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101)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101화(101/183)
<101화>
‘엄청나게 화났다……!’
르귄은 그녀가 여태까지 봐온 모습 중에 가장 분노하는 중이었다. 곧이어 그 분노는 실체를 가지고 나타났다.
쿠우우우우우!
천공을 찢는 듯한 소리에 위를 올려다본 올라칸이 외쳤다.
“운석이다!”
구름을 가르고 나타난 거대한 운석이 그들 머리 위로 드넓은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대마법사를 제외한 모두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저건 메테오잖아!”
“미친 인간이 메테오를 썼다!”
운석은 세계수의 반의반도 안 되는 크기였으나, 저런 것이 지상에 떨어졌다간 이 일대는 전부 초토화될 터.
필로멜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느끼며 부친의 가슴팍에 매달렸다.
“르귄, 그만둬요! 우리까지 휘말린다고요!”
“괜찮아. 그전에 먼 곳으로 순간이동하면 돼.”
“아, 그런가요?”
아니, 안심할 때가 아니다제 목숨 걱정을 덜었더니 다른 이들의 안위가 생각났다.
드워프 둘과 토끼 한 마리가 서로 부둥켜안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해요! 하지만 우리 대화로 풀어요!”
“……그걸 원해?”
“네! 세계수한테는 들을 이야기도 있잖아요!”
“좋아. 네가 그리 말한다면.”
틱! 르귄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바로 지척까지 다가온 운석이 먼지처럼 사라졌다. 바람은 잦아들고 하늘은 말끔해졌다. 마치 조금 전의 소란은 거짓말이었다는 듯이.
세계수가 소리쳤다.
“그냥 환상이었잖아!”
마탑주는 성격 나빠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네까짓 놈들을 처리하자고 메테오 같은 귀찮은 방법을 쓸 리가 없잖아.”
어찌 되었든, 중앙평원에는 다시금 평화가 찾아왔다.
* * *
필로멜에게 대강의 사정을 들은 족장 드워프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가 뒤바뀌다니 그런 믿기지 않는 일이 실제로도 일어나는구먼…….”
세계수와 올라칸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댁들이 한 망상이 훨씬 더 믿기지 않는데요.’
크게 부어오른 족장의 혹을 보며 필로멜은 말을 삼켰다.
운석 대신 대마법사의 꿀밤 몇 방이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진 탓이었다.
족장 드워프는 상체를 살짝 굽혔다.
“어쨌든 필로멜 양에게 감사를 표하네. 비록 환상이긴 했으나 메테오의 위협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고, 부친도 잘 설득해 주지 않았나.”
설득이라 함은 드워프들이 매년 마탑으로 보내는 광물에 관한 이야기였다.
필로멜이 말을 꺼내자 르귄은 선뜻 대답했다.
“아, 그거? 이제 됐어. 보관할 자리도 없으니 그만 보내라고 전하는 걸 깜빡했네.”
그답다면 그다운 이유였다.
“허허, 덕분에 한시름 덜었어!”
족장은 흐뭇한 얼굴로 연신 수염을 쓰다듬었다.
르귄이 덤으로 수염에 걸린 마법도 풀어준 덕분에 이제 그는 자유롭게 제 수염을 가꿀 수 있게 되었다.
족장이 필로멜을 바라봤다.
“손등 좀 보여줄 수 있는가?”
“제 손등이요?”
“그래. 약소하지만 은인에게 보답하겠네.”
필로멜이 머뭇거리며 손등을 내밀자 그가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접촉한 부위에서부터 따듯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그녀의 손등에 새하얀 곡괭이 형태의 표식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이게 뭐죠?”
“우리가 그대에게 주는 가호와 칭호라네.”
가호와 칭호?
그것들과 비슷한 단어를 예전에도 들었었다.
확실히 요정 여왕 세르피아네가 이리 말했다.
“당신에게 요정의 가호를 내리겠습니다! 밝은 앞날이 당신 앞에 펼쳐지기를. 그리고 호칭도 선사하지요.”
나중에 르귄에게 그게 뭐냐고 물었지만 그는 대단한 것도 아니니 신경 쓸 필요 없다고만 했다.
족장이 눈을 빛냈다.
