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313
누구와 거래하는 것일까, 그리고 어떤 거래일까가 궁금했지만, 아버지의 이어지는 말 때문에 호기심은 일단 접어야 했다.
“그렇다고 잔잔바리 무시하면 안 돼. 긁어모을 수 있는 건 다 긁어 와야 한다. 큰 줄기, 작은 가지 전부 중요한 거다. 알겠지?”
머리는 끄덕였지만, 아버지가 말한 거래가 뭔지 도무지 짐작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께서 여전히 안심하시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습니다. 말씀하신 큰 거래도 쉬운 일은 아닌가 보죠?”
“그래. 쉽다면 내가 이리 예민하겠냐?”
진경준이 좀 더 캐묻고 싶었을 때 진영기 부회장은 아주 민감한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넌 섭섭하다는 말은 않는구나.”
“네?”
“재단 말이다. 네 몫으로 만든….”
할 말은 아주 많았지만 억누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속 빈 강정 같은 재단을 만들어 자신에게 넘겼지만, 화를 내지 않았다.
많은 것을 물려주겠다는 약속을 아버지가 먼저 어긴다면, 부모와 형제를 배신하고 사촌과 손잡은 것에 대한 면죄부를 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아버지. 지금 중요한 건 제가 아닙니다. 우리 가족이 가진 걸 고스란히 지키는 일이 우선이죠. 제 몫은 천천히 남겨 주셔도 됩니다.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진경준은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빛에 서린 기특함을 읽었다.
달라고 때쓰지 않아도 부모의 지갑을 여는 방법을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그 방법은 바로 부모에게 기대지 않고 내 몫은 내가 챙기는 것이다. 바로 그때 기대하지 않았던 이런 일이 생긴다.
굳게 닫혔던 지갑이 스르르 열리는 것이다.
“그래. 조급해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리거라. 다 생각해 뒀고 준비하고 있다. 이 애비에게 섭섭한 마음은 절대 들지 않을 거야. 허허.”
진경준은 등을 쓰다듬는 아버지의 손길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자신이 가지게 될 것을 생각하며 미안함을 털어버렸다.
***
“진영준이가 마누라는 잘 구한 거 같지?”
“이런 거 필요할 때 써먹으려고 언론사와 사돈 맺은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 기획은 누가 한 걸까요? 편집국장? 아니면 주필?”
“둘 다야. 환상의 콤비지. 나도 회장님 모실 때 그 양반들과 자주 어울렸는데….”
한성일보는 레이첼의 기자회견 요약으로 포문을 열고 사설로 독자들을 저격했다.
외국계 투자사의 국내 기업 인수를 국부 유출이 아니라 수탈로 규정짓고 프레임을 짰다.
미라클은 졸지에 동양척식주식회사로 변했으며 레이첼은 이 회사의 설립자인 이토 히로부미로 표현했다.
여의도의 한국 미라클은 국부 수탈의 앞잡이며 매국노로 변해버렸다.
“그게 바로 모진 세월 속에서도 백 년 가까이 버틴 힘이다. 이제 잘 봐봐. 내일이면 외국 자본이 수탈 자본으로 변해서 매스컴을 시끄럽게 할걸?”
“대통령도 나서서 외국 자본 유치하겠다고 광고하는 세상인데, 자기들 멋대로 잣대를 들이대는군요.”
“한성일보도 며칠 전까지 외국 자본 끌어와야 우리 경제가 산다고 떠들어 댔어. 그런 뻔뻔함이 생존 비결이고 힘이지.”
“그 뻔뻔한 아저씨들에게 인사 한번 해야겠습니다. 회장님께서 자리 한번 만들어주시죠.”
이학재 회장은 실소를 참지 못했다.
“아서라. 이놈들은 안 돼. 사주의 사돈댁 편드는 걸 네가 어떻게 막아? 돈으로 샤워를 시켜줘도 흔들리지 않아.”
돈만으로 모든 게 해결된다면 난 벌써 순양그룹 회장이다.
돈은 욕망의 상징일 뿐 전부가 아니다. 중요한 건 욕망이다.
“그리고 그 두 사람은 네 편으로 돌린다고 해도 크게 바뀌는 건 없을 거다. 한성일보는 글쟁이가 많아. 대신할 놈은 금방 나온다.”
“현재 한성 일보의 대들보가 그 두 사람인 건 확실하죠?”
“그렇긴 해.”
“그럼 해볼 만합니다. 대들보를 뽑아버리면 다음 대들보가 되는 놈들은 한성일보에 뿌리내리지 않을 겁니다. 선례가 있으면 그걸 따라가니까요.”
