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75
“야…. 이거 귀하신 분도 시험은 어쩔 수 없나 보네?”
“그러게.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만 칼같이 학교 오는 거 봐.”
수차례 통화했고, 이름과 얼굴을 아는 동기 몇몇이 나를 발견하자 아는체하며 모여들었다.
“학사 경고받으면 좆 돼. 난 페널티가 무시무시하거든.”
“페널티? 무슨 페널티?”
“학교생활 더듬더듬하면 우리 할아버지가 주식 안 준다고. 큰일 나는 거야.”
“주… 주식?”
“그래. 학점 빵구보다 더 무서운 주식. 흐흐.”
농담이라는 걸 명확하게 알려주기 위해 웃음까지 웃었지만, 이놈들은 진심으로 받아들였나 보다. 웃음기 없는 얼굴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F 학점 하나에 수억 날아가는 거야?”
“아니지. 수십, 수백억 아냐? 회장님 지분이라면 지주사 지분 아니겠어?”
아이고, 애새끼들…. 이걸 또 진지하게 받아들이다니.
일반인에게 재벌은 판타지 같은 존재일까? 현실성 없는 이야기일수록 더 믿는 듯하다.
“야! 그만! 시험 끝나고 이야기하자.”
주변의 동기들을 쫓아내고 책을 펼쳤다.
목차를 쭉 훑으며 생각을 가다듬었다.
어차피 엉뚱한 답을 쓰게 될 건 뻔하지만, 논리의 일관성만 갖추고 쓰면 된다.
그리고 백지만 아니면 된다. 적당히 답안지를 채우면 C나 D 학점은 받을 것이다. 나 때문에 순양 장학재단에서 받는 장학금이 얼만데?
시험 첫날이 끝나자 애들 몇몇이 또 몰려왔다.
“도준아. 맥주나 한잔 할래?”
“내일 시험은? 포기했냐?”
“간단히 한 잔만 하는 거지.”
서울대도 별수 없다.
내가 다녔던, 소위 듣보잡 대학에서나 시험 기간에도 술 처먹는 애들이 있는줄 알았는데 명문대라는 곳도 사람 사는 곳이다.
“아까 말했지? 내겐 주식이 달려있다고! 시험 끝나고 종강파티 때 한잔하자. 내가 쏠게. 됐지?”
내가 쏜다는 말에 요놈들 눈빛이 변했다.
“야야! 너무 기대하지 마라. 딴 거 없어. 소주나 맥주 말하는 거다.”
“주종은 둘 중 하나지만 양은 무제한 아냐?”
기다렸다는 듯, 한 놈이 되묻는다.
아차, 이놈들 이제 1학년이지.
돈 걱정 없이 양껏 마실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워할 나이다.
“그래. 무제한이다, 인마. 흐흐.”
* * *
요 새끼들. 아예 뽕을 뽑으려고 작정한 것 같다.
기말시험이 끝나고 애들에게 끌려간 곳은 바로 학교 앞 제일 큰 호프집이었다.
이미 빈 좌석이 없을 만큼 꽉 찼고 드문드문 선배들도 보였다.
그나마 나와 격의 없이 말을 나누는 애들이 같은 테이블에 앉았기 때문에 어색함은 많이 줄어들었다.
“자자, 우리도 주문하자. 도준아. 뭐 먹을래?”
“야! 도준이가 이런 데 와봤겠냐? 그냥 알아서 시켜.”
이런 곳? 수도 없이 다녔다.
돈이 없어 마음 놓고 안주를 시키지 못한 적이 한두 번이던가?
그때를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났다.
이왕 사는 거 먹고 싶어도 못 먹었던 것, 그걸 요놈들에게 먹여야겠다.
손을 들어 아르바이트생을 급히 불렀다.
“다른 테이블에서 술 시켰어요?”
“네. 삼천으로 통일해서 시켰는데요?”
“그거 취소하고 병맥주로 쫙 깔아요.”
“네?”
“뭐?”
알바보다 동기 놈들이 더 놀란다.
“간만의 술자린데 쏠 때는 확실하게 쏴야지. 쪼잔하다는 소리는 들을 수 없잖아.”
슬쩍 웃으며 말하자 같은 테이블의 놈들 입이 찢어졌다.
“야! 도준이가 병맥 쏜 데!”
한 놈이 벌떡 일어나 외치자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곧이어 터지는 함성.
그래. 돈 없는 어린놈들에게 병맥주만 한 고급술이 있을까?
“도준아. 카프리 마셔도 돼?”
누군가 크게 외쳤다.
카프리? 아…. 그 노란색, 밀러 짝퉁 같은 느낌의 눈으로 마시는 맥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카프리도 병맥주잖아. 뭐든 마셔.”