“오오. 이미 이마에 다른 칭호의 표식이 있군.”
‘이마?’
필로멜이 의문이 가득한 표정을 짓자 옆에 있던 올라칸이 손거울을 빌려줬다.
‘이건 또 뭐야!’
둥근 이마에 하얀 꽃 모양의 표식이 있었다. 세르피아네가 쪽, 하고 입 맞췄던 그 자리였다.
“요정족의 문양이구먼! 어디 뭐라고 쓰였는지 보자…….”
평범한 꽃 모양이 문자라도 되는 양 족장은 눈을 가늘게 떴다.
“요정족의 은인. 수많은 이들을 위협으로부터 구한 구원자……. 이야! 수줍음 많은 요정들에게 이 정도 찬사까지 받았다면 엄청난 일을 해줬겠어.”
쑥스러워진 필로멜은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었는데……. 아, 그렇다면 족장님은 뭐라고 쓰셨어요?”
“드워프 족의 은인. 그리고…… 흰 악마를 복종시킨 용사.”
“누가 누구를 복종시켜요?”
르귄이 있는 쪽을 흘깃거리던 족장이 조용히 속삭였다.
“아까 보니까 필로멜 양에게 꼼짝을 못 하더구먼. 세계수님의 열매까지 갖다 바치고 말일세.”
종족이 달라서 그런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다른 듯했다.
“……칭호는 그렇다 치고, 가호는 또 뭔가요?”
“일종의 축복을 빌어주는 개념인데……. 뭐, 대단한 힘은 아니지만 없는 것보단 나을 걸세!”
좋은 게 좋은 것이니 일단 받아두기로 했다.
필로멜은 족장과의 이야기를 마친 후에 르귄과 세계수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세계수는 필로멜을 보자마자 그녀의 뒤로 쏙 숨어버렸다.
“이봐, 저 미친 인간으로부터 나를 지켜라! 그럼 용사의 자격을 주마!”
겁에 질린 기색이 역력했다.
‘오늘따라 용사 찾는 이들이 많네…….’
그리 생각하며 필로멜은 손에서 불꽃을 뿜어내는 르귄을 만류했다.
“겁주지 마세요. 세계수님에게는 물어볼 것이 있잖아요.”
마법사는 쳇, 하고 혀를 차며 불을 꺼뜨렸다.
토끼가 필로멜의 어깨로 폴짝 뛰어올랐다.
“잘했다, 인간! 약속대로 용사의 자격을 주지.”
어디선가 거대한 나무의 가지 중 하나가 스르르 다가와 그녀의 머리에 무언가를 씌워줬다. 나뭇잎과 나뭇가지로 엮은 관이었다.
“……감사합니다.”
용사가 될 계획은 없었으나 이것도 받아두기로 했다.
“그런데 나한테 물어보고 싶단 것이 뭐냐? 용사는 환영이지만 미친 인간은 얼른 돌아가 줬으면 한다.”
필로멜은 드디어 중앙평원까지 찾아온 이유를 입에 담았다.
“혹시 다른 세계에 대해 알고 계시나요? 아주 오래된 어떤 책에서 본 내용입니다만.”
세계수는 회상에 잠겼다.
“다른 세계, 다른 세계라……. 매우 오랜만에 듣는 단어군.”
“아세요?”
“오래전에 그런 이야기가 세간에 나돌긴 했었지. 다른 세계에서 침입자가 올 테니 조심하라는 내용의 예언이지?”
“맞아요!”
토끼가 자랑스럽다는 듯 어깨에 힘을 줬다.
“그 예언을 받은 신관이 내 그늘 밑에서 수행했어. 나도 그때는 지금보다 작은 나무였는데.”
“다른 세계는 대체 어떤 세계죠? 침입자는 어떤 자고요? 사람이긴 한가요?”
필로멜의 질문 세례에 세계수는 난처한 기색을 띠었다.
“미안, 나도 자세히는 몰라.”
“아…….”
탄식이 흘러나왔다. 중앙평원까지 괜한 걸음을 한 모양이다.
“대신, 다른 세계를 엿볼 방법이라면 알아!”
“……엿본다고요?”
“그래! 그 방법을 쓴다면 네 눈으로 직접 다른 세계가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을 거야. 준비물이 필요하지만.”
