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69
이학재 실장은 진 회장의 웃음에 고개를 갸웃했다.
“회장님. 오세현 대표는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그자는 그의 회사가 가진 달러의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 겁니다.”
“이 실장. 오세현이가 주인이야?”
“네?”
“내가 말했지? 주.인.장. 이랑 친하다고. 오세현이는 그냥 마름이잖아.”
마름은 지주의 대리인일 뿐, 당연히 지주는 따로 있다. 주주와 투자자가 바로 주인이다.
“회장님. 설마…?”
차마 누구도 말하지는 못했지만, 서재의 모든 이들은 미라클이 혹시 진 회장의 회사인지 확인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뭐야? 그 눈빛들은? 오해하지 말라고. 내 돈 아냐. 그 정도 달러를 내가 어떻게 모아? 당신네들이 일을 열심히 안 해서 내 주머니가 텅텅 비었는데. 아냐?”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두 엉거주춤할 때 진 회장이 책상을 탕 두들겼다.
“됐어. 모두 나가 봐. 내 지시사항 절대 빠트리지 말고 철저히 챙겨.”
이학재 실장은 잠시 회장과 눈이 마주쳤지만 가볍게 끄덕이는 고개가 자신도 포함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서재를 나오는 이학재는 그때까지 사라지지 않은 진 회장의 미소를 확인했다.
# # #
분위기가 색다르다.
위기 때문에 대책 회의를 했다면 잔뜩 얼어붙은 표정이어야 하는데 꽤 밝은 얼굴이다.
역시 재계 1위의 순양그룹이라 자금력이 탄탄해서일까?
이학재 실장이 마지막으로 빠져나오는 것을 확인하고 서재로 들어갔다.
“아이고, 주인장 오셨소? 허허.”
“네?”
주인장? 내가?
설마 오늘 긴급회의에서 날 후계자로 지목한 것일까?
절대 그런 일 없었겠지만 괜한 상상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우리 손자, 미라클 주인장 아니신가? 오늘은 할아버지, 손자로 만나는 거 아니다. 두 주인끼리 중요한 이야기 한번 해보자.”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무섭게…….”
“어디서 엄살이냐? 얼굴에 다 쓰여있다. 재미있어 죽겠다고.”
내 표정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표정이 바로 그렇다.
협상은 긴장과 초조함의 미학이다.
재미는 이미 협상의 여지가 없을 만큼 우위에 선 사람의 몫이다.
할아버지와 나, 두 사람 모두 우위에 서 있는 게 아닌 건 틀림없으니 우리 둘 다 히든카드가 있다는 소린데… 내 카드는 알지만, 할아버지의 카드는 모른다.
도대체 뭘까? 외환 위기가 시시각각 다가오는데 어째서 이런 여유를 보일까?
“그런데 중요한 이야기는 뭔가요? 두 자동차 회사 합병 지분 비율 말씀하시려고요?”
“아, 그것도 있었네. 그건 나중에 하자. 더 중요한 게 있거든.”
더 중요한 게 뭘까? 정말 순양그룹 승계문제일까?
하지만 나만의 행복한 상상은 짧게 끝났다.
“너 아진그룹 인수대금 준비했냐?”
“준비랄게 뭐 있나요? 해외 계좌에서 국내 계좌로 옮기면 되는데요.”
“당연히 달러겠네?”
달러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 할아버지의 눈이 반짝이는 걸 놓치지 않았다.
그렇군.
외환 위기를 대비한 달러 확보.
순양그룹과 할아버지에게는 이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네. 미국 은행에 있으니까 달러죠.”
“그거 내가 바꿔주마. 1조 2천억. 맞지?”
“네.”
“지금 환율이 1,200원쯤 하니까, 보자……. 딱 10억 달러네?”
“네. 맞습니다.”
“내일이라도 당장 옮기자.”
“싫습니다.”
“뭐?”
“복잡하잖아요. 그냥 채권단 은행에 주면 되는데 뭐하러 이리저리 돌려요?”
생긋 웃는 내 모습을 할아버지는 기가 찬 듯 쳐다보기 시작했다.
“너 혹시…?”
“네. 저도 눈 있고 귀 있습니다. 달러가 계속 오르는 중이죠. 어차피 순양, 아진 자동차의 합병이 마무리돼야 채권단이 인수 승인서에 사인 합니다. 대금 지급은 그 이후고요. 제 입장에서는 천천히 지불하는 게 이익이죠.”
노친네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게 좀 귀엽기까지 했지만 살아온 인생의 결이 다르다. 순식간에 차분해지며 옅은 웃음까지 보인다.
