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36
아침 식사 때 할아버지의 호통으로 싸늘해진 집안 분위기 때문인지 모두 할아버지의 기분을 맞춰주느라 정신없었다.
이 일의 당사자인 아버지와 어머니는 개봉관 상황을 살펴본다는 핑계로 식사가 끝나자마자 일찌감치 빠져나갔고, 큰아버지는 바쁜 일이 있다며 가장 먼저 떠났다.
할아버지의 계획을 막으려면 먼저 그 계획의 디테일까지 알아야 한다.
서재의 책상에서 흘깃 본 보고서가 자꾸 눈에 밟혔다. 그 보고서가 바로 아진자동차를 삼키는 계획이 분명할 것 같았다.
진 회장을 중심으로 거실에 모인 사람들을 보면 한동안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조용히 할아버지의 서재로 들어가 책상 위의 두툼한 보고서를 들고 바닥에 앉아 재빨리 읽어내려갔다.
목차를 봤을 때 조금 거북한 기분이 들었고 페이지를 넘길수록 거북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매 챕터의 앞부분만 읽으며 보고서의 전체 내용을 파악하고 보고서를 덮었다.
완전히 잘못 짚었다.
이 보고서는 순양의 아진자동차 흡수 전략 보고서가 아니었다.
자동차 산업 통폐합의 필요성과 그에 따른 정부 시책, 그리고 지원방안이었다. 한마디로 순양이 아진을 흡수하는 타당성과 명분을 기록한 것이었고 이 보고서대로 정부가 발표만 하면 아진자동차는 순양의 그룹사로 편입된다.
대현자동차가 아진을 흡수하면 자동차 시장의 독과점이 우려되고, 우성자동차는 GM 지분이 상당히 많으므로 외국 자동차 회사에 넘기는 인상을 준다.
결국, 순양자동차가 가장 적합한 인수자라는 이야기다.
다시 한 번 순양 아니, 재벌의 힘에 놀랐다.
재벌은 자신이 원하는 정책을 만들어 정부에 제시하고, 정부는 그 정책을 행동으로 옮긴다. 마지막으로 입법부인 국회의원들이 거수기 역할을 충실히 하는 것으로 끝난다.
멀쩡한 회사 하나를 껍질도 벗기지 않고 삼키는 것이 이런 조합으로 가능한 것이다.
이 보고서는 순양그룹과 정부의 은밀한 밀착의 증거다.
이것이 밖으로 유출되면 정경유착 스캔들이 된다.
젠장.
타격이 너무 크다. 현 정권의 타격이야 신경 쓰지도 않지만 순양의 타격은 일어나서는 안 된다.
할아버지를 휠체어에 태워 검찰로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지금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
책상 한쪽에 놓인 주간정보보고서를 집었다.
가끔 서재에서 할아버지 없을 때 잠깐씩 훔쳐보던 것이다.
아직 내게는 딱히 쓸만한 정보는 없었다. 다만 연예인 스캔들을 조사한 것만 재미 삼아 봤을 뿐이다.
이 보고서는 증권가 찌라시니, X 파일이니 하는 것과 그 성격이 같다.
정치, 경제, 사회, 연예계까지 모든 정보를 총망라한 보고서. 하지만 정보의 양과 깊이 그리고 신뢰도는 찌라시와 비교할 수준이 아니다.
각계각층에서 순양의 장학생들이 흘려준 정보를 순양그룹 정보팀이 정밀 검증한 것이다.
쓸만한 게 없나 파일을 넘겼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아진자동차에 뻗은 손을 떼게 할만한 소스는 없었다.
정보보고서 파일을 덮자 긴 한숨이 나왔다.
정부에서 자동차 산업 구조개편 발표를 하기 전 막아야 하는데 지금으로써는 막막하다.
이때 전혀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 다른 시선으로 이 상황을 본다는 게 맞는 표현이다.
할아버지를 막는 게 아니라 정부를 막으면 된다. 정부가 자동차 업계는 쳐다보지도 못하게 혼을 빼놓는다면?
조금 전 봤던 정보보고서에 아주 적합한 내용이 하나 있었다.
다른 재벌이 돈 버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아 흘려보냈던 정보.
바로…….
[한보그룹 – 수서지구 택지개발 용도변경의 件]이거 아주 쓸만하다.
언론이 가장 좋아하고 사랑하는 먹잇감, 바로 정부다.
아무리 물어뜯어도 욕하는 국민이 없다. 언론이 정부를 씹을수록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한다는 좋은 평가만 남는다.
이 역시 돈으로 직결된다.
국민이 언론을 좋아할수록 글자 한 자의 가치는 더욱 커지는 법이니까.