“그게 뭔 말이냐?”
“똘똘 뭉친 한성일보를 균열만 내면 됩니다. 일 마치면 아시게 될 테니까 자리만 잡아주십시오.”
이학재 회장은 긴 한숨을 쉬며 수화기를 들었다.
두 대들보를 만나기 전 몇 가지 사전 준비를 하느라 바쁘게 뛰어다녔다. 물론 그 시간 동안 한성일보의 맹공은 끊어지지 않았고 다른 언론사도 외국 자본의 침투를 조금 다루기도 했다.
한성일보가 던진 쟁점을 TV토론 프로그램에서 다룰 정도가 되었을 때 그들을 만났다.
“결례를 범하게 됐습니다만, 너그러이 양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두 사람은 이학재 회장 대신 내가 나타나자 놀랐으나, 곧 승리자의 미소를 보이는 여유를 부렸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이렇게 직접 뵈니 항간에 떠도는 소문이 사실인가 봅니다.”
“아, 그 소문요? 제가 미라클의 오너라는 거 말씀이시죠?”
“그렇지 않다면 우리와 겸상할 일이 있겠습니까? 지금 미라클에 맹공을 퍼붓는 곳은 우리뿐이니까요.”
우쭐한 태도.
저들은 내가 자세를 낮추고 타협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소문의 진위야 차차 밝혀질 테고…. 아무튼 한성일보가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힘을 잘 봤습니다. 역시 돈보다 펜 끝이 매섭더군요. HW, 순양금융, 순양중공업 계열이 그동안 갖다 바친 광고비만 해도 순양전자와 맞먹을 텐데 말입니다.”
순간 그들의 얼굴에 불편한 기색이 비쳤지만, 곧바로 웃음을 되찾았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설마 광고 물량으로 우리 입을 막을 생각은 아니시겠죠?”
“지면 광고 중에 한성일보만 한 데도 없지 않습니까? 광고 효과는 충분히 보셨을 텐데요?”
여전히 자신감 있는 태도다.
저들의 말이 틀리지는 않다. 아파트 광고 하나만 해도 한성일보에 때리면 문의 전화가 폭주한다.
이 나라의 돈 많은 부자 대부분은 한성일보 구독자기 때문이다. 구매력이 가장 큰 계층을 확실한 구독자로 쥐고 있는 한성일보의 힘을 광고 물량으로 협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고, 생색 한번 내본 겁니다. 광고와 기사는 별개의 문제죠. 저, 그 정도로 속 좁은 놈 아닙니다. 하하.”
이 정도로 초면 인사를 끝내자 편집국장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HW와 순양금융, 건설의 광고 물량을 마치 손에 쥔 것처럼 말씀하시는 걸 보니… 더는 감추실 생각이 없나 봅니다.”
“형수님이 제게 붙여놓은 기자가 한둘입니까? 제가 만나는 사람만 확인해도 감추기 어렵죠.”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헛기침했다.
“아, 보고받지 못하셨나 보군요. 이거… 제가 괜한 말을….”
“우리가 보고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건 사적인 집안일이니까요.”
“그 사적인 집안싸움에 한성일보라는 각목 하나 들고 우리 형수님 돕겠다고 뛰어든 분들 아니십니까? 국장님 그리고 주필님?”
잘 차려진 한정식 식탁에 냉기가 흘렀다.
“밥 한 끼 먹는 게 이렇게 불편해서야 원….”
한성일보 주필이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수저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온 세상이 칭송하는 젊은이라 기대가 많았는데…. 이거, 실망입니다. 고작 기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빈정거리는 게 전부요? 그 빈정거림 들어주며 밥을 먹을 만큼 속 넓은 사람이 아니니 먼저 일어나겠소.”
편집국장도 주필의 눈치를 보며 엉덩이를 뗐다.
“회사 이야기는 그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 시작하려는데…. 듣고 가시죠.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겁니다.”
그들의 눈을 외면하고 빈 잔에 술을 채웠다. 똑바로 쳐다보면 자존심을 굽히기 힘들다. 눈싸움이야말로 자존심 싸움 아니던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편집국장이 주필에게 눈짓하며 소매를 끌 것이다.
다시 자리한 두 사람은 채운 술잔을 들어 들이켰다.
먼저 입을 열기 껄끄러운 그들 대신 말했다.
“제게 유리한 기사 써달라는 것도 아니고 순양전자 노리는 외국 자본 찬양해달라는 사설을 부탁드리려고 이 자리 만든 거 아닙니다.”
