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Youngest Son of Sunyang RAW novel - Chapter 94
“자, 장인어른.”
고모부의 낯빛이 시커멓게 변했다. 고경열이라면 때 묻은 여의도 인간이 아니다. 공무원 외길 인생을 걸어온 인물은 국회의원에 비해 깨끗하고 신선한 느낌을 준다.
게다가 여당 프리미엄까지 안고 있다.
별다른 변수가 없는 한 고모부의 승리를 점치는 게 쉽지 않다.
“뭘 그리 놀라? 누가 나오든지 이길 자신이 없어?”
“그게 아니고, 예상 못 한 인물이라….”
고모부가 차마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자 고모가 발끈 소리 질렀다.
“아버지. 그냥 한마디만 해 줬으면 되잖아요. 우리 사위가 출마하는데 꼭 맞서야겠냐? 이 한마디면 고경열 그 사람이 나서지 않을 거 아니에요?”
“그놈 막으면 다 끝나? 그놈 뒤에 더 무서운 놈이 등장하면? 그놈도 내가 막아주고? 이런, 한심하긴…. 꽃길만 걸을 생각이라면 지금이라도 당장 때려치우는 게 나아.”
할아버지의 메시지는 고모나 고모부를 향한 게 아니다.
손발이 되어줄 공직자를 만드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내게 말하는 것이다. 이것 또한 나를 시험하는 방법중 하나일까?
이십 대 애송이가 치러야 시험 치고는 너무 무겁지 않은가?
“최 서방.”
“네. 장인어른.”
“가서 당직자들과 협의해봐. 지방선거 중에 가장 큰 자리가 서울시장인데 두손놓고 있지는 않을 거 아닌가? 빨리 대책을 세우라고!”
두 사람이 허겁지겁 달려나가고 다시 둘만 남자 할아버지는 혀를 찼다.
“쯧쯧, 오냐오냐 자란 놈들은 조금만 버거우면 우는소리부터 한다니까. 나나 최씨 집안이나 애를 잘못 키웠어.”
“버거우면 누구나 울고 싶죠. 그걸 입 밖으로 내느냐 안 내느냐의 차이만 있는 거 아니겠어요?”
“버거울 때 주먹 쥐고 투지가 타올라야 제대로 된 놈이지. 울긴 왜 울어?”
할아버지는 내가 고모부의 편을 들어준다고 생각했는지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어떠냐? 넌 고경열이가 어떤 인물인지 아는 건 있어?”
당연히 잘 안다. 그가 서울시장 재임 시절 어떤 성과를 냈는지, 그리고 어떤 실수를 했는지 항상 뉴스에 나왔다. 하지만 지금은 모른척해야 한다.
“이름도 처음 듣습니다.”
“외교부 출신이다. 미국 대사까지 지냈고 정부 요직을 두루두루 거쳤지. 나이는 좀 있지만, 그건 안정감으로 포장할 테고 큰 먼지는 나오지 않을 게야.”
“고모부는 먼지가 많습니까?”
“순양그룹 사위가 먼지 묻을 일이 뭐가 있겠어? 장인이 순양 그룹 회장이고 마누라가 백화점 사장인데 돈 들고 뇌물 주겠다는 놈이 있다면 그놈이 미친놈이지.”
“그럼 상대할 만하겠는데요?”
“재벌 사위라는 게 문제지. IMF가 재벌 때문이라고 연일 언론에서 떠들어대는데,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곱게 보지 않을 게 아니냐?”
젊을 때 정치에 무심했던 것이 후회되기도 했다.
고경열이 시장이 됐을 때 누가 상대였는지, 어떤 선거였는지 단 하나도 기억에 없다.
“할아버지는 고모부를 도울 생각이 없으신가 봐요?”
“나? 내가 왜? 난 아쉬울 게 없어. 고경열이가 시장이 된다 해도 내 부탁을 거절할 놈도 아니고, 최 서방이 되더라도 마찬가지고. 양손에 꽃패 든 셈이지. 허허.”
웃으며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빛에는 즐거워하는 마음이 확 드러났다.
“넌 낭패로구나. 미디어 시티? 그거 만들어서 대아건설 회생 동력을 쓸 생각이었지?”
“겸사 겸사죠.”
“네 고모부가 지면 그 사업, 힘들어지겠어.”
“그러니까 꼭 이겨야죠. 그런 대형 사업이 없으면 대아건설은 정말 골칫거리가 되거든요. 돈 먹는 아귀가 될 겁니다.”
“거 참, 난처하구나. 그쪽에 우리 순양 사람을 잔뜩 보냈는데, 그놈들 밥 굶게 생겼어.”
이 정도면 장난이 분명하다. 대아건설이든, 아진그룹이든 전부 순양이라는 간판만 없을 뿐 한 가족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나 몰라라 할 리가 없다.
