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83
“아, 난데. 우리 심사역 몽땅 모이라고 해. 그리고 삼정회계법인에 전화해서 회계사 싹 긁어모아서 보내달라고 하고. 실물 조사팀도 전원 대기시켜. 10분 뒤에 회의한다.”
오세현이 내일을 위해 사람들을 모을 때 난 할아버지께 전화했다.
“할아버지 지금 바로 찾아 뵈도 될까요? 급히 상의드릴 일이 있습니다.”
대아건설에서 딴 생각할 때를 대비해야 한다. 그들이 음흉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때 그 발걸음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할아버지뿐이다.
여의도에서 오세현이 내리고 승용차는 마포대교를 달렸다.
헐레벌떡 할아버지 서재로 들어가니 웃으며 맞이해 주신다.
“아이고, 이놈아. 숨넘어가겠다. 왜? IMF가 또 터졌다더냐?”
“IMF가 또 터지면 전 뛰지 않고 날아다닐 텐데요?”
아직 18억 달러가 남아있다. 외환 위기가 더 심할수록 그 가치가 올라가니 날아다닐밖에.
“어디 나가지도 못하게 하고, 서재에서 꼭 기다리라고 한 걸 보니 그럼 내 도움이 필요한 게로구나.”
“네. 절실히 필요합니다.”
“읊어봐. 들어보고 얼마나 받을지 생각해 보게.”
말끝마다 돈이지만, 항상 더 많은 것을 돌려준다. 손자에게 베푸는 것은 늘 넉넉한 분 아닌가?
“대아건설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올해 마포 DMC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면 꼭 필요한 회사이기도 하고요.”
“서론이 길다. 아는 건 빼고 본론만.”
“그 회사 오너와 경영진이 쓰러져가는 회사에서 마지막 남은 골수까지 빼먹고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 전에 치고 들어가서 점령할 생각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땡잡았구나, 이놈! 허허.”
할아버지는 책상을 탕 치며 호탕하게 웃었다.
팔십이 다 돼가는 시간을 살며 수많은 경험을 한 분이다 보니, 척하면 착이다.
벌써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훤히 꿰뚫은 것처럼 보였다.
“대아건설 사장이 누구더라? 강…?”
“강무성 사장입니다. 동생인 강무진이 전무더군요.”
“전무? 벌써 만나봤느냐?”
“네. 조금 전에 확인하고 왔습니다.”
“확인해보니 그놈들이 돈 빼돌린다고 확신이 들더냐?”
“네. 미라클이 대아의 주식 5%를 확보하자마자 연락 오더군요. 그리고 되사겠다고 했습니다.”
“5%?”
할아버지는 눈을 치켜들었다.
“그런 식으로 골수 빼먹는 데 한 숟갈 걸치는 승냥이 같은 놈들이 증권가에는 많다고 들었는데, 오세현이의 생각이로구나.”
5%의 주식으로 회사를 휘젓는 일은 쓰러져가는 회사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멀쩡한 회사의 주식을 확보하고 소위 진상 대주주가 되어 다시 비싼 값에 되파는 놈들도 종종 있다.
다만, 멀쩡한 회사는 5%의 주식을 확보하는데 드는 비용이 엄청나니 평범한 승냥이들은 감히 시도조차 못 하는 것이다.
“네. 극동건설이 쓰러지자 대아건설 주가는 폭락하기 시작했고 부도설도 돕니다. 큰돈 들이지 않고 쉽게 확보했죠.”
“그놈들 식겁하겠는데? 내일이라도 임시주총 열자고 요구하면 간이 철렁할 게다.”
“주총보다는 내일 그쪽 장부 뒤지고 골수 빼먹은 증거를 확보할 생각입니다.”
“이런, 아예 감옥에 처넣을 생각이냐?”
“네. 이미 빼돌린 회사 자산 전부 회수해야죠. 그다음에 회사 청소 말끔하게 하고 새 출발 하면 모양새 좀 나오지 않겠습니까?”
“음…. 싸게 먹겠는데?”
할아버지는 이미 계산을 끝내신게 확실하다.
“강무성 사장 일가가 쥐고 있는 주식도 꽤 될 거다. 그걸 손에 넣어야 경영권을 확보할 텐데?”
“횡령한 현금이나 현물을 추징금으로 내고 강무성 사장 일가가 쥔 주식을 대아건설 소유로 만들면 경영권 확보를 위한 주식 수가 그리 크지 않을 겁니다. 회사 소유의 주식은….”
“대표이사가 주권을 행사하니까.”
“그렇죠.”
할아버지는 얽혀있는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느라 잠깐 말이 없었다.