“말 돌리지 말고 본론을 꺼내시죠. 개인적인 이야기가 뭐요?”
편집국장이 톡 쏘며 말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두 분은 이제 펜을 꺾으시면 어떨까요? 그만하면 펜대 잡은 손도, 원고지 노려보는 눈도 피로할 텐데 말입니다.”
“뭐야? 보자 보자 하니까…. 말이면 단 줄 알아?”
이번에는 편집국장이 발끈했지만, 주필은 오히려 차분했다.
“끝까지 들어봅시다.”
심지어 주필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까지 보이는 듯했다.
영감…. 눈치 하나는 빠르다. 저러니 지금까지 살아남은 거겠지만.
“펜대 놓고 원고지 멀리하면 우리는 뭘 해야 할 것 같소? 배운 거라고는 그게 전분데…?”
“학업 끝내고 스펙 탄탄하게 쌓았으면 취직해야죠. 언제까지 공부만 하실 생각입니까?”
편집국장은 혐오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겨우 생각해낸 게 고액 연봉을 미끼로 던지는 임원 자리요? 그런 게 모두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아직 모르니 어린애인 게지.”
국장의 저 표정이 변할 때쯤 말투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방금 공부 마친 사람이 고액 연봉과 임원 자리 바라면 한참 모자란 사람이죠. 전 비정규직 자리를 제안할 생각입니다만.”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내 제안이 평범한 게 아니라는 건 안다. 최대 신문사의 국장과 논설위원이 갈 만한 비정규직 자리는 하나뿐이다.
두 사람은 침을 꿀꺽 삼키고 서로 쳐다보기만 했다. 이젠 이들이 입을 열 때까지 웃으며 기다리면 된다.
먼저 입을 연 이는 편집국장이었다.
“그 비정규직 자리,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 갈 수 있어요. 뭐 대단한 것인 양 착각하는 거 같아 말해주는 거요.”
“언론사 등에 업고 여의도 취직한 분들…. 언론사 시다바리 아닙니까? 회사가 던져주는 각본대로 말하고, 거수기 노릇하고, 시키는 대로 줄 서야 하고…. 그러니 언론인 출신 중에 중진 의원 보기가 하늘에 별 따기죠.”
“좀 더 조사해 보셔야겠소이다. 중진 의원 많아요.”
주필이 잔잔히 웃으며 말했다.
“그 중진 의원들이야 개인기로 성공한 사람들이죠. 국회의원 배지 달기 전부터 스타였잖습니까? 여의도에서 러브콜 잔뜩 받을 만큼…. 두 분이 그 정도 스타였다면 광화문이 아니라 이미 여의도가 직장이었을 겁니다.”
이들은 얼굴이 붉어진 걸 감추기 위해 얼른 술 한 잔을 털어 넣었다.
“회사에서 완전히 독립한 의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며 소신을 지키는 초선 의원. 이 정도는 돼야 언론인 출신답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국회의원 배지를 미끼로 본인에게 유리한 기사를 써달라? 광고로 기사를 사는 대신, 자리로 사겠다는 뜻입니까?”
“제 말, 허투루 들으셨군요. 가사 써달라고 한 적 없습니다. 펜대를 꺾으라고 했죠.”
두 사람은 아직 내 말의 정확한 뜻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미간을 찡그렸다.
“사표 쓰고 여의도 갈 준비나 하시라는 말입니다. 내년 총선 때 금배지 달게 해드리죠. 시시한 비례 대표가 아니라 당당한 지역구 의원으로 입성하게 해드리죠.”
국회의원 공천이라는 것은 오랜 기간 충성을 바쳐야 겨우 얻을 수 있는 대가다. 그마저도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언론사에서 피 터지게 싸워 살아남아야 하고 4년마다 돌아오는 선거 타이밍도 맞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빈자리가 나는 운도 따라줘야 한다. 이런 불확실한 약속이 아니라 일을 그만두는 조건으로 당장 내년에 여의도 입성이라니….
편집국장이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을 때 주필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일 잘하는 세무 공무원을 더 좋은 자리로 승진시켜 제거해버렸던 옛 영국 부르주아 계급의 수법이군요. 역시 영민하십니다그려. 으허허.”
“잘 아시네요. 그 당시 세무 공무원 중에 승진을 거절한 이는 없었습니다. 그들도 영민했던 거죠.”
저 웃음은 제안을 거절할 때 나오는 웃음이 아니다.
영민한 영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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