기분 좋은 미소가 저절로 나왔다.
약간의 사치만으로도 기분 좋아지는 젊은 시절.
가끔은 이들과 어울리며 이런 소박한 즐거움을 놓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참, 안주 시켜야지.”
난 메뉴판을 들고 안주 리스트를 쭉 훑었다.
오케이. 눈에 띄는 음식 사진이 몇 있다.
손을 번쩍 들었다.
“여기요!”
알바가 총알 같이 달려왔다.
“일단 카프리 여덟 병 줘요.”
같은 테이블에서 눈만 깜빡거리는 애들을 무시하고 다시 메뉴판을 들어 안주를 짚어 나갔다.
“안주는… 보자…… 쏘야 하나, 골뱅이 무침에 소면 사리…. 아, 노가리도 하나.”
메뉴판을 덮자 알바가 받아적은 메모지를 확인했다.
“카프리 여덟 병, 쏘야, 골뱅이, 노가리. 맞죠?”
“네. 아, 잠깐만요. 혹시 마른멸치와 고추장, 서비스됩니까?”
“네. 물론입니다.”
넋 놓고 있던 동기 중 한 놈이 정신을 차리고 다급히 외쳤다.
“치킨도 시켜!”
“오케이. 양념? 후라이드?”
“후, 후라이드.”
알바가 고개를 까닥하고 돌아가자 애들이 참았던 입을 열었다.
“뭐냐? 너도 이런데 다녀? 잘 아네?”
“재벌 3세가 호프집이라니! 그림이 안 나오잖아, 인마!”
갑자기 궁금해졌다. 또 다른 재벌 3세인 내 사촌들도 호프집을 다녔을까? 소주 집에서 오뎅탕 국물 하나 시켜놓고 술잔을 기울인 적이 있을까?
“자주 다닌다. 가족끼리 투다리 가서 고치 먹기도 하고, 사촌들하고 찌게 하나 앞에 두고 소주도 마셔. 우린 뭐, 매일 호텔 레스토랑이나 비싼 전문 레스토랑만 다니는 줄 알아?”
동기 놈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집에서 밥 먹을 때도 매끼 12첩 수라상 같은 거 안 먹어. 그냥 국, 찌개, 반찬 놓고 밥 먹는다고. 별다른 거 없어.”
근본이 서민인 내가 서민 코스프레 하는 것쯤이야 쉽다.
이 기회에 재벌 3세 이미지도 세탁하니 일거양득이었다.
맥주를 빠르게 비워나가고 병맥주를 몇 병 더 시켰을 때 선배 몇 명이 슬며시 다가왔다.
나야 누군지 모르니 눈만 깜빡거릴 때 동기 놈들이 벌떡 일어나 머리를 숙였다.
“이거 졸업할 선배가 꼽사리 껴서 미안하다.”
“아닙니다. 선배님.”
4학년이라고 말하니 나도 벌떡 일어났다.
졸업반이 종강했다고 돌아다니는 걸로 봐서는 취업을 준비하는 게 틀림없다.
판검사가 목표라면 365일 법전에 묻혀 사는 게 정상이다.
“자리 좀 빌리자. 잠깐이면 돼.”
표정을 보니 심상치 않다. 대충 짐작 가는 일이다.
“도준아. 뭐 좀 물어보려고 일부러 들렀다. 괜찮지?”
“네. 선배님. 말씀하십시오.”
선배들은 긴 한숨과 함께 맥주를 들이켰다.
“사실 우리 셋은 금융사에 취직했는데 한 곳은 부도, 다른 두 곳은 합격 취소 통지서를 받았어. 올해 신입 사원 채용은 불가하다면서….”
어떡하나.
급여가 쎈 곳이라 골라서 들어갔을 텐데 졸지에 백수로 졸업하게 생겼다. 차라리 대기업이었다면 월급은 좀 적어도 최소한 백수는 면했을 텐데.
“아, 오해는 말아. 너한테 취직 부탁하는 건 아니니까.”
선배들은 씁쓸한 내 표정이 그렇게 비췄는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IMF. 이거 어떻게 될 것 같냐? 넌 우리보다는 훨씬 더 많은 걸 알고 있지 않아? 아무래도 주변에 고급 정보가 많이 돌아다닐 테니까.”
“어쩔 수 없이 취업 재수해야 하는데…. 솔직히 일 년 뒤에도 계속 이 모양이면 노선 바꾸려고. 사시를 준비하든 행시를 준비하든 해야겠지.”
선배들의 질문 때문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모두 귀를 쫑긋하고 내 입만 바라본다.
뭐라고 말해야 하나?
진실을 알려야 하나? 아니면 위로를 건네야 할까.
