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76
“이야, 역시 직진 서민영! 거침없구나.”
같은 테이블의 선배가 서민영을 올려다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맞다! 서민영. 이 애 이름이었지.
가만, 그런데 직진은 또 뭐지?
“선배님, 잠깐 앉아도 되죠?”
의자를 끌어당겨 슬그머니 합석한다.
역시 남자 놈들은 어쩔 수 없다. 예쁘장한 여자가 끼어드니 모두 헤벌쭉하며 자리까지 만들어준다.
남자에게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여자의 미모라는 말이 맞다.
“한잔 할래?”
선배가 잔을 내밀자 서민영은 두 손으로 받고 잔을 조금 기울였다.
“반 잔만 주세요. 다시 도서관 가야 해요.”
“오! 역시 사시 준비생이라 다르네. 종강도, 방학도 없이 직진한다 이거지? 그런데 여기서 이러고 있을 시간 있어?”
또 나왔다. 직진!
사시를 향해 달려가는 준비생들을 직진이라고 하나보다.
“선배님들. 제가 보기에는 선배님들도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행정고시라면 2년 정도 준비하면 가능할 텐데요? 사시는… 아무도 장담 못 하는 문제니까 각자 판단하시겠지만.”
응? 이 애, 갑자기 무슨 말이지? 설마 IMF 이야기인가?
“야! 서민영! 너 뜬금없이 그게 무슨 말이야?”
“바쁘신 선배님들이 도준이에게 그거 확인하려고 여기 오신 거 맞잖아요? 기업들 상황이 어떤가, 이 끔찍한 외환위기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아닌가요?”
어쭈? 제법인데?
공부 머리가 좋아 법대에 들어왔고, 선배들 말을 들어보니 오로지 법관을 향해 공부만 파는 모범생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선배들이 이 자리에 모인 이유를 재빨리 알아내는 눈치도 있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잘 안다.
검사가 된다 해도 실적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지금은 서울대 간판도 통하지 않는데요. 바깥은 칼바람이 분다고 졸업생 전부 울상입니다. 그리고 그 칼바람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다고 하네요. 그나마 우린 다행이죠. 법 공부라도 했으니 공무원 시험은 그다지 어렵지 않으니까요.”
선배들은 나와 똑같은 말을 한 서민영과 나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니네 둘, 혹시 사귀냐? 데이트하면서 한국 경제문제 같은 걸 토론도 막 하고 그래?”
한 선배가 농담처럼 말하자 옆자리의 동기 놈들이 소리쳤다.
“그건 아니지! 아니, 그럼 안되지. 도준이 얘는 지구인이 아니야. 에어리언과 우리 민영이가 사귈 리는 없잖아.”
“야! 민영아. 넌 아니라면서? 힘자랑 하는 놈 재수 없고, 돈 자랑하는 놈 밥맛이라면서? 도준이 이놈은 돈, 힘, 둘 다 있다고. 정신 차려.”
“진도준. 넌 니네 세계로 가. 다른 재벌 집 무남독녀, 아니면 연예인…. 이런 여자 만나야지.”
이거, 아무래도 농담 같지가 않다. 동기 놈들 눈에 불꽃이 튄다.
서민영은 잔을 싹 비우고 입술을 쓱 훔쳤다.
“니네들 왜 오버냐? 나 입학하고 도준이 본 게 오늘이 세 번째야. 사귀긴 누가…?”
“그렇지? 하긴, 물리적인 시간도 없고 기회도 없구나. 도준이는 학교를 안 오고 민영인 학교 도서관과 강의실만 오가니 사귀는 건 불가능이지, 암.”
놈들의 눈에서 불똥이 사라졌다.
애들 말하는 게 우습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은 다른 경우에 쓰는 말이지만, 내 경우도 그렇다. 연애 감정이 말라버린 중년의 정신이다 보니 이런 애들 신경전은 귀엽게만 보인다.
가끔 내 몸속의 남성 호르몬이 날뛰지만 일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가 그 호르몬을 억누른다.
“됐다. 얼굴 봤으니 난 가볼게.”
서민영은 목도리를 두르며 일어섰다.
“그리고 도준이 넌 나 잠깐 보자. 할 이야기가 좀 있어.”
“나? 왜?”
깜짝 놀랄뻔한 것을 잘 넘겼다.
무슨 애가 앞뒤 없이 갑자기 쑥 들어오는지. 조금 전 당황했던 선배들이 이해가 된다.
“내가 좀 따질 게 있어서 그래.”
“야. 서민영! 딴 생각하는 거 아니지?”
무표정한 서민영에게 동기 한 명이 소리 질렀지만, 표정은 변함없었다.
“쫌! 까불래?”