지금 내 반응을 확인하고 싶은 게다. 도와 달라고 매달리면 나 역시 고모나 고모부와 다를 바 없다. 할아버지 말씀처럼 주먹 불끈 쥐고 싸우는 투지를 보여줘야 한다.
“고경열 씨도 사람인데 찌르면 비명소리 나오는 약점이 한두 개는 있겠죠. 그곳만 찾아내면 승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모부가 재벌 사위라는 게 약점이지만 반대로 장점이 될 수도 있고요.”
“어떻게?”
“재벌 사위라는 게 장점이죠. 돈 넘치는 사람이니 적어도 세금 빼먹는 비리는 저지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할아버지를 좀 팔며 다녀도 되고요.”
“날 팔아?”
“네. 순양그룹 회장님께서 서울시를 위해 많은 사업을 벌일 거라고 약속하면 되죠. 아파트도 짓고요.”
“내가 왜 서울에서 사업을 벌여?”
“말만 그렇게 하는 거죠. 정치인 공약이라는 게 공수표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며 찍어주지 않습니까?”
할아버지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럴싸하긴 해도 필승전략은 아니라는 걸 알겠지?”
“이런 걸 차곡차곡 쌓아가며 싸우는 게 선거 아니겠어요?”
웃음이 번지는 걸 보니 안심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징징대지는 않으니까.
“할아버지. 딱 하나만 알려주십시오.”
눈치를 살피며 슬며시 말했다.
“뭘?”
“고경열 씨와 담판을 지으려면 누구를 징검다리로 할지 말입니다.”
“징검다리? 측근 말이냐?”
“네. 그자와 한 번쯤은 이야기해 보고 싶습니다.”
할아버지는 궁금함을 참지 못했다.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냐?”
“글쎄요. 만약 고모부보다 뜻이 통한다면 말을 갈아타도 되는 거 아닐까요?”
“넌 이미 고모부에게 큰돈을 투자하지 않았더냐? 말을 갈아탄다는 건 그 돈을 포기해야 하는데?”
“400억의 수십, 수백 배를 벌 수 있는 사업이 걸려 있습니다. 400억을 버리는 게 아니고 사천억을 버는 겁니다.”
“앞만 보고 뒤에 떨어지는 걸 줍지 않는다는 건 좋은 생각인데…. 가능성이 있을까?”
고경열이가 그 정도로 심지 굳은, 흔들리지 않는 인물인가?
“네 고모부가 미디어 시티를 공약에 넣고 떠들고 다닐 거야. 그런데 당선된 고경열이가 패자의 공약을 실행에 옮긴다고? 그런 일은 없을 것 같은데?”
물론 옳은 말이다. 그러니 말을 갈아탄다는 건 둘러대는 말일 뿐이다. 고경열이는 꼭 떨어져야 한다.
“그러니까 만나 보고 싶은 거죠. 뜻이 통한다면 선거기간 동안 디지털 미디어시티를 씹거나 헐뜯지 않을 거 아닙니까?”
할아버지는 내 생각이 마뜩잖은지 더는 말하지 않았다. 괜한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무튼 좋다. 내가 한번 줄을 놔 보마. 그런데 말이다. 난 네가 아무래도 악수(惡手)를 놓을 듯하구나.”
“조심하겠습니다. 분위가 봐서 힘들 것 같으면 그냥 인사만 드리고 끝낼게요.”
보통인사가 아닌 큰 인사를 드리고 끝장을 보면 된다.
* * *
“경보시스템?”
“네. 정보만 전달한다고 해서 끝나는 게 아니죠. 그 정보를 판단하고 위험할 때는 조심하라는 신호를 보냅니다.”
“자동차가?”
“네.”
“그러니까 이 모빌아이라는 이스라엘 회사가 그런 장치를 만든다는 거야?”
“지금은 시작 단계지만 언젠가는요.”
“거기다 백억이 넘는 돈을 줬다고? 아이고야….”
긴 한숨을 쉬는 걸 보니 아무래도 믿기 힘든가 보다. 자동차기 신호를 보내다니?
“삼촌. 그냥 제 판단과 감을 믿으세요. 이건 됩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어요.”
“뭔데?”
“여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고경열 씨가 나선답니다. 우리 고모부와 싸우면….”
“백 퍼센트 진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냐? 아직 발표는 없는 걸로 아는데?”
“할아버지 정보망이죠. 확실합니다.”
“순양그룹 정보망은 한국의 CIA라고 하더니. 역시!”
“감탄할 때가 아닙니다. 여차하면 DMC가 날아갈지도 몰라요.”
“그 양반은 엘리트 코스를 밟았어. 사무관으로 시작해 밑에서부터 차곡차곡 올라왔지. 관운이 좋아. 운 좋은 놈을 어떻게 이겨?”