현 정부의 도덕성에 치명적인 흠집이 나면 순양그룹이 만든 자동차 관련 보고서는 휴짓조각이 된다.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은 정부가 나서서 자동차 산업 구조조정을 한다면 또 하나의 스캔들이 될 것이다. 자동차 구조조정에 대해서는 절대 입에 올리지 못할 게 뻔하다.
나는 수서 택지개발 관련 정보를 팩스 기기로 재빨리 카피했다.
* * *
“이거, 너무 커졌는데… 괜찮으려나.”
설 연휴 직후 정보 파일을 정리해서 우리나라의 모든 언론사에 우편으로 보냈다. 며칠 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어 한보그룹의 눈치를 보나 생각했지만, 그들도 내 제보를 확인하느라 시간이 걸렸나 보다.
며칠 뒤, 세계일보가 포문을 열었고 뒤이어 전 언론사가 이 사건에 화력에 집중하여 보도하기 시작했다. 아진자동차에 대한 기사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신문 방송은 연일 수서 특혜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를 메인 기사로 쏟아내는 중이다.
3월이 끝나가는데도 거의 한 달째 시위가 끊이지 않는다.
88년, 자연 녹지에 불과한 수서지역 3만5000평에 아파트를 짓겠다는 정부의 계획을 입수한 한보그룹 정태수 회장은 이 땅을 모두 사들였다.
서울시의 처음 계획은 아파트를 지어 무주택 서민들에게 분양하겠다는 것이었지만 정태수 회장의 전방위 로비로 ‘특정조합에 대한 특혜 불가’라는 방침을 5개월 만에 뒤엎고 택지 공급을 결정했다.
서울시는 장병조 청와대 문화체육비서관의 압력으로 방침을 변경했다고 실토했지만, 그뿐만이 아니었다.
여야 가릴 것 없이 국회의원들도 한보의 뒷돈을 받아 서울시를 압박한 사실까지 나왔다.
청와대 비서관이 몸통으로 지목됐지만, 그가 깃털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언론과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대의 화실은 청와대를 향했고 6공화국 최대의 스캔들로 커지는 중이었다.
“이 정도면 자동차에 눈 돌릴 정신머리는 없을 것 같긴 한데….”
내 생각처럼 청와대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하고 있었고 노태우 정권의 레임덕이 시작되었다.
***
“당분간 청와대와의 연락은 자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식 매집도 보류했습니다.”
이학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책상을 톡톡 치는 진 회장의 눈치만 살폈다. 그렇게 준비했는데 의외의 곳에서 불똥이 튈 줄은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학재야.”
“네. 회장님.”
“쉽게 사그라질 불길은 아니지?”
“그럴 것 같습니다. 대검 중수부에서 전방위 수사를 시작했습니다. 여의도 의원 여섯을 시작으로 서울시, 청와대 비서관들까지 출두 요청을 했습니다.”
“한보 정 회장은?”
“이미 출국금지 상태입니다. 그룹 차원에서 변호인단 꾸리느라 뛰어다닌답니다.”
“검사장급 구하러 다니겠구먼.”
진 회장은 한심하다는 듯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대통령 임기는 24개월이라는 말이 있다. 첫해 2년은 뭐든지 밀고 나갈 힘이 있지만, 나머지 3년은 꾸준한 내리막이다.
이제 임기가 2년밖에 남지 않은 시기에 이 정도 스캔들이면 대통령의 힘은 다 잃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제 권력은 여당 총재에게로 급격히 이동할 것이다. 다음 총선이 딱 1년 남았다. 당 총재가 공천권까지 쥐고 있으니 청와대는 식물 정권으로 전락하는 건 불 보듯 뻔하다.
그런 청와대는 자동차 산업의 개편을 추진할 수도, 추진하지도 못한다.
“이번 정권에서는 땅 투기는 하지 말자고 그렇게 말했는데… 쯧쯧.”
“정 회장 땅 욕심이야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 욕심이 우리 계획까지 망칠 줄 몰랐지만…….”
“현직 검사장들한테 알려. 괜히 정태수 변호한답시고 사표 내면 우리 순양은 인연 끊는다고 경고해.”
“알겠습니다.”
이학재도 이런 식으로라도 화풀이하려는 진 회장의 마음과 다르지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정 회장의 멱살이라도 쥐고 흔들고 싶을 정도였으니까.
진 회장은 잠자코 곁에 앉아 있던 조대호 사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송 회장은 어때? 잔치 벌이지 않았나?”
“비슷합니다. 저한테 채용하지 않겠다고 통보하며 웃더군요.”
“고생했다. 조 사장.”
“아닙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한 게 없어 송구합니다.”
조대호 사장이 머리를 숙였다.
“4월 정기 인사 때 다시 자동차로 복귀해. 신차 개발 차질없이 준비해야지.”
