는 유일한 타인이다.
결혼했음에도 변한 게 없다고 느껴질 만큼 자연스럽다.
절로 미소가 나왔다.
대기하던 승용차에 타자 두 명의 수행원이 룸미러를 통해 무슨 일인지 호기심이 잔뜩 드러난 눈빛을 보낸다.
결국, 참지 못한 그들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실장님. 우리 신상명세는 왜…?”
“아, 증인 필요해서요. 심각한 일 아니니까 괜찮아요.”
“증인요?”
그들의 눈동자가 확 커졌다.
“네. 혼인신고 하는 데 증인 두 명이 필요하더라고요.”
“호, 혼인신고…!”
“그렇게 됐어요. 방금 결혼한 셈이군요. 하하.”
두 사람은 아무 말 못 할 정도로 놀란 것 같았다.
출발할 생각도 않은 채 서로 바라보며 눈만 깜빡거렸다.
“자자, 그만하고 출발합시다.”
“아, 네.”
운전대를 잡고 있던 수행원은 대답은 했지만, 차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운전석의 그가 더는 참지 못하고 몸을 돌리며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아니, 실장님. 실장님이 뭐가 아쉬워서 그런 걸 해요?”
이 친구는 유부남이다. 그의 눈에는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가만있자, 처리하는 데 사흘 걸린다고 했던가?
* * *
재판을 끝낸 서민영이 재판정을 나오자 기다리던 변호사가 앞을 막았다.
“서 판,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 선배님.”
“멍하니 앉아서 딴생각했지? 우리 말은 하나도 안 듣는 것처럼 보이던데?”
“다 들었어요. 서류 검토도 완벽했고요. 설마 날 못 믿는 거예요?”
아무리 친한 선후배 사이라도 판사와 변호사다. 판사가 빈정 상하는 순간 재판은 묘하게도 불리하게 돌아간다.
“아이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우리 서 판사님 재판이야 공정하기 이를 데 없다는 평판이 자자한데. 변호사 나부랭이가 괜한 오버질을 했습니다. 흐흐.”
변호사가 너스레를 떨자 서민영은 생끗 웃었다.
“사실 딴생각했어요. 선배님이 이해하세요. 혼인신고 처리가 잘못되면 어떡하나 계속 찝찝해서요.”
“혼인신고? 판사가 왜 그런 걸 신경 써?”
“제 혼인신고니까 신경 쓰죠. 구청장에게 슬쩍 전화할까? 하루 만에 되려나?”
아직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하는 변호사 선배는 이미 서민영 눈앞에 없는 사람이다. 멍하니 서 있는 변호사를 뒤로하고 부장 판사실로 걸어갔다.
“부장님.”
“아, 서 판.”
뼛속까지 성골인 서민영 같은 평판사는 부담이다.
그녀의 집안사람들만 모여도 법원 하나쯤은 구성하고도 남는다. 개중에는 자신의 인사권을 쥔 사람도 있다.
서민영 판사가 완전히 굳은 얼굴로 나타나자 부장 판사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가 맡은 재판 중 외부의 압력이나, 힘 있는 피고인이 있는지 재빨리 되새겼지만 그런 일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래, 무슨 일이야?”
“부장님. 혹시 제가 구청장에게 전화해서 민원서류 하나 빨리 처리해달라고 부탁하면 이것도 공직자 윤리에 어긋나는 행동이겠죠?”
“민원? 어떤 민원?”
“혼인신고요.”
“혼인? 에이, 그 정도야 뭐…. 청탁이라고 보기에는 무리 아닐까? 빨리 법적 인정을 받고 싶은 부부의 애틋한 마음? 그 정도니까. 위법도 아니고, 뇌물 주고 빨리해달라는 것도 아닌데.”
부장 판사는 별것 아닌 내용이라 한시름 놨지만, 이런 것까지 확인하는 저 고지식함이 더욱 부담스럽긴 했다.
“누군데? 친구야? 아니면 동기?”
“아뇨. 제가 당사자라 더 꺼려지긴 해요.”
부장 판사는 손에 든 안경을 툭 떨어트렸다.
“서, 서 판…. 뭐라고? 혼인? 언제 결혼한 거야? 아니, 갑자기 이게 무슨…?”
“아, 그렇게 됐어요. 오늘 갑자기 해치운 거라서요.”
“지, 지금 비밀 결혼했다는 말이야?”
“아뇨. 혼인신고부터 먼저 한 거예요. 당연히 결혼 휴가는 챙겨 먹을 거구요.”
서민영은 아직 얼떨떨한 부장 판사에게 머리를 꾸벅 숙였다.
“아무래도 전화 한 통 정도는 해야겠어요. 계속 신경 쓰여서 일이 손에 안 잡혀요.”
그녀가 나가자 한동안 멍하니 있던 부장 판사는 이럴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재빨리 수화기를 들었다.
“고등법원장님 연결해, 빨리…! 야! 어디긴 어디야? 서울고등법원이지!”
부장 판사는 자신이 가장 먼저 신부의 친인척 중 현직에서 가장 높은 분께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