이윽고,
“갈 길이 먼데 시간은 없구나. 그렇지? 적어도 6월까지는 대아건설 인수부터 정상화를 모두 끝내야 서울시장이 될 네 고모부와 함께 마포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으니까.”
“네.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바로 그 시간입니다.”
“시간은 돈으로도 못 살 만큼 귀한 것인데…?”
“삽니다. 인간의 수명은 못 사더라도 인간의 인생 정도는 충분히 살 수 있는 게 돈 아닙니까?”
“진심이냐?”
“순양그룹 십만 명 임직원의 인생, 월급이라는 돈으로 사셨잖습니까?”
“이놈이 또 이 할애비를 뜨끔하게 만드는구나. 흐흐.”
전혀 뜨끔하지 않은 표정. 단지 작은 웃음만 보일 뿐이다.
“일단 강무성이 일가족 전부 출국금지부터 해야겠구나. 이미 해외로 빼돌린 돈도 일을 터, 법무부에 수사 지시도 내리고.”
수사 지시를 내려? 요청이 아니라?
지시라는 말이 아주 자연스럽게 나올 정도다.
“물론 가능하시겠지요?”
“네놈 하는 거 봐서.”
나는 벌떡 일어나 할아버지 등 뒤로 갔다.
어깨에 손을 올리고 부드럽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는 안 되겠죠? 일단 출국금지만이라도 부탁드릴게요.”
“으허허. 시원하게 주물러봐라.”
할아버지는 수화기를 들었다.
“김 고검장. 많이 바쁘신가?”
다행이다.
서울고등검찰청이다. 어깨를 조금 주물러드리는 것만으로 출국금지 부탁을 들어주셨다.
“…그러니까 말일세. 나라 경제가 이 지경인데 제 주머니 채운다고 망해가는 회사 링게르까지 빼먹는 건 용서할 수 없지 않겠나……. 아니, 아니. 일단 해외로 도망가는 거부터 막고……. 그렇지, 그렇지. 내가 좀 더 알아보고 알려줌세. 조만간 한번 놀러 와. 밥 한 그릇 같이하자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할아버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웃었다.
“이 정도면 만족하냐?”
“감사합니다.”
어깨를 주무르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빨리 진행하려면 내일 회계자료 열람할 때 확실한 증거 하나라도 챙겨. 그걸로 경영진 배임 횡령 걸어서 고소·고발 접수하고. 그럼 국세청, 검찰 움직여서 한 번에 휘몰아치면 저쪽에서 항복할 거야.”
“항복?”
항복의 정확한 의미를 모르겠다. 할아버지의 항복은 어떤 의미일까?
할아버지는 내 손을 잡고 안마를 멈추게 하고 자리에 앉혔다.
“도준아.”
“네.”
“대아건설을 인수하려는 목적이 정확하게 뭐냐?”
“올해 DMC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고….”
“거기까지만 하자.”
“네?”
“그 뒤의 일은 나중에 생각하자는 말이다.”
눈앞의 가까운 목표만 바라보며 지금 즉시 해야 할 일만 선정한다. 급할수록 장기적인 목표 보다는 단기적인 목표에 집중하자는 말씀이다.
“자, 6월 지방선거 끝나고 네 고모부랑 일을 진행하려면 늦어도 올 상반기 안에 대아건설을 장악해야 한다. 그렇지?”
“그렇겠죠.”
“검찰이 움직이고 증거를 확보한 뒤, 배임 횡령으로 공판을 시작한다면? 그놈들 주머니에 든 돈을 추징한다든가 압류하고 회사로 귀속시키려면 몇 년 걸릴 게다. 그 사이, 대아는 부도가 날 테고 채권단은 처리문제를 놓고 고심하겠지. 빨라도 2년 뒤, 네 손에 들어올 거다.”
역시 문제는 시간이다. 시간을 단축하려 할아버지께 손을 내밀었다. 지금 그 해답을 주신다.
“그럼 할아버지의 항복은 다른 뜻이군요.”
“그래. 살길을 마련해 주고 빨리 처리하거라.”
“살길이라면…?”
“검찰수사, 국세청 조사는 협박용으로만 써야지. 2년 뒤 알거지가 되고 가족 전부가 옥살이를 할 건지, 지금 전부 다 내놓고 밥 굶지 않을 만큼 챙겨서 외국으로 도피할 것인지 선택하도록 만들어라.”
온몸에 전기가 관통한 것처럼 짜릿했다.
처음 항복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협상의 여지를 남겨두라는 숨어있는 의미 정도는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진짜 충격받은 건 바로 검찰 수사의 완급까지 조정하는 힘이다.
