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326
대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사들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그들의 놀란 표정은 분명 나와 함께 나타난 주병해 때문이다.
주병해는 인자한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저쪽 구석에 앉아 구경만 할 테니까 나 신경 쓰지 마라. 불편하면 말하고. 자리 비켜줘?”
“아, 아닙니다. 고문님.”
전자 사장이 황급히 손을 내젓자 주병해는 웃으며 자리 잡았다.
등기이사들은 서로 눈짓을 교환하며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나 때문은 아닐 테고, 주병해 고문 때문이 분명한데…. 뭘까?
회의실 상석의 빈자리에 앉자 이사회가 시작되었다.
“지금부터 순양물산, 순양전자의 임시 이사회를 개최합니다. 안건은 동사(同社) 총괄 CEO의 선임에 관한 건입니다. 이사들은 의견을 개진해주십시오.”
서로 눈치만 보며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전자와 물산의 사장과 파벌을 이끄는 몇몇 임원들이 먼저 찬성한다는 의견을 내야 하는데 그들도 입을 다물고 있다.
영감들, 튕기기는.
항복 선언 직전의 마지막 침묵이지만 그다지 쓸모없다는 걸 이들도 잘 안다.
난 전자와 물산 사장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빙그레 웃었다.
“두 분, 아직 계산 중입니까? 아니면 한 자락 남은 자존심을 제게 보여주시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두 사람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이를 신호로 삼십여 명의 등기이사들도 재빨리 일어나 손뼉을 쳤다.
“본 안건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천천히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마지막 목표였던 두 회사마저 손에 넣었는데도 이상하리만치 덤덤했다.
허리를 펴자 어느새 내 곁에 다가온 주병해 고문이 등을 두드렸다.
“고생했다.”
그의 짧은 한마디는 마치 할아버지가 내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래, 정말 긴 시간 동안 고생했다.
* * *
주병해 고문은 순양그룹 회장실에 발을 디디는 순간 이미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인생의 가장 화려한 순간이 떠올랐을까? 아니면 할아버지를 기억하는 걸까?
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집무용 의자에 앉았다. 손때 묻은 팔걸이의 가죽이 주는 촉감은 마치 할아버지의 손길 같았다.
“어떠냐? 그 자리에 앉은 감상이?”
“그냥 그렇습니다. 뛸 듯이 기뻐야 정상인데 덤덤하군요.”
“충분히 자격을 갖췄기 때문에 그럴 게다. 과분한 자리였다면 뛸 듯이 기뻐했겠지.”
주병해 고문은 중절모를 고쳐 썼다.
“네가 그 자리에 앉은 것도 봤으니 이제 내려갈란다. 남은 일 다 마무리하고 한번 내려오거라. 우리 형님 산소도 용인으로 이장하고. 이제 나도 늙어서 그런지 묘지기가 버겁구나.”
“오신 김에 좀 쉬시다 가시지요?”
후다닥 일어나 그를 잡았다.
“됐다. 보고 싶은 거 봤으니 더 볼일 없다.”
“작은할아버지. 단지 그것뿐입니까?”
“응? 무슨 말이냐?”
“서울 오신 목적이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서요.”
“고놈 참, 눈치 하나는…. 허허.”
주병해 고문은 지팡이를 들어 밖을 가리켰다.
“이사회 때 혹시 삐딱한 놈 있으면 혼쭐을 내려고 왔어. 그리고 영기가 이사회에 난입하면 내가 그놈 입을 찢어버릴 생각도 했고.”
역시, 할아버지를 대신할 생각이셨다.
“작은할아버지. 절 너무 허술하게 보시는 거 아닙니까?”
“뭐야?”
“제가 사람을 풀어 큰아버지 집 주변을 에워쌌어요. 집 밖으로 못 나오십니다. 그리고 전자 임원들은 이미 제게 무릎 꿇었습니다. 오늘 이사회는 요식행위였어요. 하하.”