“그렇지. 그렇게 나와야 내 손자지. 암, 이제야 좀 재미있어지는구나. 허허.”
재빨리 머리를 굴려야 할 시간을 웃음으로 번다. 능구렁이 같은 영감!
그리고 이어지는 제안.
“1,500원 쳐주마. 어떠냐?”
“조금 더 쓰시죠.”
“이런 날강도 같은 놈. 좋다. 1,600원.”
“어림도 없습니다.”
“이놈아. 네가 지금 모은 그 달러, 내가 사준 목장 팔아서 살붙이고 옷 입힌 돈 아니냐. 그걸 잊은 게냐?”
“그건 거래였죠. 전 어린 시절 내내 열심히 공부해서 전 과목 백 점 맞아 할아버지께 기쁨을 드렸고 그 보답으로 목장을 받았습니다. 목장 구입하는 데 몇천만 원 쓰신 걸로 아는데, 몇천만 원으로 그 정도 기쁨을 샀다면 합당한 거래였어요. 할아버지에게 몇천만 원은 일반서민으로 친다면 몇만 원 아닙니까?”
“햐-! 고거 참 독한 놈이로세. 그걸 다 기억하느냐?”
할아버지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십 년 전 일을 들춰내신 건 할아버지세요.”
“이거, 내가 말린 것 같은데…. 좋다. 얼마 쳐줄까? 네가 말해 보아라.”
“황금보다 귀하신 몸이 될 달러를 휴지 쪼가리가 될 원화로 사시려니까 저울이 안 맞죠. 저울추에 다른 걸 올리세요.”
“뭐라? 휴지?”
지금껏 옅은 미소를 잃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표정이 싹 변했다.
“환율이 얼마나 뛸 거라고 생각하길래 휴지라고 하는 게냐?”
“달러가 없어서 못 구하시니까 제게 이런 말씀하신 거 아니세요? 돈 주고도 못 산다면 그 돈이 휴지죠 뭐. 돈의 역할을 못 하는 원화, 휴지 아닐까요?”
할아버지는 표정을 풀지 못하고 책상을 톡톡 치기 시작했다.
너무 심했나?
할아버지의 근심이 느껴지자 마음이 약해진다.
적당한 수준에서 달러 지원을 좀 해드려야 하나?
이, 이런…. 지금 무슨 생각을?
두 번 다시 오기 힘든 이 기회를 그깟 정 때문에 버릴 수는 없다.
이를 악물었다.
마침내 할아버지가 조용히 말했다.
“이 나라에 달러가 없다는 건 어떻게 알았느냐?”
“언론이죠.”
“뭐? 언론?”
“네. 온갖 위험신호가 언론에서 쏟아지잖아요. 알만한 사람은 다들 대책 세우려고 하겠지만… 이미 늦은 것도 알겠죠.”
“언론은 자극적인 걸 좋아하지. 좀 과장된 면이 크다.”
리스크를 피부로 느끼면서도 저런 말을 한다는 건 내 머릿속을 알고 싶은 거다.
“할아버지. 진실은… 이를테면 시집 같은 겁니다.”
“시집?”
“네. 늘 새로운 시집이 출판되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시집을 읽지 않잖아요. 하지만 많은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선문답처럼 대답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대답은 나이 드신 분들이 좋아한다.
“맞는 말이다. 진실은 힘이 세지만 못 읽거나 외면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지.”
머리를 끄덕인 할아버지는 미소를 되찾았다.
“좋다. 그럼 내가 저울에 뭘 올려야 균형이 맞을까?”
먼저 대답하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물에 빠진 건 순양그룹이고 구명조끼는 내 손에 들어있다.
물이 가슴을 넘어 코밑까지 차오를 때, 충분한 공포를 느꼈을 때, 그리고 주머니에 든 황금 덩이를 던지기 시작할 때 구명조끼를 건네면 된다.
“합병 비율 협상을 테이블에 올려놓을게요. 원샷으로 정리할까요?”
“합병 비율?”
이 단어 속에 들어있는 두 개의 뜻을 한 번에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했다.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곧바로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실 분이다.
“이, 이런…. 요놈 보게나. 아주 뱃속이 시커먼 놈이었구나!”
‘철면’이라는 별명이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간이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온갖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게 여실히 드러났다.
합병할 때 순양그룹의 지분을 순양자동차에 듬뿍 올리고 합병 비율은 내게 유리하게.
