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47
“당신…! 그냥 찔러본 건 아닐 테고, 인수의향서는 왜 넣은 거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소리치는 이학재.
그 모습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주섬주섬 가방을 챙기는 오세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열탕과 냉탕이었다.
“거, 이제 연세도 드실 만큼 드신 분이… 성질 좀 죽이십쇼.”
“말 돌리지 말고!”
“내 방송 보고 이러는 거면 인터뷰 다시 잘 보고 성질 내십쇼. 손자가 할아버지에게 도움되려고 애쓰는 거 보고 궁리한 거요.”
“뭐라?”
“돌아가셔서 주판 다시 튕겨보세요. 이득 본 겁니다. 아, 물론 돈은 좀 더 써야겠죠. 하지만 심사단 설득할 때 훨씬 유리할 겁니다.”
이학재는 멍한 얼굴로 오세현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전 바빠서 이만…. 채권단 미팅이 있어서요.”
사무실을 나가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정신을 차린 이학재는 전화 꺼내 들었다.
“미라클 오세현이가 방송 나온 거 찾아와. 회장님댁으로 돌아갈 때 다시 한 번 봐야겠어.”
이학재는 자동차 뒷자리에 앉아 묵직한 노트북의 무게를 무릎으로 느끼며 인터뷰 영상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도움을 주는 내용이 뭔지 알기까지 그리오래 걸리지 않았다.
진 회장과 오세현을 따로 떼어 놓으면 뜬금없이 끼어든 경쟁자지만, 진 회장의 의도를 파악한 오세현이 끼어든 것이라면 여론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단단히 한다.
노트북을 덮은 이학재는 어이없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허허, 이거 참. 졸지에 앞뒤 없는 삼돌이 됐네.”
그의 실소가 해답을 찾아낸 웃음이라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듯, 운전기사는 차의 속도를 높여 진 회장의 집으로 달렸다.
헛기침을 한번 하고 서재로 들어서자 진 회장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었다.
“회장님.”
“학재야. 이거 마냥 화만 낼 일은 아닌 것 같다. 괜찮은 불쏘시개가 될 것 같기도 하고…….”
“네. 오 대표의 의도 역시 땔감이 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뭐? 그자가 직접 말했어?”
“그렇습니다. 도준이가 회장님 돕겠다고 만든 두 사람의 합작품이라고 합니다.”
진 회장은 손자의 이름이 나오자 입이 떡 벌어졌지만 결국 웃음이 터져버렸다.
“으허허허. 세상에나…. 모두 시뻘건 눈으로 내 돈 빼먹기 바쁜데 손자놈은 날 도와주려고 미국 투자사까지 동원해? 이런 기특한 놈이 있나!”
이학재는 진 회장의 웃음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장작이 활활 타오를 때 밥을 지어야 한다. 때를 놓치면 재만 남는다. 할 일이 많다.
“내일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비난 기사를 일제히 터트릴 생각입니다. 오로지 돈만 생각하는 기업 사냥꾼, 투기자본의 위험성, 국부 유출 같은 자극적인 단어로 도배해야죠.”
“그리고?”
“각 방송사 토론 프로그램마다 우리 사람을 내보낼 생각입니다. 경제학 교수 대여섯 명 섭외해서 동일한 논조를 강조하면서….”
“대현이라는 이름도 슬쩍 끼워 넣는다?”
“네. 이미 충분한 제철소를 확보한 대현 그룹인데, 굳이 인수하겠다는 것은 한도제철의 토지를 노리는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실제 노리는 것은 아파트 지어 팔아먹겠다는 속셈 아닌가…? 이 정도만 던져 놓으면 자연스럽게 한 묶음으로 치부될 겁니다.”
진 회장은 무릎을 탁 쳤다.
“그래. 바로 그거야! 이거 참, 타이밍이 절묘하구먼. 처음부터 대현을 까기가 좀 그랬는데 오세현이가 포문도 열어주고 기회까지 주는구먼. 주 회장, 뒤통수가 얼얼하겠어. 허허.”
“하지만 문제도 있습니다. 인수 가격을 조금 올려야 합니다.”
돈 때문인지 진 회장은 웃음을 그쳤다.
“거, 오세현 그놈은 왜 쓸데없는 소리까지 해버린 거야?”
2조5천억.
미라클 인베스트먼트가 공개해버린 인수금액.
이 금액은 절대치가 되어 두고두고 순양의 발목을 잡을 것이다.
