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90
“그럴싸하게? 벌써 기자들이 묻고 있다고. 보도자료 돌릴 때 뭐라고 할 거야?”
“최고의 이미지 코디네이터 회사와 계약할 겁니다. 전문가들이 저 이니셜에 맞춰 만들어 내겠죠.”
“뭐? 코디네이터?”
“네. 앞으로 우리 회사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책임지고 관리할 회사죠. 그리고 송 회장님이나 계열사 대표이사들도 이미지 메이킹 하고요.”
“메이킹은 또 뭐냐? 야! 우리가 배우 키우냐? 연예인 키워?”
“21세기는 이미지로 먹고사는 시대가 될 겁니다. 기업 이미지가 곧 매출로 직결되고요. 아무튼! 오늘은 고민하지 마시고 즐기세요. 좋은 날 아닙니까?”
TV에서는 조대호 사장의 취임사가 끝나고 각 계열사 사장의 소개가 이어졌다.
이제 리셉션이 시작될 시간이다.
“삼촌. 가서 얼굴 비추셔야죠. 명실상부한 이 그룹 지배자 아닙니까?”
“넌? 인사 안 할 거야?”
“귀찮은 일에 말릴 것 같아서요. 큰아버지들 와 계신 거 얼핏 봤어요. 전 그냥 빠질랍니다.”
그들에게서 받게 될 불편한 시선을 피하고 싶었다. 오늘은 좀 특별한 날 아닌가?
아진, 아니… HW 그룹 사옥을 빠져나왔다.
빌딩에는 아직 아진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곧 바뀔 것이다.
자축이라도 해야 할 날이지만, 적당한 아부도 떨어야 하는 날이다. 생색내기 좋아하는 할아버지를 잊으면 안 된다.
자고로 강직한 충언을 하고 죽은 사람은 많지만, 아부 떨다 죽은 사람은 없지 않은가?
“실장님. 어디로 모실까요?”
김윤식 대리가 차 문을 열었다.
“회장님댁으로 가죠.”
“네.”
“참, 가다가 슈퍼 있으면 진로소주 한 병만 사다 주세요.”
“소주요? 술은 잘 드시지도 않으시면서….”
“오늘 같은 날은 한잔해야죠.”
마음껏 마시고 취하고 싶을 만큼 감격스럽고 뿌듯하지만 이제 첫발을 내디딘 것뿐이니 오늘은 한 잔만 마셔야겠다.
축하주는 가볍게. 성공주는 잔뜩.
* * *
“응? 왜 벌써 왔어? 지금쯤 연회가 한창일 텐데?”
서재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할아버지는 뉴스를 보고 계셨다. 아진그룹 제2 창업식은 꽤나 큰 뉴스거리다. 쉬지 않고 흘러나온다.
“할아버지 덕분에 제가 아진그룹 주인이 됐는데 어떻게 혼자 즐기겠습니까? 할아버지와 축하주 한잔 나누려고 왔습니다.”
검은 비닐봉지에서 소주병을 꺼냈다.
“뭐냐? 왜 하필 재수 없게 망한 회사 술을 가져왔어?”
할아버지는 빨간 라벨의 진로 소주병을 보자 미간을 찌푸렸다.
“70년 역사가 담긴 술 아닙니까? 진로 창업주인 장학엽 사장도 고작 소주 브랜드 하나가 70년을 버틸 줄 몰랐을 겁니다. 그리고 회사는 망했지만, 이 제품은 여전히 팔리지 않습니까? 진로 소주는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주인은 바뀔 수 있어도 사라지지 않을 제품이라…. 그건 마음에 드는구나. 허허. 좋다, 한잔 따라 봐라.”
진로소주가 바로 순양의 미래라는 걸 말하고 싶은 내 마음을 눈치라도 채신 걸까? 아, 좀 다르구나. 핏줄을 이어받았으니 주인이 바뀌는 것은 아닌가?
“축하한다. 우리 손자. 장하다. 내가 네 나이에 가진 거라고는 금붙이 몇 개가 전부였는데, 넌 내 나이 사십이 넘어서야 가진 걸 스물에 쥐었구나.”
“그거야 할아버지께서는 저같이 열 살 때 널찍한 목장을 선물한 할아버지를 두시지 못했으니까요. 고맙습니다. 전부 할아버지 덕분입니다.”
할아버지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다. 대한민국 재벌 손자 중에 열 살 때 몇천만 원짜리 목장 가진 놈은 수두룩해. 그놈들 나이가 지금 스물이고, 서른이다. 받은 거 까먹은 놈은 많아도 천 배, 만 배 불린 놈은 너밖에 없을 거야. 지금 네가 가진 건 할아버지를 잘 둬서가 아니다. 네 힘으로 만든 거야. 자랑해도 돼. 허허.”
