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305
“말을 빙빙 돌리긴 했지만, 그놈이 돈 많은 건 확실합니다. 마라클의 자산 전부가 그놈 게 아닐 수는 있겠죠. 하지만 수조 원… 아니, 어쩌면 수십조 원을 동원할 힘이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그놈 입으로 그렇게 말했어?”
진영기 부회장은 아들의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뇨. 직접 말했다면 허풍으로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태도가 그랬어요.”
“태도?”
“네.”
진영준은 몇 시간 전에 있었던 일을 전부 다 말할 수는 없었다.
그놈이 노려보며 천천히 뱉어내던 말, 입가의 미소, 힘이 잔뜩 들어간 눈빛.
섬뜩한 그 모습과 태도 때문에 간이 쫄아버렸다는 것은 더더욱 말하기 어려웠다.
“그렇지. 혀는 거짓말을 해도 몸은 못 해. 그래, 태도가 어땠는데?”
“제 위에서 내려다봤습니다. 이미 전 그놈 안중에도 없더군요.”
“여유라 이거지?”
“그 이상입니다.”
진영기 부회장은 아들이 보고 느낀 것을 정확히 알았다.
주머니가 두둑할 때 뿜어져 나오는 태도, 상대보다 훨씬 강할 때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여유.
평생 이 두 개가 마치 팔다리처럼 몸에 배어 있었다. 한국 최고의 기업, 그 기업의 장남이니 모두 머리를 조아렸고 눈을 똑바로 마주하는 이가 없었다.
다른 재벌 그룹의 2세와 모임을 가졌을 때, 그들이 아무리 잘난 척해도 우습기만 했고 머리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지만 그들을 아래로 보는 눈빛과 태도는 절대 숨기지 못했다. 대현그룹의 주태식마저 한 수 아래로 바라본 건 자연스럽게 그랬을 뿐 자존심 싸움도 아니었다.
이제 반 토막 난 그룹을 손에 쥐고 있으니 확실히 깨달았다.
자신이 바로 그런 놈들과 같은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전경련 모임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그룹 회장들의 눈초리가 괜히 신경 쓰였고, 별것 아닌 말 한마디에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확실히 느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담긴 여유와 입꼬리에 맺힌 승리자의 미소를 말이다.
“아버지. 만약 도준이 그놈이 수십조의 돈으로 우리 전자와 물산을 비롯한 계열사 주식을 깡그리 긁어 가면….”
“쓸데없는 짓이지.”
“네?”
“깡그리 긁어 가는 짓이나, 네가 지금 걱정하는 것이나 다 쓸데없다는 뜻이다.”
진영준 역시 부질없는 걱정이라는 것을 안다. 단지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주식 시장에서 순양전자와 순양물산의 주식을 쓸어 모은 놈이 회사를 차지한다면 우리나라에 재벌이라는 단어는 벌써 사라졌을 게다. 지금 회장입네 하고 거들먹거리는 2세들은 1% 정도의 지분을 가진 주주일 뿐이겠지. 매년 배당금 얼마나 주나 하고 침 흘리는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게야.”
“저도 압니다. 하지만 만약의 경우도 있지 않습니까?”
“그 정도로 허술하지 않다. 전자와 물산을 차지하려면 네 작은아버지처럼 부도가 날 정도로 망해야 해. 채권을 감당하지 못해 우리 스스로 물러나는 일만 아니면 뺏길 리 없다.”
“주식 시장에 나오지는 않지만, 기관이 쥐고 있는 주식도 있잖습니까? 도준이 그놈이 서너 배의 웃돈을 주고 매입한다면….”
“기관 주식은 정권이 결정한다고 보면 돼. 정권이 득 될 것도 없는데 왜 순양의 주인을 바꿔?”
말은 이렇게 했지만, 진영기 부회장도 일말의 불안은 남아 있었다.
이 불안을 없애는 길은 하나다. 무리를 해서라도 지분 구조를 아들에게 유리하도록 승계하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여기저기서 불만을 터트릴 것이고 반대를 외칠 것이다. 당장 핏줄부터 눈에 불을 켜고 덤벼들지 모르는 일이다.
* * *
“형님. 저 도준입니다.”
― 어? 아…. 도준아. 어쩐 일이야?
“신혼여행도 잘 다녀왔고 새살림도 시작했는데 형님께 인사도 드리지 못한 것이 영 마음에 걸려서 전화했어.”
― 뭘 그런 거 가지고….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결혼식에도 못 갔으니까.