게다가 대현 그룹까지 2조3천억을 써내면 2조 원 밑으로 써내기는 힘들어진다.
특혜시비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2조 원 이상은 써야 채권단의 명분도 선다.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해외 투기자본이라는 걸 강조하려면 돈질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효과가 크니까요. 진짜 입찰자라면 그런 말을 할 리가 있겠습니까?”
“일단 최종 입찰 때까지 분위기 좀 보자고.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면 2조 원에 맞추고.”
“네. 그럼 전 홍보팀 불러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수고 좀 해.”
혼자 남은 진 회장은 날아갈 것 같은 가벼운 마음이었다. 늘그막에 똘똘한 손자 하나가 주는 즐거움 덕분에 10년은 젊어진 느낌이었다.
* * *
재벌순위 26위, 그룹 총자산 2조5천3백78억 원, 매출 1조4천9백25억 원의 삼미그룹이 겨우 11억1천9백만 원의 어음을 막지 못해 3월 19일, 최종부도처리 됐다.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것을 모르는 대한민국은 경제 위기보다 두 전직 대통령의 재판에 눈과 귀가 쏠려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둘 다 관심 없었다. 내가 신경 쓰는 것은 내일 있을 신입생 환영회였다.
입학식 이후 두어 번 수업에 들어갔지만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수능 인터뷰 때문인지 모두 나를 힐끔힐끔 쳐다봤고 끼리끼리 모여 쑥덕거릴 뿐, 내게 말을 거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심지어 선배들 몇몇은 강의실로 찾아와 내 모습을 구경하고 사라지기도 했다.
환영회에 가서 동기, 선배들과 말이라도 터야 나아질 것 같았다. 어차피 나를 모르는 사람은 없으니 작은 이벤트 하나를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다음날, 오후 늦게 학교에 도착해서 두어 시간 강의를 듣고 6시부터 시작하는 환영회 장소인 학생회관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법학과 학생 수는 400명에 육박하지만, 참석자는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매년 사법고시 합격자의 절반이 서울대다. 입학과 동시에 사법고시 하나만 바라보고 달리는 놈들이다 보니 학교 행사에 꼬박꼬박 참석하는 놈은 드물었다.
이벤트 준비를 좀 과하게 했나?
식당 구석 테이블에 자리 잡고 앉으니 주변 애들이 또 힐끔거린다. 내가 참석한 것이 의외였나 보다.
테이블 위에는 소주와 맥주, 음료수 몇 병이 보였고 가스버너위에는 냄비와 불판이 놓여 있었다. 삼겹살이라도 구워 먹으려나 보다.
소란스럽게 떠드는 곳은 선배, 어색함이 흐르는 곳은 신입생이었다.
내 머릿속에 재벌 3세의 기억만 있었더라면 이런 곳에 와서 어색하게 앉아 있었을까?
스스로에게 묻고 싶을 때 누군가 마이크를 잡았다.
“모두 반갑습니다. 저는 95학번…….”
3학년인 과 대표의 소개와 교수들의 인사말이 끝나자 신입생들의 자기소개가 시작되었다.
출신 고등학교와 선배와 동기들에게 각인할 수 있는 자신의 특징이나 별명 같은 것을 말하며 마이크를 넘겼다.
이때만 해도 좋은 시절이다.
신입생 대부분이 지방 출신이다. 서울 강남 부잣집 자식들이 명문대까지 독식하는 세상이 아니라, 개천에서 용 나고 지방 고등학교에서 상위권 성적이면 충분히 명문대에 진학 가능한, 그럭저럭 평등한 세상이다. 아직까지는.
내 차례가 돌아와 일어서서 마이크를 잡으니 학생 식당 전체가 얼어붙은 듯, 수군거림이 멈췄고 모두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머리를 꾸벅 숙여 인사를 한 다음 과 대표를 바라보며 말했다.
“선배님. 조금 길게 말해도 될까요?”
“응? 아… 그, 그래.”
“감사합니다.”
또 한 번 머리를 숙였다.
“이미 저를 아시는 분들도 많으실 겁니다. 운 좋게도 부자 할아버지를 둔 진도준입니다. 덕분에 쉽게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일부는 웃음을 지었고 일부는 무표정했다. 단지 돈이 많다고 해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다.
“저는 동기들, 선배님들과 스스럼없이 친해지고 싶은데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제 특기를 한번 살려볼까 합니다.”
특기를 살린다는 말에 모두 호기심을 확 드러냈다.