“어떤 준비물이죠?”
“다른 세계에서 온 생물과 매개물, 그리고 옛날에 그 신관이 신에게 받은 성물이야.”
세계수는 말을 하던 중에 고개를 기울였다.
“가만, 그러고 보니 성물이라면 신관이 죽고 내가 보관했던 것 같은데……. 어디 뒀더라?”
“잘 떠올려 보세요.”
“워낙 옛날 일이라…….
”르귄의 손에서 다시금 불꽃이 일었다.“
저 많은 가지 중 반절이 타면 기억나지 않을까?”
“그만둬! 이 미친 인간아!”
새로 인정한 용사의 도움으로 간신히 반소될 위기를 모면한 세계수는 통탄했다.
“아이고, 말세다. 신은 어쩌자고 저런 미친 인간한테 저 큰 힘을 주셨나…….”
르귄은 코웃음을 쳤다.
“신이 주긴. 내 힘은 내가 잘나서 타고난 것인걸.”
토끼는 책임지고 내일 아침까지 성물을 찾아내겠다고 공언하며 자기 본체로 돌아갔다.
따라서 필로멜과 르귄은 오늘 밤은 이 근처에서 묵기로 했다.
족장과 올라칸이 드워프 마을로 그들을 초대했으나, 르귄은 초대를 무시하고 딸을 세계수의 상단부로 이끌었다.
그곳에서 필로멜은 그가 세계수에게 미친 인간으로 불리는 이유 중 하나를 알게 되었다.
‘자기 몸에 별장을 지어놓았으니까 그렇게 싫어하죠.’
나무의 몸통 위에는 벽돌집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들어와. 내가 경치 구경하고 싶을 때 머무는 곳이야.”
과연 르귄의 말대로 그 집 창가에서 내다보는 경치는 황홀했다. 끝도 없이 펼쳐진 평원은 웅장한 대자연 그 자체였다.
점심을 대충 과일로 때운 대신 저녁은 든든한 고기 요리였다. 르귄이 직접 요리해 줬다.
어디선가 잡아 온 고기를 손질하던 그에게 필로멜이 질문했다.
“요리도 할 줄 아세요?”
“식당에서 일했을 적에 어깨너머로 배운 수준이지.”
“식당에서 일하셨어요?”
“어렸을 때는 먹고살기 위해서 이것저것 했었지.”
“……태어나셨을 때부터 마법사이신 줄 알았어요.”
“힘을 각성한 것은 좀 커서야.”
“식당 일 외엔 어떤 일을 하셨는지 물어봐도 돼요?”
“상관은 없는데 일가친척 없는 고아가 했을 일이야 뻔하지.”
“그래도 알고 싶어요.”
그날 저녁, 그들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하늘을 수놓은 별들처럼 무수한 이야기였다.
창가에 기대서 밤하늘을 구경하는 필로멜을 마탑주가 슬그머니 떠봤다.
“필, 여기에 와서 좋아?”
“좋아요.”
“여행도 좋지?”
“네.”
“마탑에 오면 여행 자주 하게 해줄게. 어때?”
“좋긴 한데…… 당분간 여행은 안 하고 싶어요.”
“왜? 좋다며.”
“떠나보니 집이 최고예요.”
“……복잡하네.”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필로멜이 말했다.
“그래도 마탑에 가는 것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요.”
“진짜?”
“예전에는 마법사가 아닌 제가 가봤자 재미없을 것 같다고 여겼는데 생각이 바뀌었어요.”
분명 재미있을 거다. 이 사람, 그리고 세 형제들과 함께라면.
필로멜은 결심했다.
‘돌아가면 모두에게 <황녀 엘렌시아>의 내용에 대해 솔직히 털어놔야지.’
처음에는 다소 놀라겠지만 다들 진지하게 들어줄 테다.
악녀 ‘필로멜’을 안다고 하여도 그들이 자신에 대한 생각을 한순간에 바꿀 리는 없었다.
그녀는 느리게 깨달았다.
어쩌면 자신을 향한 그들의 관심이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더라도, 지금의 결정을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다.
필로멜은 르귄과 렉시온, 카딘, 그리고 제레미아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