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42
12월 7일, 유난히 일찍 눈이 떠졌다.
이미 할아버지가 점수를 알려줬지만, 긴장은 남아 있었다.
아침 신문을 주우러 나갔을 때 대문 앞이 시끄러웠다. 조용한 주택가라 이런 소란은 처음이다. 무슨 일인가 싶어 문을 열자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고 마이크가 얼굴을 가렸다.
“진도준 씨?”
“진도준 학생? 맞죠?”
12월이라 아침 6시는 어두웠고 터지는 플래시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황급히 대문을 닫았다.
무슨 일일까?
잠옷 차림의 아버지가 정원으로 내려와 하품하며 내 등을 툭 쳤다.
“너 인터뷰 하겠다고 왔어.”
“아니, 수능이면 전국 수석을 취재해야지 왜 나를…?”
“몰라서 물어? 평범한 수석과 순양 그룹 손자의 고득점. 게다가 아버지는 영화 제작사 사장, 어머니는 아직 미모를 잃지 않은 왕년의 여배우. 어느 게 더 화제가 될까?”
아버지는 피식 웃으며 대문을 가리켰다.
“방금 네 할아버지가 전화하셨다. 할아버지 기분 한번 맞춰줘라. 자랑하고 싶으신 거야.”
아이고, 우리 영감님. 손자 자랑하고픈 마음은 돈이 많으나 적으나 한결같은 건가?
“인터뷰 간단히 해줘. 참, 인터뷰할 때 훌륭한 부모님 덕분이라는 말도 빼먹지 말고.”
“아버지. 제가 공부하는데 딱히 도움 주신 건 기억에 없는데요?”
“자식에 대한 과도한 기대 때문에 스트레스 준 일도 없고 잔소리도 안 했어. 적당한 방임은 부모로서의 최고 덕목이다. 잊지 마라. 흐흐.”
영화 몇 편 성공하고 충무로에서 무시 못 할 제작사 사장이 되니까 아버지의 숨은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능청스럽고 늘 여유 있는 웃음을 잃지 않는다. 드문드문 드러내는 유머 감각도 발군이다. 아들을 자식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대하는 서구적인 마인드도 있었다.
서재는 이미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고 어머니는 기자들을 위해 차와 다과까지 준비했다.
“도준아. 교복으로 갈아입어. 그게 어울리겠다.”
어머니까지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인터뷰 준비를 끝내자 어머니가 기자들을 데리고 들어왔다.
TV 방송 기자는 카메라맨까지 함께 왔지만, 영상의 힘을 잘 아는 아버지가 조율하기 시작했다.
“카메라는 끕시다. 자료 화면은 사진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30초 이하로 나갈 텐데?”
“그래도 한두 컷은 나가야….”
“말은 사라지지만, 영상은 영원히 남죠. 우리 애의 발목 잡는 일은 안 하고 싶군요.”
“진 사장님, 발목 잡을 일이 뭐 있다고 그러십니까?”
TV 뉴스 기자가 웃으며 말했지만,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 말대로 합시다. 카메라 꺼요.”
카메라를 끄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처음부터 직설적인 질문이 쏟아졌다.
“도준 학생도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습니다’라고 하실 건가요?”
“그럴 리가요. 우리나라 최고 부자의 손자가 교과서만 팠을까요?”
다소 도전적인 대답에 몇몇 기자들의 입이 찢어졌다. 모범생 답안 같은 인터뷰는 기자들도 지겹다.
“그럼…?”
“과목별로 족집게 선생들…. 일 년 내내 일대일 과외 했어요. 쓴 돈만 해도 기자님들 십 년 치 연봉이 날아갔을걸요?”
“…….”
너무 노골적인가? 기자들이 질문을 잇지 못하자 지켜보던 아버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낄낄거렸다.
“어디에 지원할 생각인가요?”
다시 평범한 질문, 정석대로 밟는 걸 보니 초보 기자 같다.
“법대 지원할 겁니다.”
“오, 판검사가 목표인가요?”
“네.”
이때 한 기자가 다시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법대를 지원하는 이유가 혹시 순양 그룹 후계구도에서 제외 됐기 때문인가요?”
기자는 아주 잠깐, 내 표정을 살피고 질문을 이어갔다.
“위로 큰 아버지들이 계시고 사촌 형들도 많고…. 순양 가의 막내니까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한 건가요?”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오히려 잘됐다. 이 인터뷰를 보게 될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하면 된다.