“자식들 군 문제는 없습니까?”
“글쎄? 한번 알아볼까? 관직을 오래 했으니 아는 기자들 좀 돌려보면 나올 것 같긴 해. 좀 기다려 봐.”
오세현은 곧바로 전화 통화를 시작했다. 거의 한 시간 이상 이리저리 알아보고 표정이 밝아졌다.
“역시나. 대한민국 휴전선은 서민들이 지킨다니까.”
“면제?”
“본인도 면제, 형님도 면제, 아들 하나는 방위. 둘은 면제. 신의 자식들이구만.”
내가 손뼉을 짝 치며 좋아하자 피식 웃으며 말했다.
“네 고종사촌들은? 남자만 셋 아냐? 그놈들도 다 면제 아냐?”
“큰 형이 스물여덟인가? 둘째 형은 스물여섯. 막내는 나보다 두 살 많고. 아직 군대 갈 나이 아니죠. 다 유학 중이니까요.”
“됐네. 군대로 밀고 가면 되겠네.”
군대로 밀고 나가는 것이 만능은 아니었다.
본격적인 선거 운동 기간 전부터 사실상의 선거전이 시작되었다.
여당은 서울시장의 후보가 고경열이라는 것을 재빨리 흘렸고 야당도 고모부가 유력한 후보임을 알렸다.
고경열의 유일한 약점은 군 면제였고 고모부의 약점은 재벌 사위라는 것이었다.
양측이 서로를 헐뜯으며 개싸움을 벌일 때 할아버지가 내게 한 사람을 소개해주었다.
고경열의 오른팔이며 시장선거를 도맡아 지휘할 최고의 실세. 그리고 고경열이 시장에 되면 정무 부시장 자리를 차지할 사람이라고 했다.
서울시 정무부시장은 육천여만 원의 연봉 이외에 연간 1억여 원의 판공비를 쓴다. 서울시청 앞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고 상당히 넓은, 초록색 카펫이 깔린 2층 집무실을 갖는다. 또한 4명의 비서진을 거느리며, 기사가 딸린 그랜저 승용차도 제공 받는다. 확실한 오른팔만 이 자리의 주인이다.
공식 선거일을 며칠 앞둔 5월 12일.
걸그룹의 시조새, 이효리의 핑클이 MBC 음악캠프에서 R&B 발라드곡 BLUE RAIN으로 데뷔하는 걸 확인하고 광화문의 일식집으로 갔다.
먼저 자리를 잡고 고경열의 오른팔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약속 시각보다 30분 정도 늦게 나타난 오른팔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40대 후반 아니면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는 피곤에 쩔었는지 얼굴이 흙빛이었다.
어린놈이 자리 잡고 있는 걸 보자 흙빛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이 역력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진도준입니다.”
그는 온통 영어로 떡칠한 내 명함을 받자 이리저리 살폈다.
“혹시 유학파? 아니면 재미교포?”
“어쩌다 보니 외국계 투자사에서 일하지만 둘 다 아닙니다.”
“거절하기 힘든 분의 말씀이라 나오긴 했네만, 아진그룹을 인수한 회사 사람일 줄 몰랐는데….”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능한 한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아, 이거 실례했소. 김관혁이오.”
그가 내민 명함도 직함으로 떡칠한 것이었다.
“워낙 바쁘신 분이라 끼니 챙겨 드시기도 힘들 것 같아 간단히 요기라도 할 수 있도록 미리 주문해뒀습니다. 실례가 아니었으면 합니다.”
어린놈이 나이답지 않은 정중한 말투다 보니 그의 구겨진 표정도 조금은 펴진 것 같다.
“실례는 무슨, 지금은 라면도 감지덕지해서…. 일단 배 좀 채웁시다.”
김관혁은 젓가락을 들고 생선회를 입으로 쑤셔 넣었다. 술잔을 채워주자 손을 저었다.
“아직 일정이 빡빡해. 술은 사양.”
아무 말 없이 배를 채우고 나서야 젓가락을 놓고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입맛에 맞으신지…?”
“배만 부르면 됐지 뭐. 아무튼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모르겠지만 전부 거절합니다. 특히 우리 후보님을 한번 뵙게 해 달라는 건 절대 불가하니 그리 알아요. 자…. 이래도 할 이야기가 남았어요?”
그놈 참. 성질 급한 놈이네.
아니, 내가 어려서 무시하는 건가?
내가 윗사람 모시는 데는 이골이 났다. 당신 귀를 솔깃하게 해줄 테니 기대하라고.
“제가 뵙고 싶었던 분은 후보님이 아닙니다. 바로 당신입니다.”
손가락을 들어 그의 얼굴을 가리키니 그의 눈썹이 꿈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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