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54
“뭔 소리야? 오백억이라니? 주식 다 던져주고 천억 받아오기로 했잖아.”
“아진 주가가 폭락하니까….”
“됐고, 다 달라 그래. 내 돈 달라는데 뭔 말이 많아?”
진 회장의 일갈에 이학재는 입을 닫았다.
여러 이유를 들어 어려움을 호소하며 회장을 설득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다. 아랫사람은 설득이라 생각하지만, 윗사람은 변명으로 여길 뿐이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빨리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똘똘한 애들 좀 추려. 주총 끝내고 아진자동차 회계장부를 현미경처럼 들여다볼 수 있는 놈들로 구성해.”
“이미 준비해뒀습니다. 임시주총 때 분명 대현 그룹에서도 총회꾼을 보낼 겁니다. 그것 역시 대비책을 강구하겠습니다.”
진 회장이 만족스럽다는 듯 머리를 끄덕일 때 노크 소리와 함께 순양자동차 사장과 임원들이 문을 열었다.
“6년 전, 아진자동차 자료 만들 때처럼 고생 한번 더해야겠다.”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기도 전에 회장의 폭탄선언을 듣자 모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회장님. 설마 아진자동차를 인수할 계획이십니까?”
“이미 아시겠지만 우린 자금 여력이 없습니다. 인수금 지불을 미룬다 하더라도….”
임원들은 회장님이 무모한 선택을 하는 건 아닌지 걱정부터 앞섰다.
“아니. 우리가 인수하는 게 아니라 대현으로 굴러 들어가는 걸 막는 것뿐이다.”
“대현을 막으면 누가 인수하는 겁니까? 설마 우성자동차를 생각하시는지…?”
“우성은 미국 자본이 많습니다. 가능성이 없습니다.”
난처한 표정의 임원들을 보며 진 회장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너희들이 아는 걸 내가 모를까?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 하고 시키는 일이나 확실히 해. 일주일 준다.”
일주일이라는 소리에 순양자동차 경영진은 조금도 지체 없이 벌떡 일어났다. 1초도 낭비할 시간이 없을 만큼 촉박했다.
“다들 알겠지만, 노파심에서 말하는데… 이 일, 밖으로 새어나가면 줄초상 날 거다. 그리고 조대호야.”
“네. 회장님.”
“송현창 회장한테 막걸리 한 사발 마시자고 해라. 내가 할 말 있다고.”
조대호 사장은 의문을 품었으나 머리를 숙였다. 두 회장이 만나 할 이야기가 있을까? 있다면 어떤 내용일까?
서재에 있던 사람들의 공통된 의문이었다.
* * *
나를 바라보는 오세현의 눈빛에 담긴 기대, 다행히 그 기대를 충족할만한 대답을 들고 있다.
“할아버지와 이야기는 잘 됐어?”
“네. 풀 서포트 해주실 겁니다. 주식 넘겨받고 곧바로 관계자들 미팅하시면 됩니다.”
“하시면? 넌 빠진다는 말이야?”
“빠져야죠. 제가 나타난다는 게 우습지 않겠습니까? 누가 보더라도 전 신뢰도 제로인 애잖아요.”
“그게 전부야? 다른 이유는 없어?”
“재벌가는 보는 눈이 많습니다.”
내부의 적도 많습니다. 그들의 눈길은 피해야죠. 이 말은 하지 않았다. 아직 최종 목표를 말할 때는 아니다.
“음, 하긴…. 네가 나선다면 입 달린 사람 전부 네 할아버지 돈이라고 생각하겠지.”
“이제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아진자동차 최종 부도나기 전에 현황 파악을 끝내야 하니까요.”
“나도 우리 회사 회계사들 전부 준비해뒀다. 이미 공개된 자료는 검토 중이야.”
오세현의 흥분이 전염됐는지 나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두려움일지도 모른다.
과연 아진자동차라는 거대 기업을 내 손에 넣을 수 있을까? 내 능력 밖의 일을 벌인 건 아닐까?
이미 벌어들인 수조 원의 돈. 그 돈이면 황제 못지않은 인생을 즐길 수 있다는 유혹이 단 하루도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밤 꾸는 그 악몽이 나를 다잡는다.
그리고…. 꼭 악몽 때문만은 아니다.
전생에서 그렇게 꿈꿔왔던 인생, 마르지 않는 샘 같은 돈으로 즐거움과 쾌락을 좇는 삶보다는 매시간 치열하게 쟁취하는 삶이 더 목마르다.
차례차례 적을 제거하고 나만의 성을 쌓아가는 인생. 그 끝을 한번 보고 싶다. 어쩌면 허무함만이 기다리는 끝일지라도.
“야, 무슨 생각 하는 거야? 갑자기 왜 말이 없어?”