이 두 가지를 정확히 이해하신 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다면 뱃속 시커멓다는 표현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커먼 게 아니고 협상 테이블에 꺼낼 수 있는 합리적인 요구라고 생각하는데요?”
“고놈 참, 말은 참기름 바른 듯 번드르르 하지만 욕심이 맞다.”
말 속에 숨은 본질을 내 앞에 들이밀어 버리니, 너저분한 변명은 필요가 없어져 버렸다.
“세상에 욕심 없는 인간이 어디 있습니까? 남의 욕심 달래가며 내 욕심 채우는 게 장사고 사업 아니겠습니까?”
“오호!”
“그리고 욕심이란 게 어차피 욕먹을 짓인데 이왕 욕먹는 거 큰 욕심 부리겠습니다.”
할아버지 입술이 실룩거린다.
어떤 말이 나올까.
“넌 참 효자, 아니 효손이다. 허허.”
“당연하죠. 지금껏 기쁨만 드렸지 않습니까? 어릴 때는 공부로 즐겁게 해 드렸고 다 커서는 꼭 필요한 돈까지 준비했으니까요. 이만한 손자, 어디 가서 찾기 힘듭니다.”
분위기를 반전시키려 조금 능글맞게 말했지만, 할아버지는 오히려 웃음을 거둬버렸다.
“그렇기도 하다만 넌 더 큰 걸 내게 줬다.”
“……?”
“순양이 계열사를 거느리고 그룹이 되는 순간부터 내게 맞서는 놈이 없었어. 전부 굽신거리며 내 것을 얻어가려 했을 뿐이다. 철저히 준비한 다음 두 주먹 불끈 쥐고 내 것을 빼앗겠다고 덤비는 놈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더구나.”
설마?
칠순이 넘은 나이에 다시 불타오르는 걸까?
그것도 손자를 상대로?
“내가 인심 좋게 내 것을 나눠주기는 할망정 뺏기지는 않는다.”
“할아버지. 설마 더 큰 것이라는 게…. 그건 아니겠죠?”
“맞다. 다 죽어가던 불씨 한번 살려 볼 생각이다. 한번 해보자꾸나. 누가 이기는지.”
“할아버지! 전 피를 이은 손자라고요!”
“그러니까 더 재미있지 않겠느냐? 할애비와 손자의 싸움. 이거, 말하고 나니 조금 민망하기는 한데…. 뭐 어때? 재미있는데. 으허허.”
진담인지 농담인지 아리송하지만, 기분 좋게 막 퍼주는 일은 물 건너갔다. 어차피 그 정도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자, 달러 많이 쥔 주인장아. 제안은 내가 먼저 하마.”
“…네.”
최대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손자의 슬픈 표정도 할아버지에게는 치명적인 무기가 된다.
“합병 비율, 순양자동차에 얹어줄 계열사 지분은 내가 정하고 넌 그냥 받아들여라. 어쩌면 내가 주는 게 네가 싸워서 얻는 것보다 훨씬 많을 수 있다. 난 네 할아버지 아니냐? 손자한테 야박한 할아버지는 없는 법이다. 어떠냐?”
젠장, 이 영감에게는 치명적인 무기 따위는 없다.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듯이 전 효손입니다.”
“그 말은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렷다?”
“효손은 할아버지의 기쁨을 없애지 않습니다.”
할아버지의 얼굴에 웃음꽃이 활짝 폈다.
“그렇지. 싸워보지도 않고 항복하는 놈은 사내가 아니지. 첫 제안은 거절하는 게 당연하다.”
“두 번째 제안도 있으십니까?”
“있기는 한데 제안은 아니다. 보통 이런 건 협박이라고 하지. 협박을 받으면 첫 제안을 왜 거절했을까 후회하게 될 게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도대체 무슨 협박일까?
협박당할 일은 아직 없다.
“내 제안을 거절했으니 순양자동차와 아진자동차의 합병은 없을 게야. 내일 아침, 조대호 사장이 기자 회견을 할 거다. 아진그룹 인수대상자인 미라클에서 상식을 벗어난 요구가 많아 합병은 무산이다.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 뭐 이 정도?”
이 양반은 아직 외환 위기의 크기를 정확히 모른다.
내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질 곳은 기업뿐만이 아니다. 은행 역시 마찬가지다.
대마불사를 너무 믿는 건가? 은행만은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금융기관 중 하나인 고려증권 부도가 뭘 의미하는지 눈치챌 만도 한데 말이다.
긴장이 확 풀렸다.
“협박치고는 좀 약한데요?”
이제 할아버지의 당황하는 표정을 감상할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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