대학 졸업반이라고 해도 사회에서는 어린애나 마찬가지다.
학교 안에서야 예비역이네 뭐네 하며 어른 흉내를 내지만 학교를 벗어나면 핏덩이에 불과한 철부지일 뿐이다.
이런 애들에게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말해줘도 그 깊숙한 진실을 피부로 느낄까?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선배들의 간절한 눈빛을 철없는 어린애로 무시하기 힘들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취업은 포기하시고 사시나 행시 준비하십시오. 공부라면 한 가닥 하시지 않습니까?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빨리 시작하시죠.”
혹시나 했던 대답이 나오지 않자 선배들의 얼굴에 실망이 묻어났다.
“내년에도 IMF 때문에 취업이 어렵다는 거냐?”
내년?
앞으로 영원히 어렵다.
갈수록 더 힘들어지는 게 취업이다. 서울대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취업은 고사하고 지금 다니는 사람들도 다 짤릴 겁니다. 기업 구조조정이라는 명분으로 해고의 칼바람이 불겠죠.”
“해… 해고?”
“네. 웬만한 대기업도 최소 30% 이상 정리할 겁니다. IMF 위기라는 건 단순히 유동성 자금 부족이 아니에요. 우리나라가 경제적인 부도 상태라는 겁니다.”
선배들의 침묵이 호프집 전체로 퍼져나갔다. 떠들썩하게 울리던 소리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제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사라졌어요. 기업은 언제든 직원을 자를 수 있고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단어가 나올 겁니다.”
“비정규직? 그게 뭐야?”
이 시대에 등장한 생소한 개념인 비정규직.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때 홀을 왔다 갔다 하는 알바가 눈에 띄었다. 난 손가락으로 알바를 가리켰다.
“저 알바생, 소득세 갑근세 같은 세금 뗄까요?”
“아니겠지?”
“퇴직금은요?”
“알바가 퇴직금이 어디 있어?”
선배들은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그럼 사장님이 내일이라도 그만두라고 하면 어떡해요?”
“그만둬야겠지?
“그게 바로 비정규직입니다. 이런 장사 집에서만 쓰는 게 아니라 대기업에서도 이런 형태로 고용하는 거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아니라 정규직이라는 말이 한국을 지배하는 시대가 머지않았다.
하지만 이들은 실감하지 못한다. 지금 이들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전부 설마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고, 나는 주변의 동기들에게 말했다.
“국가 부도를 벗어나고 경제가 정상으로 돌아오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야. 고시 준비가 아니라 취업을 생각한다면 군대부터 다녀와. 적어도 졸업을 늦출 수는 있잖아? 소나기는 피하고 봐야지.”
하지만 워낙 침울한 분위기라 꽤 멀리까지 내 말이 들렸나 보다. 많은 애들이 고개를 갸웃한다.
1학년이 겨우 끝난 애들에게는 피부에 와 닿지 않을 이야기가 맞다.
하지만 내년부터 진정한 칼바람이 불고 주변 사람들이 IMF의 피해자가 되면 소나기는 피해야 한다는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내 속에 잠자던 아재 본능 때문일까?
걱정과 잔소리가 길어졌다. 그 때문에 가라앉은 분위기를 회복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다행히 4학년 선배들이 좀 낫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든다. 고마워.”
“아닙니다. 제가 너무 부정적으로 말한 것일 수도 있어요. 주변에 회사 운영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으니까요.”
“우리도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준비해야지. 이제 졸업이니까.”
선배들은 씁쓸하게 웃으며 술잔을 들었다.
“이거 우리 때문에 분위기 엉망이네. 미안하다. 자, 한잔하자!”
“너희들은 아직 시간 많이 남았어. 소나기 피할 시간 충분하고 준비할 시간 많아. 걱정 말고 오늘은 퍼마시라고. 하하.”
억지웃음일지라도 분위기 반전에 도움이 됐다.
게다가 1학년이라 아직은 현실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다. 애들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문이 벌컥 열리며 찬바람을 몰고 들어오는 사람 때문이었다.
두꺼운 오리털 파카 차림에, 털모자와 목도리로 눈만 드러났지만, 남자가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 여자는 호프집을 쓱 둘러보더니 성큼성큼 내 자리로 다가왔다.
목도리를 풀자 예쁜 얼굴이 보였다.
“진도준. 오랜만이다, 너.”
누군지 알겠다. 신입생 환영회 때 돌린 노트북을 가져가지 않은 애다.
그런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입안에서 맴도는 이름, 뭐였더라?
내 표정을 본 여자애는 어이가 없는지 혀를 찼다.
“너 내 이름 까먹었지?”
나는 얼떨결에 머리를 끄덕이는 실수를 저질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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