“감사합니다. 회장님.”
떨구었던 머리를 드니 환한 조 사장의 얼굴이 보였다.
“학재야. 아진자동차 주식 사들인다고 돈 좀 깨졌지?”
“괜찮습니다. 아진 송 회장 두들겨 맞을 때 주가가 폭락했지 않습니까? 그때 매입한 물량으로 물타기 했습니다. 지금 다시 팔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 손 털고 빠져.”
진 회장은 씁쓸한 표정으로 순양경제연구소에서 만든 전략 보고서를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 * *
영국 밴드 퀸의 보컬리스트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로 사망한 91년이 지나가자 서태지가 92년을 휩쓸었다.
또한, 서태지보다 더한 인기를 얻게 될 김영삼 씨가 제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됐고 양 김 시대의 종말을 예고하듯 김대중 씨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92년은 저물어갔다.
TV를 통해 이 모습을 보던 오세현은 TV를 끄고 아쉬운 듯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쪽은 물러나고 한쪽은 시작하고. 참 대단하구만.”
“우리도 이제 시작해야죠.”
“뭘 시작해?”
오세현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변했다. 그간 나 때문에 놀란 적이 한두 번은 아니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내년엔 묻어둔 돈을 좀 움직이려고요.”
“돈? 미라클에 있는 돈?”
“네.”
“어디에? 어떻게?”
나는 손을 들어 오세현의 입을 막았고 생각해둔 계획을 조심스레 꺼냈다.
“삼촌. 이제 저랑 동업하시죠.”
“뭐?”
“파워세어즈 그만두시고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에 올인하시라고요. 어차피 2%나 되는 주주시고, 우리도 돈 많이 벌었으니 고액 연봉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지 않겠어요?”
처음은 충격, 그다음은 고민할 줄 알았는데 전혀 달랐다. 내 제안이 끝나자마자 머리를 흔들었다.
“그건 싫은데?”
“네? 왜요?”
“주식의 98% 보유자가 독단적인 투자를 결정하고 그 결과는 항상 성공이었는데 내가 할 일이 뭐가 있겠어? 안 그래?”
‘첫 제안은 무조건 거절하라’라는 닳고 닳은 협상 테크닉을 쓰는 게 아니다. 완벽한 거절이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제안을 해야 스카웃을 할 수 있다.
“한국에 지사도 만들 겁니다. 이제 자금의 일부는 한국에 두고 운용할 생각이에요. 또… 할아버지 비자금 있죠?”
“그래.”
“전 델 컴퓨터에 투자한 돈만 굴릴 테니까 할아버지 비자금과 나머지 돈은 삼촌이 운용하시고요. 삼촌을 허수아비로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오세현은 내 제안보다 델 컴퓨터에 묻어둔 돈을 굴린다는 말에 더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뭐? 그 돈을 빼려고?”
“네. 내년 초에 뺄 생각입니다.”
“미쳤어? 델은 최고 수익률을 매일 갱신하는 골든 덕이야. 그걸 왜?”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제가 말씀드린 거 어떻게 생각하세요? 참, 오해하지는 마세요. 제안하는 게 아니라 부탁드리는 겁니다.”
차분한 내 말투 때문인지 오세현은 흥분을 가라앉히느라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몇 분간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을 때 협상가의 자세로 돌아왔다.
“내가 필요한 것을 정리해서 다시 말할게. 그거 보며 다시 이야기하자.”
뭐가 됐든 다 들어줄 생각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오세현 같은 어른이다.
나를 더 이상 어린애 취급을 하지 않으면서도 똑똑하고, 경험 많고, 결정적으로 전 세계 어딜 가든 꿀리지 않는 경력을 보유한 사람.
내가 성인이 될 때까지 날 대신할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하지 않았다.
협상 과정도 중요한 법이다. 그가 요구하는 내용을 검토하는 척하며 받아들여야 그도 만족감을 느낀다. 협상은 좋은 조건보다 원하는 것을 다 얻었다는 만족감이 우선이다.
“도준아, 델 컴퓨터의 자금은 도대체 어디에 쓰려고 그래?”
“일본에 투자할 생각입니다.”
일본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세차게 머리를 흔든다.
“안돼! 몰라서 그래? 일본 경제는 지금 침몰 중이야. 너도 신문 보잖아. 거품이 터지며 최고의 위기를 맞은 게 일본이라고.”
나 역시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삼촌. 최고의 기회는 항상 최고의 위기 속에 있습니다. 잘 아시면서…….”
“그건 성공한 놈들 이야기고! 위기 속에서 기회를 잡은 놈은 백만 명 중에 하나다. 모두 그 위기 속에 빠져 죽었어.”
“삼촌. 제가 그 백만명중의 한 명이라는 생각은 안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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