검찰을 마치 내 칼처럼 쓴다. 칼집에서 빼고 싶을 때, 그리고 다시 넣고 싶을 때…. 원할 때 수사를 시작하고 원할 때 멈춘다. 국세청을 포함해서…….
할아버지의 이런 힘은 순양그룹의 돈과 주식으로 만든 게 아니다.
오랜 세월 동안 쌓아온 것이다.
공직자들에게 돈을 안겼고 그 돈의 대가로 공직자는 양심을 팔았다. 양심을 파는 순간 다시 할아버지에게 약점이 잡혔고….
이것이 계속 돌고 돌아 순양의 힘이 된 것이다.
내가 가진 수조 원의 돈을 지금 다 뿌린다 해도 할아버지의 힘을 가질 수 없다.
수조 원이라는 돈은 아마도 할아버지가 뿌린 돈의 몇 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차이를 메운 건 바로 세월이다.
조금 전 시간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뱉은 말이 얼마나 경솔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마치 전기 충격처럼 말이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항복은 제가 받을 테니 할아버지께서는 검찰과 국세청을 계속 움직여 주시겠습니까?”
“네놈 하는 거 봐서.”
“잘하겠습니다.”
머리를 꾸벅 숙이며 살살 녹는 말투로 말하니 할아버지는 장난스레 미소 지었다.
“말로 때우지 마라.”
“그럼 원하시는 걸 한번 말씀해보시지요. 귀담아듣겠습니다. 흐흐.”
농담처럼 대답했지만, 할아버지는 진지한 표정을 생각에 잠겼다.
할아버지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을 때, 의외의 요구를 하셨다.
“네가 대아건설을 인수하면 경영진 대부분이 공석이지? 다들 푼돈 받고 쫓겨날 게 뻔하니까. 그렇지?”
“네.”
“내가 사람을 보내마. 그 자리에 앉혀라.”
쉽게 대답하기 힘든 요구다.
경영진을 할아버지의 사람으로 꽉 채운다면 대아건설은 누구의 것인가?
대표이사를 비롯한 주요의사결정을 내리는 임원 모두가 할아버지의 사람이라면 대아건설은 순양건설의 자회사일 뿐이다.
내가 머뭇거리자 할아버지가 물었다.
“어차피 넌 사람이 없지 않으냐? 내 사람을 안 쓴다면 염두에 둔 사람이라도 있는 게야?”
“이미 쓰러진 동아건설, 극동건설 등에는 사람 많습니다. 그리고 대아건설에서 부장급을 대거 이사로 승진시키려고 했죠.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좋을 겁니다.”
“오, 거기까지 생각했더냐?”
“괜찮은 생각입니까?”
“괜찮아? 당연히 안 괜찮지. 흐흐.”
명백하게 비웃는 웃음이다.
“건설사 임원이라면 반 깡패야. 공사판 현장 소장부터 거친 노가다 놈들을 다루고, 사막 모래 폭풍을 견뎠어. 철거민을 싹 밀어버리는 강단도 있다고. 점심때마다 막걸리 마시며 현장 지휘한 놈들인데…. 그런 놈들을 섞어서 자리에 앉히면? 허구한 날 싸움박질만 할걸?”
건설사 출신이 거칠다는 것은 이미 알지만, 임원 이상이면 정치적으로 변할 것이라 생각했다. 오산이었나?
할아버지는 당황한 나를 아예 재미있는 장난감처럼 바라본다.
“고민되지? 내가 주는 잔이 독약인지, 보약인지 구분이 안 가지? 할아버지의 사람으로 꽉 채운 회사, 순양그룹에 홀라당 뺏기는건 아닌지 걱정부터 앞서지? 흐흐.”
“아, 아니에요. 말씀드렸잖아요. 대아건설은 순양그룹에 드린다고요.”
“옛끼, 이놈아. 그 말을 믿으라고? 욕심 시커먼 네놈이? 허허.”
황급히 손을 내저었지만, 내 속을 다 들여다 보는 할아버지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시간도 없고, 힘도 없고, 사람도 없고…. 가진 건 돈밖에 없는 네 녀석이 내 요구를 거절한다면 대아건설도, 디엠씨인지 뭔지도 다 사라질 텐데 무슨 고민이 그리하느냐? 안 그러냐?”
맞는 말이다,
고민은 선택의 여지가 남아있을 때나 하는 사치다.
그리고 지금까지 할아버지가 내게 주신 것의 일관성 있는 공통점을 믿어야 한다.
사람.
또 사람을 주신 것일지도 모른다.
대아건설을 장악할 반 깡패 임원들. 그들을 내 사람으로 만들라는 숨은 뜻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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