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45
“도준아.”
“예.”
진영준은 술기운에 붉어진 내 얼굴을 살피며, 조용히 속삭였다.
“우리 형제들 중에 사람 구실 할 놈은 너뿐이다. 다른 놈들은 싹수가 노래. 나이 들고 철들어도 회사 맡아 굴릴 능력은 없다고 봐.”
어이가 없어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지금 사촌들의 모습은 진영준의 20대 때와 다르지 않다. 지금 진영준의 모습에서도 싹수는 딱히 보이지 않는다.
귀국하자마자 연예인들과 놀고, 조금 전 광고 모델이 했던 말을 생각해 보면 외국 생활할 때 아예 불러서 놀았다는 뜻 아닌가.
“솔직히 난 네가 사시를 패스하든, 검사가 되든 상관없어. 내 옆에서 그 좋은 머리로 함께 해보자. 넌 순양그룹의 넘버 2가 되는 거야.”
나에 대한 경계심 때문일까? 아니면 진짜 믿을만한 오른팔을 구하려는 것일까?
“세상에, 이렇게 잘생긴 오빠가 머리까지 좋아? 그럼 오빠는 오늘부터 내 애인이야.”
예쁘장하게 생긴 애가 내 옆에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는다. 이 여자애 때문에 대화가 끊어져 버렸다.
“너, 눈치 빠르네. 잘 해봐. 우리 동생이 너 마음에 들어 하면 넌 진짜 제대로 된 스폰 하나 잡은 거야. 고3인 그 애 재산이 수백억이라고. 하하.”
수백억이라는 말에 여자의 눈이 빛났고 진영준은 내 어깨를 툭 치고 이 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여자 두 명의 허리를 감싼 채….
“세상 참 불공평하다. 재벌 3세에 머리도 좋아. 잘생긴 얼굴에 키도 크고. 이건 뭐, 완벽한 이상형이네.”
“당신도 예쁘게 태어났잖아. 그것 때문에 여기 있는 거고.”
내 허리를 감싼 그녀의 손을 풀며 말했다.
“하나만 물어보자. 우리 형이랑 어떻게 아는 거야?”
“내가 누군지 보다 그게 더 궁금해?”
“연예인이겠지. 아니면 지망생이거나. 빨리 묻는 말에나 대답해봐.”
“이 바닥 좁아. 좀 뜬 애 한 명 알면 그다음부터는 소개지, 뭐. 번호 따고 만나고 또 소개받고. 그렇게 좀만 지나면 핸드폰에 여자 연예인 이름으로 꽉 채우는 거야. 단 돈이 받쳐줘야겠지만.”
대수롭지 않게 툭 던지는 거로 봐서 진영준은 따로 채홍사가 필요 없어 보였다. 아직 젊어서 그런가?
“그리고 나 지망생 아냐. 곧 데뷔해. 앨범도 준비 중이고.”
“가수?”
“응. 너 H.O.T 알지? 올여름에 데뷔한 애들.”
“그래. 알아.”
“그런 컨셉이야. 대신 나처럼 귀여운 여자들이 멤버지.”
걸그룹인가? 그렇다면 설마…?
“너 몇 살이야?”
“열일곱.”
맙소사! 고삐리 아닌가?
“정신 차려. 이런 데 따라 다니지 말고…. 자신을 소중히 해.”
“……?”
동그란 눈을 깜빡거리면 날 빤히 보는 여자애를 보자 아차 싶었다.
이 무슨 아재의 오지랖인가?
괜한 소리 때문에 머쓱해진 속내를 숨기고 싶어 식탁에서 일어났다.
“빈방 많아 보이니까 푹 자고 쉬다 가. 방문은 꼭 잠그고.”
그녀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밖으로 나와 버렸다.
다행이다. 만약 저 애가 성인이었다면 이렇게 쉽게 미련을 버리지 못했을 것이다.
쌀쌀한 겨울 공기를 들이마시니 정신이 맑아졌다.
시동을 건 채 운전석에서 졸고 있는 사내를 보자 마음이 짠하다.
어쩌면 가족이 있을지도 모른다. 따뜻한 집을 놔두고 이 무슨 생고생인가? 먹고 사는 게 이렇게 힘들다.
보조석 문을 열고 앉으니 사내가 벌떡 일어났다.
“죄, 죄송합니다. 깜빡 졸았습니다.”
“괜찮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해서 죄송해요.”
“아이고, 아닙니다. 그런데 뒷좌석에 편히 앉으시죠.”
“제가 상전도 아니고 상관도 아닌데 뒷좌석은 불편합니다. 그냥 가시죠.”
차가 출발하고 한동안은 침묵만 흘렀다. 운전하는 사내가 불편한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라디오라도 들으시겠습니까? 도련님.”
“괜찮습니다. 그보다 도련님이라니요? 닭살입니다.”