“그런 생각은 안 해봤는데…. 글쎄요, 제 부모님은 자유롭게 사시는 분이죠. 순양 그룹과 전혀 관계없는 일을 하시잖아요. 그래서인지 저도 순양 그룹을 염두에 둔 적은 없었습니다.”
“법조인이 된다면 순양 그룹과 관계없는 길을 걸을 것인지, 아니면 순양 그룹을 측면지원할 것인지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더 이상은 안 된다. 이 정도까지가 딱 적당하다. 말이 많아지면 해석도 분분해진다.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런 생각조차 해본 적 없어요. 그런데 수능 수석은 누굽니까?”
“아, 제주도 학생인데….”
“이과에요? 문과에요?”
“이과요.”
“그 학생, 나처럼 족집게 과외도 안 쓰고 수석 할 정도면 진짜 천재거나 무지막지한 노력파겠네요. 아, 어쩌면 둘 다?”
“진도준 학생. 혹시 유학 계획은….”
이쯤에서 끝내고 싶었다. 어차피 이들이 써야 할 기사는 정해져 있다.
“저기 기자님들. 취재는 제주도 가셔서 하고 내 기사는 대충 할아버지 입맛에 맞게 쓰세요. 보니까 딱 견적 나오는데요? 광고 땡겨오라고 데스크에서 보낸 거 맞죠?”
어처구니가 없는지 기자들은 할 말을 잃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고 참고서, 문제지의 도움을 받았다는 기사를 보시면 아주 좋아하실 겁니다.”
킥킥대며 지켜보던 아버지가 나섰다.
“자자, 그만 끝냅시다. 아 참, 사진은 충분히 찍으셨죠? 우리 아들 사진… 신문과 방송에 처음 나가는 건데, 이왕이면 가장 잘 나온 걸로 부탁합니다. 그럼.”
아버지가 기자들을 정리할 때, 이 층 내방으로 올라와 학교 갈 준비를 시작했다. 때마침 핸드폰이 울렸다. 할아버지다.
“네, 할아버지.”
– 도준아. 인터뷰 잘 끝났니?
“방금 끝냈습니다.”
– 그럼 할애비 집으로 오렴.
“네. 학교 끝나고….”
– 아니다. 아침 먹고 바로 오너라. 학교에는 내가 전화 넣어뒀다. 안 가도 돼.
설마 사람들 모아놓고 날 자랑하려는 건 아니겠지?
만약 그렇다면 소름 끼치듯 쪽팔릴 텐데, 걱정이다.
* * *
“아이고, 내 새끼! 한번 안아보자.”
두 팔을 활짝 벌린 할아버지만 보였다. 걱정하던 일은 없었다.
“고생했다. 그리고 장하다.”
할아버지는 내 등을 토닥거리며 서재로 끌고 갔다.
웃음이 사라지지 않는 할아버지는 뭐가 그리 급한지 내 진로부터 말했다.
“그래, 학교는 어디로 가고 싶니? 미국? 유럽?”
“아직 생각해본 적 없어요. 천천히 알아봐도 되지 않겠어요?”
설마 졸업하자마자 외국으로 보내려는 걸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면 안 된다. 전생과 다름없는 미래가 펼쳐진다면 몇 년 안에 할아버지는 돌아가신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나는 외국으로 갈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그래, 그간 공부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한 일 년 정도 대학 다니며 좀 쉬면서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니 마음이 놓였다. 급히 서두를 것 같지는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다. 내 눈치를 슬쩍 보며 어렵게 입을 여신다.
“네 꿈은 여전하지? 바뀐 건 아니지?”
딱 적당할 때 적절한 질문을 던지시니 다행이었다. 오히려 내가 확인하고 싶은 순간이다.
“음, 잘 모르겠어요. 할아버지처럼 사업을 하고 싶기도 하고, 아버지처럼 영화도 만들어보고 싶은 적도 있고… 판검사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왔다 갔다 해요.”
갑자기 확 굳어진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자 마음이 놓였다. 나를 경영에 참여시키려는 의지가 보였다.
“도준아.”
“네.”
“사내란 말이다. 밥벌이를 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영화? 그걸 밥벌이로 생각하는 놈이 있더냐? 다 지가 좋아서 하는 거다. 운 좋게 그걸로 부자가 되는 놈도 있겠지. 하지만 근본은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야.”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게 말씀하시니 조금 우습기도 하다.
“하기 싫고 힘들어도 남자는 돈을 벌어야 한다. 그게 전부다.”