깜짝 놀란 작은할아버지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독한 놈. 지 할애비 판박이구먼. 나 간다. 나올 거 없다.”
그는 배웅하려는 나를 밀치고 회장실을 횡하니 나가 버렸다.
혼자 남은 회장실을 천천히 걸으며 할아버지의 손때 묻은 흔적을 하나하나 돌아보는데 인터폰이 울렸다.
一 회장님. 계열사 사장들이 인사드리겠다며 기다립니다. 어떡할까요?
회장님…. 이제 익숙해져야 할 내 호칭이다.
“전자와 물산 사장만 들어오라고 하시고 나머지는 다 돌려보내요. 취임식 끝나고 만나겠습니다.”
인터폰을 끄자 기다렸다는 듯이 두 사장이 들어와 머리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회장님.”
“인사는 나중에 하시고 빨리 처리해야 할 일부터 알려드립니다.”
“아, 네. 회장님.”
두 사람은 긴장한 표정으로 내 앞에 앉았다.
“전자 계열과 물산 계열이 보유한 사적 용도의 국내외 자산 전부를 처분합니다. 집, 별장, 전세기. 자동차, 각종 회원권 포함입니다. 집과 별장 내부의 모든 물품도 마찬가지입니다. 물품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으면 증빙하라고 하세요, 그 전에는 숟가락 하나, 슬리퍼 하나 밖으로 가져가지 못합니다. 기한은 삼 일 드립니다.”
큰아버지 식구 전부를 집에 쫓아내라는 지시를 이렇게 길게 말했다.
두 사람은 이 껄끄러운 지시에 당황했지만, 피할 수 없다는 걸 안다.
“또 대대적인 계열사 감사를 시작할 겁니다. 그러니 임직원들이 동요하지 않도록 잘 다독이시고요.”
이들은 두 번째 지시에 새파랗게 질렸다.
계열사 임원들의 비리를 파헤치겠다는 뜻 아닌가?
“놀라지 마세요. 저, 임원들까지 손댈 정도로 꽉 막힌 놈 아닙니다. 타깃은 딱 두 명, 진영기와 진영준입니다. 아시겠어요? 두 분의 협조 부탁합니다.”
그룹을 차지하는 건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걸 이들도 짐작했다. 최종 목표는 진영기 부자의 파멸이다.
진양철 회장이 친형인 진순철의 흔적을 지웠듯이 말이다.
“아, 네. 명심하겠습니다. 회장님.”
“이 둘을 잘 처리하면 두 분께 회사를 맡길 겁니다. 이미 잘 아시죠? 전 경영에 깊이 개입하지 않는다는 걸? 실적만 잘 내시면 아주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실 겁니다.”
역시 월급쟁이에게는 자리보전이 최고의 선물이다.
두 사장은 다시 환한 표정으로 돌아왔고 연신 머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그들이 나가자마자 웃음을 터트리며 이학재 회장이 들어왔다.
“어쭈? 그 자리가 제법 어울리는데? 으하하.”
“오셨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그가 손을 내저었다.
“그냥 앉아 있어. 그 의자가 오랜만에 주인을 찾았는데 적응해야지.”
“회장님도 이 방이 오랜만이시죠?”
그도 감회가 새로운 듯 천천히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속보는 이미 떴더라. 축하 전화 많이 오지?”
“전화 차단했고 핸드폰도 꺼 뒀어요. 급한 일부터 처리하고 인사는 천천히 받으려고요.”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물산과 전자의 자사주부터 사들여야지?”
“네. 정식 공시 뜨면 바로 진행할 수 있도록 준비 다 해뒀습니다. 이번 주 내로 그룹은 수직 계열화로 될 겁니다.”
“빠르네, 역시. 참 언론도 난리 났던데? 순양그룹의 새로운 선장. 낯간지러울 정도로 칭송 기사가 쏟아져. 특히 한성일 보에서.”