“아,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게 생각나서요. 주식 인수할 때 할아버지 비자금 천억 다 내주세요.”
“뭐? 야! 겨우 반으로 깎았는데 그걸 왜 다 줘?”
발끈할만하다. 한두 푼도 아니고 오백억이라는 거금을 굳혔는데 말 한마디로 다시 잃어버리게 생겼으니.
“죄송한데 어쩔 수 없어요. 제가 약속했습니다. 그리고 절 위해서 할아버지가 가진 힘 다 쓰시겠다는데 저도 다 드려야죠.”
“너 혹시 미라클 인베스트먼트의 대주주라는 말 않았어? 네가 소유주라는 말 빠트린 거야?”
“아뇨. 했죠. 그걸 말하지 않고 어떻게 도움을 청해요?”
“그런데도 전부 다 달라고 하셨다고? 오백억을 합법적으로 상속할 좋은 기회인데도?”
“그런 식으로 비자금을 넘겨줄 분이었다면 순양그룹은 이미 큰아버지 손에 들어갔을 겁니다.”
“어이구. 이런 독한 놈들을 봤나? 있는 놈들이 더 하다더니….”
어처구니없어 무심결에 뱉은 말이지만 실수했다는 걸 알아챈 오세현이 급히 말을 멈췄다.
자신이 말한 놈들이 바로 우리 집안이기 때문이다.
“그러게요. 그런 독한 놈들 틈에서 제가 살아남아야 합니다.”
오세현은 씁쓸히 미소 짓는 내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 * *
“갑자기 말을 바꾸시면 어떡합니까?
“이거 원, 쪽팔려서… 오 대표 보기 민망합니다.”
“이유가 뭡니까? 한 입으로 두말하실 분은 아니신데.”
”월급쟁이가 말 바꾼 이유가 뭐겠어요? 위에서 까라니까 가는 겁니다.“
“이런, 이런. 하하.”
오세현은 이학재의 솔직함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거, 죄송합니다. 실장님의 이런 모습… 너무 의외라서요. 이제 실장님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럼 지금까지는 어떻게 보셨다는 말입니까?”
오세현은 뒷목을 슬슬 긁으며 웃었다.
“터미네이터…….”
“뭐요? 으하하.”
이학재는 오래전 봤던 영화를 떠올리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그렇게 생각한 거요?”
“터미네이터는 오로지 임무 완수만 생각하도록 프로그래밍 된 거 아닙니까? 감정이 개입하지 않아요.”
“그 정도였소?”
“지금까지는.”
“그럼 이제 기계가 아니라 인간으로 보이는 게요?“
“아직은 좀 부족한데… 아, 적당한 단어가 있습니다. 순양전자의 광고 카피죠? 휴먼테크.”
농담을 쏟아내는 오세현의 반응에 이학재는 예상보다 쉽게 문제가 풀릴 것 같아 한결 가벼워졌다.
“자, 내 편의 한번 봐주겠습니까? 그럼 그에 걸맞은 보답 꼭 하도록 하죠.”
“전 말로 하는 약속을 믿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겠소? 각서라도 써야 합니까?”
“예외도 있으니까… 한번 믿어보겠습니다.”
이학재는 오세현이 의외로 쉽게 받아들이자 오히려 의심마저 들었다. 그의 눈빛으로 알아차린 오세현은 혀를 찼다.
“좀 믿으며 삽시다. 저처럼요.”
웃으며 말하는 오세현에게 이학재는 갑자기 손을 내밀었다.
“고맙소. 내가 날 믿는 사람의 뒤통수를 수없이 쳤지만 오 대표는 그럴 일 없을 겁니다. 뒤통수 치기 전에 최소한 경고는 하죠.”
내미는 손을 잡는 오세현은 기가 막혔다.
이게 이 사람이 사는 방식인가 싶어 측은한 마음마저 들었을 정도였다.
“자, 그럼 임시주총부터 준비합시다. 필요한 건 우리 순양이 다 준비할 테니 오 대표는….”
“제가 할 일은 이미 다 준비했습니다. 번개처럼 해치우죠.”
마주 잡은 두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 * *
진 회장의 저택에서 두 대의 승용차가 조용히 빠져나와 북한산으로 향했다.
앞선 승합차에는 경호원들이, 뒤따르는 세단에는 진 회장이 타고 있었다.
단 한 번도 남을 위해 움직인 적이 없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세상 끝까지 달려가지만, 남을 위한 일이라면 서재로 불러들였다.
오늘은 손자를 위해 처음으로 몸을 낮춘 것이다.
진 회장은 며칠 전 손자 도준과의 대화를 생각하며 연신 벙긋거렸다.
# # #
“송현창 회장,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어떻게 생각하냐니?”
“이를테면 경영인으로서의 능력이나 자질 같은 것 말입니다.”