순양물산 호주 법인에서 순양전자의 1호 스마트폰을 알리느라 뛰어다니는 진경준.
열심히 일하는지, 자리만 지키는지 모르겠지만, 유학을 끝내고 해외 법인만 열심히 뺑뺑이 돌고 있다.
“기념사진 한 장 찍으려고 그 먼 곳에서 어떻게 와요? 마음 쓰지 마.”
지금쯤 내가 왜 전화했는지 궁금해서 미칠 것이다.
안부 전화 꼬박꼬박 할 만큼 살가운 사이도 아니고, 오히려 경영권 때문에 자기 아버지 진영기 부회장과 날을 세우는 관계라는 걸 모를 리 없으니까 말이다.
― 그래, 신혼 재미는 어때?
“연애를 너무 오래 해서 그냥저냥 해. 여자 친구가 집에 늘 있는 것 같은 느낌? 하하.”
진경준은 내 웃음을 함께하지 않았다. 긴 통화가 오히려 불편할 것이다.
― 그렇구나. 아무튼 전화 고맙고, 또 통화하자. 내가 일이 좀 바빠서 말이야.
“응. 바쁜 사람 붙잡고 너무 오래 통화했지? 곧 들어올 거지? 그때 내가 술 한잔 살게. 또 봐.”
― 곧? 당분간 한국에 들어갈 일 없는데?
걸렸다, 요놈.
“그래? 큰아버지께서 그룹 승계 절차 다시 시작한다는 소문이 파다하던데, 잘못 알았나?”
진경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뒤에 수화기를 통해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너 지금 이간질하는 거냐? 아니면 분탕질이야?
“사실을 전해주는 거니까…. 이간질은 아니고 분탕 정도로 해두자.”
― 너 이 자식…!
“난 사실을 전해주는 것뿐이야. 그게 이간질이 될지, 분탕질이 될지는 모르는 일이고…. 그것보다 더 나쁜 건 차남인 경준 형이 십 원 한 장 상속받지 못하는 것 아니겠어? 그룹에 영향력 하나 없는 핏줄로 해외 법인만 뺑뺑이 도는 게 적성에 맞으면 이 전화 끊든지.”
하나, 둘, 셋, 넷, 다섯….
마음속으로 카운팅을 했지만, 전화는 끊어지지 않았다.
― 사실이냐?
“물론.”
― 네가 또 미친 짓으로 막을 거잖아?
“아이고, 이젠 못 해. 지난번에 승계 작업 막느라 날린 돈이 6천억이야. 참, 형은 내게 그거 막아줘서 고맙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냐? 섭섭한데?”
― 미친 새끼!
수화기를 쾅 하고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진영기 부회장의 둘째 아들. 진영준와 다섯 살 차이가 나고 둘 사이에 딸이 하나 끼어 있다.
이 집안은 딸까지 신경 쓸 만큼 현대적이지는 않다.
사실 과거를 돌이켜 보면, 진영기 부회장은 차남인 진경준에게도 적지 않을 만큼 계열사를 나눠 주려 했다. 그때는 순양그룹 전체를 다 먹었으니까.
하지만 욕심 많은 진영준이 가만히 있을 리가 있나?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검찰의 압수수색과 잇따른 재판이 있었고 그 틈을 노린 진영준이 동생의 몫까지 꿀꺽해버렸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진경준이 길길이 날뛰던 것이 기억난다.
회장실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다 때려 부쉈던가?
그것만 봐도 진경준 역시 보통 욕심은 넘는다는 걸 알 수 있다.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자신은 빼놓고 상속절차를 시작했다는 걸 알면 가만있을 리 없다. 즉시 날아와서 친형인 진영준이 밥상을 받기 전에 걷어차야 하는데…. 생각대로 잘될지는 두고 볼 일이다.
만약 진경준이 쪽박 깨는 데 힘이 부치면 적극적으로 도와줄 생각이다. 저쪽 집안이 깨지고 쪼개져야 내가 수월하니까 말이다.
* * *
“마지막 우리 대화는 욕으로 끝난 것 같은데…. 그 대화 계속할 거야?”
“웃자고 하는 소리라면 관둬. 재미없으니까.”
며칠 뒤에 진경준으로부터 걸려온 전화는 국제전화가 아니었다.
만나서 술이나 한잔하자고 하니 그는 은밀한 장소를 원했다.
귀국한 사실을 비밀에 부쳐달라는 뜻일 테고, 보는 눈을 피하려면 집이 최고다. 더욱이 신혼집 아닌가? 집들이로 생각했다.
“제수씨는?”