“참 잔인하죠? 애 아버지가 쫓겨났는데 그렇게 만든 나를 칭송해야 한다니.”
“일이니까. 잔인한 수모도 견뎌 내야지.”
“이제 더한 수모를 겪을 겁니다. 당분간 한성일보와의 거래는 없을 테니까요.”
“당분간?”
“네. 영준 형이 백기 들고 살려달라고 할 때까지요. 영준 형도 자식 생각하면 백기 들겠죠.”
“독한 놈. 구족을 멸하는구만.”
“할아버지 방식이거든요.”
이학재는 씁쓸히 웃었다. 한바탕 피바람이 불 것이라는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계열사 정리는?”
“큰아버지나 영준 형의 손을 탄 사람들은 싹 정리해야죠. 그들도 지금은 살아남으려 제게 머리를 조아리지만, 어쩌겠습니까? 왕이 바뀌었는데? 차라리 전부 사표 던졌다면 내 마음도 흔들렸을 겁니다.”
“그냥 싹 정리해. 회장님이었다면 그렇게 하셨을 거다. 그리고… 하나 더 있어.”
이 회장이 어렵게 말을 꺼냈다.
“네?”
“순양그룹과 HW 그룹의 합병. 그리고 그 꼭대기에 앉을 진도준 회장. 그러기 위해서는 나도 정리해야 한다. 흐흐.”
참으로 깔끔하고 철저한 사람이다.
그 오래된 거래를 잊지 않고 정확한 시점에 모든 걸 내려놓는다.
“제 취임식 때 퇴임식을 함께할까요?”
“냉정한 자식. 빈말이라도 붙잡아야 하는 거 아니냐?”
“붙잡는다고 결심을 바꾸실 분이었다면 제가 그토록 어렵게 모셨겠습니까? 괜한 투정까지 다 하시고. 흐흐. 그래, 이제 어떻게 하실 계획이십니까?”
이학재 회장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싱긋 웃었다.
“오세현이가 놀러 오라더라. 너에게 모든 짐을 던지고 유유자적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그 말이 맞는지 일단은 가볼 생각이다.”
사람마다 다르다. 이학재는 죽을 때까지 일에 매달리며 머리를 써야 할 사람이다.
“리조트에서 지내시다 지겨우시면 다시 오십시오. 자리 하나 비워놓겠습니다. 제가 늘 말동무 해드릴게요.”
부회장 정도면 적당하려나?
“봐서.”
이학재 회장은 벌떡 일어섰다.
“실무진 꾸려서 빨리 보내. 합병 논의해야지. 간다.”
그는 조금의 미련도 보이지 않고 뒤돌아섰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한숨 돌렸다. 이렇게 쉬는 것도 잠시뿐이다. 가장 효과적인 때를 놓칠 수는 없다.
전화를 들어 김지훈 검사를 찾았다.
一 야! 연락도 안 되고 뭐 하는… 아니다. 먼저 축하부터 해야지. 감축드립니다. 순양그룹 회장님. 흐흐
“축하는 천천히 하고 지금 급히 일 하나 해줘야겠다.”
一 일? 무슨 일?
“진영준이 만나서 협박 좀 하고 와라.”
* * *
“회장님. 담당 검사가 찾아왔습니다.”
“뭐? 그놈이 여길 어떻게 알고?”
“그게… 진도준의 말을 전하러 왔답니다.”
진영준은 잠시 고민하다 머리를 끄덕였다. 회장이 된 그놈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역시, 재벌이 구치소에 지낼 리가 없지. 이래서 구치소에 재벌만 들어오면 로또 맞았다는 소리가 나오는구만.”
“설마 이런 걸로 트집 잡지는 않겠지?”
“이 정도는 애교로 넘어가야지 별수 있겠어? 아무튼….”
김지훈 검사는 침대에 턱 걸터앉았다.
“뉴스 봤겠지? 도준이가 순양 전부 꿀꺽한 거?”