예의 있게 말하자 사내는 의외라는 듯 내 얼굴을 힐끔거렸다.
“그룹 전략실에 근무하십니까?”
“네, 어떻게 아셨어요?”
“회장님이신 할아버지와 자주 이야기 나눕니다. 그래서 기획실이 두 파트로 나뉜 것도 잘 알죠. 진짜 그룹 전략을 짜는 명문대 출신의 인재들로 구성한 파트. 그리고….”
곁눈질로 보니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이 조금 떨렸다.
“우리 집 철없는 새끼들 잔심부름도 하고 똥 산 거 치우기도 하는 형님처럼 후진 대학 나온 사람들로 구성한 파트. 형님은 후자 소속이겠죠.”
핸들의 잡은 그의 손등에 핏줄이 툭툭 솟았다. 꽉 다문 입술도 떨렸다.
수치심, 모멸감. 저 기분 잘 안다.
“형님은 일류대 나와서 전략 짜는 놈들보다 훨씬 더 운이 좋아요.”
“내, 내가…?”
“회장님 연세 생각해 보세요. 곧 팔순입니다. 살면 얼마나 살겠어요? 회장님 돌아가시면 우리 큰아버지들 셋, 고모까지 넷입니다. 순양그룹 찢어먹으려고 눈이 시뻘게질 겁니다. 부회장님은 독식하려고 칼춤 출 거고요.”
수치, 모멸 같은 감정이 사라진 얼굴에 경악만 가득했다.
“그때 형님이 아는 이 집안사람들의 비밀, 그거 아주 값비싸게 팔 수 있을 겁니다. 일류대 나와 사무실에서 전략 짜는 새끼들이 평생 벌어도 못 벌 돈을 한방에 쥐는 거죠.”
“너…. 너 뭐야? 무슨 말 하는 거야?”
“도련님이라는 호칭은 닭살 돋는데… 반말은 열 받네요. 조심합시다.”
나와 그의 눈이 마주쳤다. 알아들었으려나?
“저 피곤한데 눈 좀 붙이겠습니다. 집에 도착하면 깨워주세요. 형.님!”
그는 아무 말 없이 차의 속도만 높였다.
* * *
1997년 1월 22일, 한도그룹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을 비롯하여 산업, 외환, 조흥은행의 은행장 네 명은 꼬박 하루 동안 한도그룹 정 회장을 설득했다.
“회장님. 이런 식이면 다 죽습니다. 정부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특혜시비를 우려합니다.”
“이미 지난 18일부터 1백50억 원에 달하는 어음도 못 막으셨지 않습니까? 사실상 부도상태라고요! 아직 현실을 모르시겠습니까?”
“8백50개의 하청, 협력업체도 생각하십시오. 십만 명이 넘는 가장이 길바닥에 나앉습니다.”
“회장님 일가의 경영권만 포기하십시오. 그럼 청와대도 허락할 겁니다. 한도를 지원할 명분이 생기니까요. 정부도 한도의 부도를 막고 싶어 합니다. 경영권만 포기하시면 긴급 자금지원은 물론이고 은행 공동으로 자금관리도 해주겠습니다.”
정 회장은 은행장들의 간절한 심정을 외면하며 남의 집 이야기처럼 뒷등으로 흘렸다.
“제일은행이 1조1천2백억, 산업은행은 8천9백억, 조흥은행 5천억, 외환은행도 4천5백억. 이게 내가 빌린 돈이요. 맞소?”
최 회장은 부도 당사자 임에도 은행장들보다 한결 느긋한 표정이었다.
Too Big to Fail, 바로 대마불사의 규칙을 정확히 알기 때문이다.
한도그룹이 쓰러지면 은행은 수조 원의 부실채권을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수조 원을 또 한 번 밀어주는 건 가능해도 날아간 수조 원은 되찾기 힘들다.
최 회장은 은행이 공멸을 선택할 거라는 생각은 단 일초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 회장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했다.
다음날인 23일, 서해안 당진에 제철소를 짓던 한도제철이 쓰러졌다. 정치권과 은행의 결단이 최 회장을 목을 쳐버린 것이다.
이에 따라 여신관리기준 9위, 자산 기준 14위, 국내 계열사만도 22개에 달하는 한도 그룹은 공중분해 될 처지에 놓이게 됐다.
주거래은행들도 흔들렸고 그 밖에 70여 개 금융기관도 위험에 빠졌다.
이제 치명상 입은 먹잇감을 노리는 야수들이 눈치 싸움을 시작했다. 한도 사태에 따른 전경련 긴급회의라는 명목으로 모인 재벌 총수들은 재계 1, 2위를 다투는 순양과 대현이 한도를 탐낸다는 걸 알자 일찌감치 패를 덮고 포커판에서 빠져버렸다.