“…네.”
“이 할애비는 말이다. 네가 이 할애비가 일군 순양에서 일했으면 좋겠다. 더 크게 키우고 더 많이 만들어서 지금의 수십, 수백 배의 순양그룹이 되는걸 보고 눈을 감고 싶구나.”
이런, 너무 노골적이다. 설마 이런 속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특히 큰아버지에게 말하면 큰일이다.
“할아버지.”
“오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막내아들이 누군지 아세요?”
엉뚱한 질문에 할아버지는 눈만 껌뻑거렸다.
“이성계의 계비(繼妃) 신덕왕후 강씨의 차남 이방석입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게야? 느닷없이 역사 이야기는 왜 꺼내? 할애비 학교 못 다닌 거 몰라? 으허허.”
“이성계는 정비(正妃) 신의왕후 한씨 사이에 아들 여섯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함께 전장을 누비고 공을 세운 장성한 아들 전부를 무시하고 11살에 불과한 어린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할아버지의 웃음이 멈췄고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변했다.
“그 이방석이라는 놈은 배다른 형인 태종 이방원의 칼에 죽었지. 왕자의 난, 맞느냐?”
“그렇습니다.”
괜한 말을 꺼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다. 할아버지의 지나친 애정이나 조급한 내 마음이 드러났다가는 일을 망칠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진도준이 스물을 넘기지 못하고 죽은 것을.
찌를 듯 나를 쳐다보던 할아버지의 날카로운 눈빛이 다시 온화하게 변했다.
“매주 금요일, 이 서재에 그룹 핵심 인사들이 모인다. 그룹의 현안을 놓고 가장 깊은 대화를 하고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자리지.”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넌 앞으로 매주 토요일 아침 식사는 이 할애비와 함께 하도록 하자.”
토요일마다 그룹의 중요한 결정을 내게 알려준다는 뜻이다. 마냥 좋다고 할 필요는 없다.
체크, 리체크, 더블체크.
모든 일의 기본 아닌가? 할아버지의 진의를 조금이라도 더 알아야 한다.
“할아버지. 전 아직 어립니다. 할아버지께서 회사 일을 가르치신다고 해도 못 알아들을 거예요.”
“욕심 많은 놈에게 겸손한 말은 어울리지 않아. 네게 뭔가를 가르치려는 게 아니야. 네 싹수는 이미 확인했으니 큰 욕심을 담을 만한 그릇인지 확인하고 싶을 뿐이야. 허허.”
할아버지, 아니 진 회장의 웃음이 예사롭게 들리지 않았다.
기특한 손자에 대한 애정과 거대한 유산을 상속하는 것은 별개라는 뜻이다.
앞으로 매주 토요일은 할아버지가 아닌, 진 회장의 모습을 보게 될 것 같았다.
“이걸 한번 보고 토요일에 답안지를 제출해라. 수능 성적만큼 잘 나오는지 한번 보마.”
꽤 두꺼운 서류 뭉치를 내게 툭 던졌다.
“일 년 정도는 푹 쉬도록 하고 싶었는데… 우리 도준이 여전히 공부해야 하는구나. 허허.”
할아버지는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일어섰다.
“나가자. 내가 보여줄 것이 있어.”
본관 밖, 별관 옆의 차고로 가자 십여 대의 수입차가 보였다. 나이가 몇인데 차를 좋아하는지……. 노인네의 취미치고는 참 돈 많이 드는 취미다.
“못 보던 차가 있네요. 또 사셨어요?”
“못 보던 차가 몇 대지?”
“세 대요. 할아버지. 이제 스포츠카는 그만 타세요. 위험해요.”
할아버지는 외투 주머니에서 자동차 열쇠 세 개를 꺼냈다.
“내가 주는 선물이야. 네 덕분에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갔어. 그리고 새해 전경련 회의 때, 다른 회장 놈들 앞에서 큰소릴 칠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와. 이정도 선물은 받아야지, 암.”
어린애였다면 기뻐 날뛰었을 텐데… 독일, 이탈리아 스포츠카를 봐도 덤덤했다.
하지만 무표정하게 있을 수는 없는 일, 나는 자동차 열쇠를 받지 않았다.
“할아버지 선물은 숙제 끝내고 받을게요. 숙제 만점 받을 때마다 하나씩 주세요.”
열쇠를 쥔 할아버지의 손이 멈칫하더니 이내 얼굴에 함박웃음이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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