귀엽기도 해서 별말 없이 서민영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으…. 춥다. 뭔데? 뭘 따져?”
“내가 지금 진짜 쪽팔림을 무릅쓰고 하는 말이니까 잘 생각해서 대답해.”
“그래.”
어린 애의 장단을 맞춰주려니 좀 시큰둥하게 대답했고 서민영은 이런 내 기분을 느꼈는지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뭐야? 얼른 말해봐.”
“난 졸업 전에 사시 패스가 목표이자 의무거든.”
“목표는 이해하는데 의무는 또 뭐야?”
“우리 집은 전부 법조인이야. 게다가 대부분 법대 졸업 전 패스했어. 졸업 전에 패스 못 하면 가족 전부가 갈구기 시작하거든. 그래서 무조건 패스해야 해.”
김윤석 대리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검사장, 법원장이 흔한 가족이었던가?
그런데 대부분 졸업 전 패스라니… 의외다.
“그래서 고3보다 더 빡세거든? 솔직히 시간이 없어.”
“무슨 시간?”
“너랑 데이트할 시간.”
“뭐?”
요즘 애들 다 이러나? 솔직한 건가, 당돌한 건가?
“너 좋아한다는 고백인데 반응이 고작 그거야?”
“힘자랑, 돈 자랑하는 놈 싫다면서? 난 둘 다 있는데?”
“대신 잘생겼잖아.”
“뭐?”
“넌 반응이 딱 하나뿐이구나. 뭐?”
내 말투를 흉내 내고는 짧게 한숨을 쉰다.
“우리 할머니가 그러시더라구. 남자는 인물이 제일 중요하다고. 남자가 잘생겼으면 화나는 일이 생겨도 용서가 된다나?”
“그래서? 할머니 말씀 따르려고?”
“아니, 나도 백퍼 동의하니까. 내가 남자 외모에 많이 약해.”
어처구니가 없어 피식 웃자 서민영도 배시시 웃는다. 귀엽긴 하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암튼 나도 시간 없고 너도 학교 잘 안 오니까, 자주는 아니고 한 달에 한두 번쯤 밥 같이 먹는 걸로 퉁 치자.”
“뭘 퉁 쳐?”
“우리 데이트.”
이번엔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공부라는 한우물만 파서 남녀가 밀당하는 법을 아예 모르는 건가? 아니면 너무 솔직한 걸까?
대답을 못 하고 있으니 그녀가 나를 빤히 보며 말했다.
“잘 생각해서 대답해. 솔직한 게 좋긴 하지만, 거절하면 원한 품을 거야. 여자가 원한을 품으면 오뉴월에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만 난 좀 달라.”
“어떻게 다른데?”
“검사가 돼서 네 명의의 계좌 싹 털 거야. 불법 증여 흔적이 나오기만 하면 넌 수갑 차고 취조실에서 날 보게 될걸?”
“그거 지금 쪽팔리니까 나 웃으라고 농담한 거냐?”
“별로야? 안 웃겨? 이 멘트 준비한다고 서너 시간 고민했는데….”
서민영은 또다시 날 빤히 보기 시작했다.
예쁜 여자의 눈길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 심장 떨린다.”
내 말을 이해 못 했는지 눈만 깜빡거리다 마침내 환히 웃는다.
이럴 땐 좀 늦군.
“내 번호 알지?”
서민영은 머리를 힘차게 끄덕였다.
“전화해. 차 보낼 테니까.”
“차? 무슨 차?”
“너 데리러 갈 승용차. 잊었어? 나 재벌 3세야. 우리 데이트가 평범하진 않을 거니까 마음 단단히 먹어. 나 들어간다.”
서민영의 어깨를 슬쩍 치고 돌아설 때 그녀가 다급하게 말했다.
“이거 비밀이야! 애들이 물어보면 조별 과제 빼먹은 거 따졌다고 해.”
나는 웃으며 손을 슬쩍 들어주고 호프집으로 들어갔다.
자리로 돌아오자 남학생들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뭐냐? 무슨 말 하디?”
“뭐긴? 조별 과제 할 때 땡땡이친 거 가지고 한참….”
이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서민영이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나 오늘부터 진도준이랑 사귀기로 했다!”
이 말만 크게 외치고 그녀의 얼굴이 사라졌다.
저, 저런! 도대체 저 애의 사고 회로는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방금 제 입으로 비밀로 하자고 말하지 않았던가? 1분도 지나지 않았다.
하얗게 질린 내 얼굴에 죽일 듯이 쏘아보는 남학생들의 눈길이 꽂혔다.
“으하하. 역시 직진이야. 민영이답다.”
선배 한 명이 배를 잡고 웃었다.