진경준은 집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법조계는 공무원 중에 쓰리디 업종이야. 자정 전에 퇴근한 적이 며칠 안 돼. 덕분에 나는 좀 편하고.”
“집에 오면 쓰러져 잠자기 바쁘니까 바가지 긁을 시간이 없다?”
“그런 셈이지. 참, 형은 좀 어때? 형수님이랑은 잘 지내?”
“얼굴 두어 번 보고 결혼한 것치고는 그럭저럭.”
부부의 불화는 부족한 돈이 첫 번째 이유다.
돈 펑펑 쓰며 생활에 쪼들리지 않으면 그냥저냥 산다. 알콩달콩한 로맨스는 없어도 그 부분을 메워주는 풍요로운 생활이 있기 때문이다.
“조용히 들어온 거 보면 아직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나 보지?”
“그래. 공항에서 바로 이리 왔어. 집에서도, 회사에서도 몰라. 뉴질랜드 출장으로 말해 뒀다.”
“많이 달라졌네?”
“내가?”
“그래. 욱해서 큰아버지께 달려갈 줄 알았는데 나부터 찾은 걸 보니 말이야.”
“정확한 데이터는 좀 알고 싶어서. 외국에서 쭉 지내다 보니 정보가 없어.”
젊었을 때 신인 가수나 배우를 별장으로 불러 놀던 그 철부지가 아니다. 굴뚝 성질 죽일 줄도 알고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는 자존심도 버릴 줄 안다.
“이간질이나 하는 내가 전해주는 정보가 믿을 만하겠어?”
“가려서 들을 거다. 그리고… 미끼 던지는 걸 알면서도 덥석 물어야 할 때도 있어. 미끼인 줄 모르고 무는 것보다는 낫잖아?”
슬쩍 웃는 걸 보니 진태준을 말하는 것이다.
“태준 형 말하는 거야?”
“너 때문에 천억 날렸다던데? 회사 돈 6백억은 네가 메꿔줬지만.”
오늘 알았다. 진태준이 파생상품으로 날린 개인 돈이 얼마인지….
내가 놀라는 표정을 짓자 경준 형은 의외라는 듯 말했다.
“몰랐어? 그놈 돈 날린 거?”
“돈 날린 건 알았지만 4백억이나 날린 줄은 몰랐어. 태준 형도 돈 많네.”
“세금으로 6천억 던진 네가 할 말은 아니지. 자, 이제 전화 통화로 이야기하던 거 마저 하자. 내가 아버지께 말하면 얻을 수 있는 계열사는 뭐 뭐야?”
“순양그룹에 들어오지 못한 자회사. 순양이라는 이름을 못 쓰는 회사.”
“뭐?”
“큰아버지는 할아버지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으실 거야.”
진경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할아버지의 그룹 승계 방식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하시거든. 지분을 쪼개서 나눠 주니까 HW 그룹, 미라클 같은 외부 자본이 그룹을 야금야금 먹어치운다고 말이야. 만약 할아버지께서 장남인 큰아버지께 전부 물려줬다면 이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실 거야.”
“나도 듣는 귀는 있다. HW 그룹이나 미라클은 네 주머니라고 들었어. 결국 외부는 바로 너. 아냐?”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내 알 바 아니고. 그보다 대단한데? 본사에 형님 사람이 꽤 있나 봐? 이런저런 소문도 다 알려주고?”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내 알 바 아냐. 아무튼 아버지 생각이 그렇다는 건 정확한 거야?”
그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상속 문제를 단 한 번이라도 형에게 말한 적 있어? 큰아버지 나이 일흔이 내일모레야. 백준혁 실장은 차명 주식 정리하느라 명동 뛰어다닌 지 오래됐고.”
진경준은 입을 닫았다.
아버지의 생각이 그렇게 굳어졌다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다.
어린애처럼 아버지 앞에서 떼쓰는 정도가 전부, 쪽팔려서 그 짓을 어떻게 할까?
욕심을 채울 만큼 현실이 따라주지 않으니 답답해서 말이 없는 것이다.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방법 하나 알려줄까? 밥상 엎어버려.”
“뭐?”
“할아버지가 날 처음으로 마음에 들어 한 게 뭔지 알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여전히 찌푸린 얼굴이지만 눈빛에 숨어 있는 호기심이 보였다.
“가질 수 없다면 차라리 부숴버리겠다. 아마 내가 그런 말을 했을 거야.”
“뭐? 언제 이야기야?”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이 말을 들은 할아버지의 만족스러운 미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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