할아버지는 내 잔에 소주를 채우고 살짝 부딪혔다.
우리 둘은 단숨에 술잔을 꺾었다.
“이 술, 참 많이도 마셨는데 이젠 그 맛이 안 나는구나.”
나도 그렇다. 소주와 삼겹살을 얼마나 마셨는가? 하지만 그 맛이 아니다. 아예 소주 첫 잔의 짜릿함이 기억나지도 않았다.
나와 할아버지는 아주 잠깐이지만 회상에 잠기느라 말없이 빨간 소주 라벨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좀 우스운 모습이다. 노인과 젊은 놈이 같은 색의 추억에 잠기다니.
추억에서 깨어난 할아버지 먼저 입을 열었다.
“대아건설은 어떻게 진행하고 있느냐?”
“은행과의 협상은 조금씩 양보해서 무리 없게 진행 중이며, 실무진이 구체적인 금액을 계산 중입니다. 그리고 강무성 사장이 빼돌린 돈은 발견하는 대로 회수 절차를 진행 중입니다.”
“검찰이 수고하는구먼.”
“수고비는 넉넉하게 쥐여줬습니다.”
할아버지는 내 안색을 살폈다.
“그런데 강 사장 그자가 주식 매각 대금은 절대 안 내놓겠다고 버티나 보구나.”
“네. 자식, 손자 전부 공금 횡령으로 구속하겠다고 해도 요지부동이네요. 돈…. 참 무섭습니다.”
기가 찬 내 모습을 보며 할아버지는 정색하며 말했다.
“아니다. 잘못된 생각이다.”
“네?”
“그 주식 매각 대금은 강 사장이 가진 마지막 무기다. 아직 무기를 휘두를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한 거야. 딱 한 번 휘두를 수 있으니까, 좀 더 결정적일 때 휘두를 거다.”
여기서 휘두른다는 말은 주식 매각 대금마저 포기한다는 뜻이다.
“설마요? 강 사장에게 아직 기회가 남았을 리가…?”
“그 일가족이 전부 구속되고 유죄 받으면 주식대금은 아마도 추징금으로 다 날아가겠지?”
“맞아요. 그런데 어떻게 기회가 남아있습니까?”
“대신 너도 그 돈을 만지지 못한다. 국고로 들어가니까 말이다.”
아직 할아버지가 말하는 의도를 모르겠다.
주식 매각 대금을 대아건설로 돌려준다면 강 사장 본인을 물론 전 가족의 구속을 피한다.
하지만 계속 버티면 주식 매각 대금은 국고로, 가족들은 구속이다.
누가 보더라고 후자보다 전자가 현명한 선택이다.
기회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내 얼굴에 드러난 의문을 보며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넌 지금 쓸데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돈을 날려버리려는 거다. 아니냐? 장사꾼을 마음을 잊어버렸어.”
“쓸데없는 감정이라뇨? 그런 거 없습니다. 저도 오로지 돈만 생각합니다. 그 돈이면 대아건설 정상화에 엄청난 도움이 되니까요. 그래서 할아버지의 힘을 이용해서 강 사장을 협박하고 회유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구구절절 떠들어 댔지만, 할아버지는 딱 한 단어로 내 감정을 설명했다.
“정의.”
“네?”
“넌 지금 정의라는 감정 때문에 분노하는 거다. 직원들 월급도 주지 않으면서 망해가는 회사의 돈을 빼돌리고, 그 돈으로 언젠가는 떵떵거리고 살게 될 강 사장 일가를 절대 용납할 수 없는 거지. 그런 놈은 알거지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하지 않니?”
변명할 말이 없어 얼굴만 붉어졌다.
참 희한한 세상이다. 정의라는 말이 어색하고 불의에 분노하는 것이 쓸데없는 감정이 돼버렸다. 이 집안에서만 그런 건지, 세상이 그런 건지 그 경계는 모호하지만.
“강 사장은 말이다, 널 장사꾼으로 보고 있어. 그러니까 네가 단 한 푼이라도 더 건지기 위해 다른 제안을 할 거라고 믿고 기다리는 거야. 버티면 넌 한 푼도 건지지 못하니까. 그리고 두 번째 제안 없는 거래는 없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강 사장의 의도를 정확히 내게 말했다.
“장사꾼이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건 좀 웃기지 않니? 남이 어떻게 살던, 무슨 생각을 하든 그게 무슨 상관이냐? 그놈 주머니에 든 돈을 네 주머니에 한 푼이라도 더 옮기는 게 장사꾼이지.”
한동안 대답도, 대꾸도 못 한 채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강무성 사장에게 가졌던 내 감정은 과거의 경험 때문이다. 과거의 내 모습을 대아건설 직원에게서 봤기 때문이다.
“한번 생각해 보렴. 강 사장 그놈 주머니의 돈을 나누자고 제안하면? 얼마를 남겨준다고 하면 그놈이 네 제안을 받아들일지도 말이야.”