아…!
직진이 무슨 뜻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 * *
“호텔, 백화점, 리조트, 골프장. 이 정도면 결코 적은 게 아니다. 다른 그룹들을 봐. 백화점이나 골프장 한두 개가 전부야. 그게 딸이 가져가는 몫이다. 출가외인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까 정치하는 거예요. 부족한 걸 권력으로 메꾸고 싶으니까요.”
“부족? 허, 참.”
진 회장은 진서윤의 욕심에 할 말을 잃었다.
외동딸이라 너무 오냐오냐 귀엽게만 키운 자신의 잘못도 크기 때문이다.
최 의원은 진 회장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염려하시는 부분은 없을 겁니다. 회사 쪽은 쳐다보지 않고 정치에서 크겠습니다.”
마누라 치마폭에 쌓여 꼼짝도 못 하는 놈이 험악한 정치판에서 크겠다고 큰소리치니 더 한심해 보였다.
진 회장은 사위를 무시하고 딸만 쳐다보며 말했다.
“야당이 정권을 차지했다. 여야가 바뀐 거야. 야당 후보로 나서서 선거에서 이기기 쉽지 않다.”
“저는 정권을 차지한 야당보다 아버지가 더 두렵거든요.”
배시시 웃는 딸을 보니 마음이 약해졌다. 나이 먹은 딸이지만 진 회장의 눈에는 여전히 귀여운 외동딸이었다.
하지만 자를 건 자르고 지킬 건 지켜야 한다.
더욱이 똘똘한 손자가 만들어준 아킬레스건까지 손에 넣지 않았던가.
“모두 들어와!”
진 회장이 서재 밖을 향해 외치자 삼, 사십대로 보이는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들어왔다.
그들은 진 회장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한 다음 회의 테이블의 한자리를 차지하며 앉았다.
진서윤의 표정이 점점 더 환해졌다. 그녀는 이들의 정체를 잘 안다.
선거 때마다 대기업을 옹호하는 후보 곁에서 전략을 짜내는 사람들이다. 소속은 순양경제연구소지만 경제보다 정치판을 읽는데 탁월한 사람들이다.
정치는 생물이라 시시각각 변한다. 그 변화의 흐름을 정확히 읽고 전략을 수정하며, 유권자의 변화를 정확히 캐치하는 식견을 보유한 능력자들이다.
이들은 계열사 사장급의 엄청난 연봉을 받으며 오로지 선거만 책임지는 그림자들이었다.
“오늘부터 이 친구들이 최 서방을 도울 거다. 이왕 나서기로 한 거 꼭 이겨야지.”
뭐가 뭔지 모르는 남편에게 진서윤이 눈짓하자 황급히 머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장인어른. 꼭 이겨 은혜에 보답하겠습니다.”
진 회장은 가볍게 머리를 끄덕이며 사위에게 말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물론입니다. 장인어른께서는 제가 친아버지와 다를 바 없으신 분입니다. 어떻게 딴생각을 하겠습니까?”
진 회장은 사위의 달달한 말에 웃음을 흘리며 서류 파일 두 개를 그의 눈앞에 툭 던졌다.
“이건…?”
최 의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진서윤은 재빨리 파일을 낚아채고 펼쳤다.
“하나는 서울시 정무 부시장과 서울시 산하기관의 기관장으로 쓸만한 사람 명단이다. 특히 도시기반시설본부, 시설관리공단, 주택도시공사에 앉을 인물은 특별히 골랐어.”
“아, 아버지.”
당황한 진서윤이 진 회장을 쳐다봤지만, 그 눈길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선거 때 자네 공약에 써먹을 만한 거 몇 줄 적었다. 언제 발표할지는 저 친구들이 알려줄 거야.”
숫제 진 회장의 사람들로 서울시를 장악하겠다는 뜻 아닌가?
공약도 서울시장의 생각이 아니라 순양그룹을 위한 공약이다.
자신을 완전히 꼭두각시로 만든다는 계획이다.
“자, 장인어른. 저도 챙겨줘야 할 사람이 있고 우리 당에서도 사람을 추천할 겁니다. 그 사람들도….”
“그건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염려 말게. 서울시의 공무원 자리보다는 순양그룹 사옥으로 출근하는 걸 더 좋아할 거야.”
이권을 쥔 자리는 진 회장 사람이 앉고 그 대가로 월급 듬뿍 주는 자리를 내주겠다는 말에 최 의원은 입을 닫았다.
울화가 치밀었지만, 아내가 보내는 눈빛 때문에 참아야 했다.
지금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라야 할 시기라는 걸 최 의원도 잘 안다.
반격은 권력을 손에 쥔 다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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