“내가 얼마 전에 공장에서 일하는 애들 연수원 만들려고 폐교를 하나 샀거든? 그런데 횡재했지 뭐야. 폐교 담벼락을 따라 자란 나무들이 엄청 비싼 거였어. 폐교 매입 금액의 두 배가 훌쩍 넘더라고.”
대현 그룹 주영일 회장은 담배 한 개비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부도난 한도제철과 곧 부도날 한도건설은 폐교나 다름없다. 채권을 탕감하고 헐값에 매입하면 고가의 나무들이 따라온다.
두 회사 소유의 알짜배기 땅. 이 땅이 바로 나무다.
“거 참, 신경 쓰이게 왜 담배를 조물딱거려? 피라고!”
“난 이렇게 담배를 눈앞에 두고 참아야 금연 성공해. 진 회장도 담배 끊은 지 얼마 안 됐지? 참으라고. 눈앞에 담배가 있어도 피고 싶지 않을 때가 바로 금연 성공이야.”
주 회장은 담배 한 개비를 진 회장의 눈앞에 흔들었다. 한도제철 인수전에서 빠지라는 뜻이다.
진 회장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담배를 낚아채고 입에 물었다.
“불 없나?”
진 회장이 손을 내밀었을 때 주 회장의 얼굴이 굳어버렸다.
“불도 들고 다녀야 유혹이 더 강해지지. 반쪽짜리 유혹 참는 거야 누가 못해?”
진 회장은 곁에 대기하던 이학재 실장에게 손을 내밀자 그는 공손하게 라이터를 건넸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담배에 불을 붙인 진 회장은 길게 한 모금을 빨았다.
오랜만에 들이마신 담배 연기 때문에 어지러운지 머리를 의자에 대고 한동안 눈 감고 있었다.
“주 회장. 내가 몸 상하는 거 때문에 금연 한 줄 아나? 늙으니 노인 냄새가 짙어져서 담배 끊은 거야. 건강? 그런 거 챙기려 했으면 운동선수 했지, 장사 시작 안 했어.”
주 회장의 눈썹이 꿈틀했다.
한도제철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진 회장의 선언이다. 순양그룹에 손해를 끼치더라도 인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의까지 보여준다.
“계산 끝냈을 텐데? 원화 1조와 달러 10억은 줘야 제철소 용광로 구경할 수 있어. 뒤따라올 한도건설도 1조 원은 줘야 하고. 순양이 우리 대현 레이스에 따라붙으면 은행 배만 불려주는 꼴인데?”
“손 떨리면 빠지시던지.”
진 회장이 이죽거리자 주 회장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오랜만에 좋은 일 한번 하지, 뭐. 은행이 튼튼하면 나라 경제도 좋잖아?”
사람 속 긁는 데는 따라올 자가 없다. 얼마 전, 손자 수능 성적으로 속을 뒤집어 놓더니 이젠 돈 지랄로 속을 긁는다.
주영일 회장은 진 회장의 손가락 사이에 낀 담배를 슬쩍 빼서 한 모금 빨았다. 자신도 손해를 감수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행동이다.
불꽃 튀는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그룹에 도움이 될 회사를 싸게 인수한다는 목적 위에 자존심까지 더해졌다.
돈 많은 사람이 돈에서 밀려 판을 접는 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일도 없다.
주 회장은 입안에 모래를 한 줌 머금은 느낌이었다.
1조 원으로 생각했던 인수 금액이 두 배가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더…….
* * *
“회장님. 좀 심하셨습니다. 주 회장, 단단히 준비할 텐데요?”
“그래 보였어?”
“네. 이 악문 모습을 보니 2조 이상도 쓸 것 같습니다.”
“으허허허. 그 친구 성깔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이학재의 걱정은 아랑곳하지 않는 듯 진 회장은 웃음까지 터트렸다.
“웃으실 때가 아닙니다. 정부에서 부도 여파를 줄이기 위해 채권단을 독촉합니다. 한도제철 입찰, 곧바로 시작할 겁니다. 1조 원과 10억 달러는 마련해 뒀지만… 그게 전부입니다.”
“대현은?”
“작년, 오일머니가 잔뜩 들어왔습니다. 어차피 비가격 요소는 비슷하니까 높은 금액 써내는 쪽이 이깁니다. 자금력에서는 우리가 밀릴 겁니다.”
진 회장은 달리는 차의 창문을 내렸다. 얼어붙은 찬 바람이 차 속으로 밀려들었다.
“규칙이 하나뿐인 게임이 있나? 게임의 룰은 여러 가지야. 반칙도, 오심도 게임의 일부고.”
“혹시 다른 방도가 있으십니까?”
“채권심사단 구성되면 자리 한 번 만들어. 고생할 사람들인데 밥 한번 사야지.”
채권단에 돈 봉투를 돌리는 건 대현도 할 수 있다.
이학재는 진 회장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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