“그러니까 돈도 좀 남겨주고 강 사장 일가 구속도 피하게 해주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놈이 주식대금의 절반을 회사에 주겠다고 하면 반성의 기색이 역력하니 집행유예로 나오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 시나리오도 좋고.”
여전히 주저하는 나를 보며 한 마디 덧붙였다.
“행여나 딴생각은 말아.”
“딴 생각이라니요?”
“돈을 먼저 챙기고 강 사장은 나중에 응징하겠다는 그런 생각 말이야. 다시 말하지만, 돈만 생각해라. 강 사장이 네게 위협이 되지 않는 한 그쪽은 쳐다보지도 말어.”
눈치 하나는 정말….
“뭐, 어찌 됐던 대아건설도 네 손안에 들어갔으니 강 사장 돈을 찾아오는 건 보너스 정도겠지. 이 할애비가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해줬다. 선택은 네가 해야겠지?”
“명심하겠습니다. 장사꾼답게 결정하겠습니다.”
일 이야기는 이 정도로 끝냈다.
할아버지는 다시 술잔에 술을 채우고 내가 가진 것을 축하했고 나는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한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
* * *
“안양구치소로 갑시다.”
“네? 갑자기 거긴 왜…?”
“남의 주머니 속에 든 돈, 내 주머니로 옮기려면 못 갈 데가 있겠습니까?”
김윤석 대리는 여전히 머리를 갸웃거리며 핸들을 잡았다.
진정 돈도 챙기고 파렴치한 놈도 알거지로 만들 방법은 없을까?
골똘히 생각에 빠져 있다 보니 어느새 안양이었다.
꼴에 사회 특권층이라고 널찍한 면회실까지 배정받았다.
“어떻게…. 구치소 짬밥은 입에 맞으십니까?”
“미라클 같은 듣도 보도 못한 회사를 무시한 대가라 생각하니 그럭저럭 먹을 만 하더구먼.”
아직 여유가 보였다.
할아버지 말씀처럼 아직 휘두를 칼이 남아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면회시간 길지 않으니 우리 오 대표님 말씀만 전하겠습니다.”
강 사장은 눈을 감으며 가볍게 머리를 끄덕였다.
“사장님께서 얻게 될 주식대금 전부를 대아건설로 넣으시던지, 아니면 아예 주식을 회사에 주시든지 하시면….”
“당신네가 원하는 건 아니까 앞은 자르고 뒤만 말하지?”
“검찰 수사는 여기까지 자르고, 집행유예로 나오실 겁니다. 그럼 대아건설 고문 자리를 드린답니다. 고문 월급은 아주 두둑하게 챙겨드릴 수도 있다는군요. 앞으로 협조만 잘하신다면 말입니다.”
강무성 사장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내가 던지는 제안은 보너스가 숨어있다.
“망해가는 회사의 골수까지 빨아먹은 파렴치한. 그 굴레는 벗을 겁니다. 모든 것은 오해였고 회사를 위한 일을 하다 보니 먼지가 좀 묻었다, 그런 선의를 알기에 고문으로 영입한다. 이렇게 언론이 예쁘게 포장해서 터트려 줄 겁니다.”
명예.
나이 들면 이름값에 연연한다. 돈만 생각하는 장사꾼이지만 들고 다니는 명함의 무게를 잘 안다.
대아건설 고문이라는 명함은 그리 무겁지 않지만, 횡령 전과자보다는 낫다.
또한, 강무성도 장사꾼이다.
나와 극단으로 치달으면 돈도 명예도 다 떨군다는 걸 알아챘을 것이다.
“음…. 오 대표 그 친구, 꼼꼼하구먼. 내가 가질 돈을 회사 경비로 처리하겠다? 너무 쪼잔하지 않나?”
고문으로 영입해서 가져가는 돈은 전부 급여다.
주식대금 전부를 챙기고 일부분만 급여로 준다면 크게 나쁠 것 없다. 그리고 대아건설의 숨은 역사까지 잘 아는 사람 아닌가?
뭐라도 써먹을 수 있을 것이다.
“에이, 통 큰 장사꾼이 어디 있습니까? 큰돈 척척 기부하는 장사꾼도 꼼꼼하게 계산하고 내놓잖아요. 세금 대신 생색내는 용도로 쓰는 게 기부금이죠.”
“고문 월급치고는 꽤 많이 줘야 할 텐데?”
“대신 고문님도 갑근세 많이 내실 겁니다.”
“성실하게 납세하는 것 또한 국민의 의무지.”
그가 미소 짓는 걸 보니 연봉 협상만 남았다.
“그럼 고문 위촉 계약서 준비하겠습니다.”
내가 의자에서 일어나자 강 사장은 손을 내밀었다.
“잘 부탁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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