“팔이 짧다.”
“손 닿는 곳이 몇 개 안 된다는 뜻인가요?”
진 회장은 손자를 따스하게 바라봤다. 겨우 스무 살에 불과한 놈이 어찌 이리 말귀를 잘 알아듣는지 신기할 뿐이다.
이십 대와 칠십 대의 언어는 다르다. 오래 산 세월만큼 쌓인, 듣고 보고 경험한 것이 언어에 묻어 나온다. 그 낱말들을 이용해서 가장 적절한 비유와 표현을 한다.
그걸 찰떡같이 알아듣는 어린 손자의 영민함이 기가 막힐 정도다.
“자동차 하나와 자동차에 필요한 회사 너댓 개가 그 친구의 한계야.”
“그 이유는 뭘까요?”
“성공한 자의 자부심이 자만으로 바뀌고 고집으로 변해버렸어.”
“다른 이의 의견을 듣지 않는군요.”
“옳지. 바로 그거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을 무시하는 거야. 네까짓 게 뭔데? 나만큼 성공했어? 네가 나보다 더 똑똑하다면 왜 내 밑에서 일하지? 이런 생각을 지우지 못한 거야.”
“설마 그 정도일까요? 한 고조 유방(劉邦)이 한신(韓信) 같은 장수를 거느렸던 것만 생각해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교훈 아닙니까?”
“나도 그렇다.”
“네?”
진 회장은 고개를 갸웃하는 손자를 보며 말했다.
“나도 이 실장이나 계열사 사장들이 내 의견을 반대하면 욱하는 게 올라와. 사람이니까. 하지만 꾹 참고 견디는 거야. 이유를 아느냐?”
“할아버지를 위해서 하는 말이어서요?”
“그래. 내 것인 순양그룹을 더 키우고 더 많은 돈을 벌게 해주려고 하는 충언 아니냐? 하지만 송 회장은 다르다. 아진그룹은 송 회장 것이 아냐. 겨우 아진자동차 주식 2%만 쥐고 있지. 노조가 14%를 쥐고 있는데도 말이다.”
“아진그룹이 자기 소유라는 인식이 없으니까….”
“그렇지. 남의 것이니까 자기 마음대로 굴려보고 싶은 거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더라도 말이야.”
진 회장은 말귀를 쏙쏙 알아듣는 손자가 기특할 뿐이었다.
“참, 그런데 송 회장은 왜? 그게 아진자동차 인수와 관련 있니?”
“아, 네. 사실 아진자동차를 인수 후에 어떻게 할까 생각해봤는데요.”
진 회장은 손자가 내놓는 말을 한 자도 빠트리지 않고 주의 깊게 들었다. 손자의 말이 끝났을 때 집무용 책상을 탁하고 두드릴 만큼 감탄했다.
“그거 참 절묘하다. 어찌 그리 기특한 생각을 했을꼬!”
“그래서 할아버지께서 송 회장을 한번 만나서 이 계획을 알려주고 적극적인 협조를 부탁하는 게 어떨까 해서요.”
“오냐. 아진그룹을 우리 손자가 가지겠다는데 그 정도 수고도 못 하겠느냐? 염려 말거라. 허허.”
# # #
“아이고, 송 회장. 이거 사람 잡으려고 작정했나? 하필이면 이런 곳인가?”
“회장님께서 막걸리 한 사발 하자고 하셨으니…. 여기 막걸리가 일품입니다.”
“건강 자랑하려고 여기로 정한 건 아니고?”
진 회장은 등산로 초입에 자리 잡은 작은 파전집을 휘휘 둘러보며 투덜거렸다. 이미 손을 썼는지 가게 안은 텅 비었다.
등산복 차림의 송현창 회장은 이미 등산을 끝낸 듯 물수건을 여러 장 쌓아 놓고 있었다.
“바로 아래까지 차 들어옵니다. 고작 백여 미터 남짓 걸으셨을 텐데, 운동 좀 하시고 건강도 챙기셔야죠. 남의 물건 뺏는 재미만 찾지 마시고 말입니다.”
“이제 그럴 힘도, 마음도 없어. 너무 타박하지 말게.”
뼈있는 송현장 회장의 말을 슬쩍 흘려버린 진 회장은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송 회장.”
“말씀하십시오.”
“내 미리 경고 하나 하지.”
물수건으로 목을 닦던 송 회장의 손이 멈칫했다.
“여기 막걸리 맛없으면 술상 엎어버리고 갈 걸세.”
어떤 제안을, 무슨 협상을 할지 모르지만 반대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복도 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송현창 회장은 물수건을 내려놓고 막걸리 뚜껑을 돌렸다.
“혼자 마시는 술, 익숙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순양그룹이라고 해도 쉽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주는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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