한참 어린 놈이 말끝마다 반말이다. 진영준은 끓어오르는 속을 눌렀다.
“용건만 말하고 가, 심부름꾼이 말이 많다?”
“오케이. 당신이 차명으로 사들인 순양물산 주식 4천억, 그 자금 출처가 회사 돈 빼돌린 거 맞지? 도준이는 오늘부터 계열사 탈탈 털어 4천억 횡령한 증거 찾는다고 하더라고.”
“이것들이 진짜….”
“증거 찾으면 내가 그걸 100억씩 쪼개서 기소할 거야. 운 좋게 전부 집행유예가 된다 한들, 40번이나 기소할 수 있어. 그러니까 당신은 재판받으며 인생 다 보내는 거야. 물론 구치소가 당신 집이 되겠지. 아, 다음부터 모텔은 얄짤없어. 시멘트 바닥에서 지내야 할 거다.”
“이 새끼가…. 지금 장난해?”
씩씩대는 진영준에게 김지훈은 소름 끼치는 웃음을 보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도준이가 이 말을 꼭 전하라고 하더라. 구치소 대신 네가 가진 그룹 주식으로 남은 인생을 사는 게 어떠냐고. 천천히 생각해. 흐흐.”
진도준의 칼질이 절대 멈추지 않는다는 생각에 진영준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일어설 힘도 없었다.
* * *
지시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걸 확인하자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내가 순양의 주인이 되었다는 걸 꼭 알려야 할 사람에게 찾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인터폰을 눌렀다.
一 네, 회장님.
“전용기 준비해요. 지금 당장.”
一 네?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행선지는 어디라고 전할까요?
“몰도바.”
* * *
一 에필로그.
“모두 여기서 대기해요. 혼자 다녀올 테니까.”
“회장님. 그건 좀….”
당황한 수행원들을 못 본 척하며 검은 비닐 봉투를 들었다.
“괜찮아요. 여긴 사람의 왕래가 없어. 안전해.”
김윤석이 앞으로 나섰다.
“회장님. 안 되는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간절한 그의 표정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그럼 내 뒤 10m 밖에서 따라오도록. 이 정도면 되겠지?”
“네. 회장님.”
십여 명의 수행원이 뒤따르는 가운데 발걸음을 옮겼다. 20년도 훨씬 지난 일이지만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호숫가로 가는 숲길마저 또렷이 기억났다.
그리고 펼쳐진 푸른 호수.
바로 그 장소에서 소주병을 따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기침이 났지만, 천천히 담배를 피웠다.
이런 내 모습을 보는 수행원들의 웅성거림도 어렴풋이 들린다. 그 소리마저도 숲의 소리 같다. 윤현우가 죽었고 진도준으로 태어난 곳.
윤현우는 어디서 잠들었을까? 호숫가 숲일까? 아니면 차디찬 호수 바닥일까?
돌이켜보면 복수를 위해 살았는지, 순양그룹을 차지하기 위해 살았는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머리에 총알이 박히는 악몽을 더는 꾸지 않았을 때가 그 경계선이 아니었을까?
담배를 비벼 끄고 소주를 부었다.
절반은 호숫가에, 절반은 호수에.
“이제 편히 자라. 이 정도면 억울했던 죽음의 한풀이는 충분히 한 셈이니까.”
죽기 전에 했던 것처럼 한참 동안 푸른 호수를 바라보았다.
윤현우의 장례를 다 치른 것 같다.
이제 죽은 자는 잊고 산 자로 돌아가야겠다.
윤현우가 아닌 진도준으로…….
一 끝 一
一 작가 후기 一
하고 싶은 말은 참 많습니다만, 글쟁이는 글만 써야지 말이 많으면 안 된다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 말만은 꼭 해야겠습니다.
끝까지 따라오신 독자님들의 의리에 깊은 감사 드립니다.
좀 더 나은 글로 돌아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산경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