“선배님. 학교 동기들과 선배님들에게 조그마한 선물을 주는 것도 뇌물죄에 해당합니까?”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과 대표는 화들짝 놀랐지만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그, 그건 아니야. 뇌물은 대가성이 있느냐 없느냐인데 이 경우, 선배나 동기가 줄 수 있는 대가는 우정이라는 추상적인 무형의 대가뿐이거든.”
“그렇군요. 그럼 교수님께 값비싼 선물을 드린다면 뇌물죄가 성립합니까?”
교수들은 웃음을 터트렸고 한 교수가 소리쳤다.
“아쉽지만 성립해. 교수는 학점이라는 무기를 쥐고 있거든. 학점은 추상적인 게 아니라서 말이야. 하하.”
“다행입니다.”
식당 안에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이제 학생들도 선물이라는 단어 때문에 기대에 찬 눈빛으로 변했다.
나는 웃으며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모두 또 한 번 놀랐다.
재벌 3세면 당연히 휴대전화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대학 신입생이 휴대전화를 들고 다니는 건 아직 낯선 시절이기 때문이다.
재빨리 삐삐 번호를 누르고 기다렸다.
식당 입구에 정장 차림의 사내들이 상자가 가득 쌓인 카트를 밀고 들어왔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 특기는 할아버지께 배운 겁니다. 선물로 환심을 사는 것. 그리고 선물은 항상 기대 이상의 것을 준비할 것.”
사내들이 상자 하나씩 학생들에게 전하자 모두 비명 같은 탄성을 내질렀다.
“이건 다음 달에 출시할 순양 노트북입니다. 펜티엄 MMX급이고 인텔 칩을 장착했습니다. 램은 128메가, 하드 용량은 무려 6기가입니다. 8배속 CD-ROM도 달려있….”
내 설명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 노트북 박스를 뜯기 바빴고 교수들까지 구경 하느라 정신없었다.
할 수 없이 마이크를 내려놓고 이 흥분의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 # #
“뭐? 신형 노트북 200개?”
“네.”
“이놈아. 그게 얼만 줄 아느냐?”
“판매가가 대략 3백만 원대니까 6억쯤 되겠네요.”
“그걸 애들에게 나눠준다고? 단지 환심 좀 사려고?”
할아버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놀란 눈으로 나를 흘겼다.
“환심도 사고, 내 편으로 만들고… 또 엄청난 광고도 하고요.”
“뭐라? 광고?”
“대한민국 최고의 인재 집합소, 서울대 법대생이 들고 다니는 노트북. 학교 안에 소문이 쫙 퍼질 겁니다. 직장인만 들고 다니는 게 아니라 대학생도 가질 수 있는 노트북이라는 이미지가 박히는 거죠.”
할아버지는 내 의도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것만으로 광고가 되긴 힘들다. 어차피 학교 안에서만….”
“후속타를 쳐야죠.”
“후속타?”
“개발이 늦어져서 신학기 타이밍을 놓쳤잖아요. 대학생 특별 할인, 아카데미 이벤트를 하는 거죠. 서울대를 배경으로 광고도 좀 찍고요.”
할아버지의 머릿속에는 이미 서울대의 상징인 정문이 드러나는 광고 이미지를 그리고 있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결정타를 날렸다.
“아까우시면 제 돈으로 살게요. 6억 정도는 제게 푼돈이라는 거 아시잖아요.”
“이놈이! 이 할애비를 쪼잔한 사람으로 만들어?”
눈을 한번 부라리더니 다시 온화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런데 도준아. 왜 200대뿐이냐? 법학과 전부 400명쯤 되는 거 아니야?”
“신입생 환영회 참석은 절반 정도라고 들었어요. 참석한 사람만 줘야죠.”
“그건 왜지?”
“차등이죠. 참석한 사람, 불참한 사람. 똑같을 순 없으니까요. 불참한 놈들은 이마를 치며 후회하게 만들어야죠. 보상은 늘 날 따르는 사람만 얻을 수 있다는 걸 확실하게 심어줄 겁니다.”
할아버지는 무릎을 탁 쳤다.
“바로 그거야! 말을 움직이려면 채찍보다 당근이 효과적이야. 으허허.”
* * *
신입생 환영회는 역대 어느 때보다 흥겹게 흘러갔다. 행여나 노트북을 잃어버릴까 봐 술을 절제하는 것도 느껴졌다.
그리고 김윤석 대리는 내게 조용히 다가와 메모를 건넸다.
내 선물을 거부한 놈들의 명단이었다.
이들은 한 번쯤 눈여겨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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