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109)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109화(109/183)
<109화>
* * *
국빈관 응접실.
필로멜은 순순히 그녀를 만나줬다.
‘호위 기사 놈, 눈깔 한번 더럽게 뜨네.’
엘렌시아는 왜인지 익숙한 느낌을 풍기는 필로멜의 호위 기사를 흘겼다.
“애옹.”
필로멜이 기르는 고양이가 의자 팔걸이 위에서 돌조각을 굴리며 놀고 있었다. 기분 탓인지 고양이마저 엘렌시아를 노려보는 듯했다.
역시 그 주인에 그 고양이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입을 열었다.
“너야?”
어차피 알맹이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들통이 났으니, 더는 본 성격도 숨길 필요가 없었다.
필로멜은 여유롭게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뭘요?”
“네가 내 아이템을 다 가져갔냐고!
“아이템이라니, 무슨 말씀인지 저는 도통…….”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표정에 깜빡 속아 넘어갈 뻔했다. 그러나 자신은 그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이 망할 년이!’
엘렌시아는 이를 빠드득 갈았다.
마음 같아서는 이 여자를 당장 제거하고 싶었다.
하지만 필로멜은 로잔느와는 다르다. 암살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성공하더라도 황제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다.
‘할 수만 있다면 더 일찍 했겠지.’
처음부터 거슬렸다. 없애버리고 싶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저 여자를!
엘렌시아는 끓어오르는 증오심을 간신히 억눌렀다.
‘만약 필로멜이 정말 빙의자고, 나보다 높은 호감도를 가지고 있다면 조심해야 해.’
일단은 필로멜을 회유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러다 방심했을 때 처리하면 된다.
엘렌시아는 고개를 수그리고 목소리를 깔았다.
“미안.”
필로멜의 오른쪽 눈썹의 끝이 올라갔다.
“뭐가요?”
“내가 그동안 너한테 날 세운 것 때문에 네 기분이 상했다면 사과할게. 미안해.”
“…….”
“괜히 너만 보면 경쟁심이 생겼나 봐. 속상했어. 아빠가 나보다 너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확하게는 속상하다기보다는 화가 났지만.
“네가 사라졌을 때, 아빠는 너만 찾았거든. 처음 만난 나는 안중에도 없었어.”
실제로 그렇지는 않았으나 그런 것과 거의 다름없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그리 느꼈으니까.
엘렌시아는 말을 계속 이었다.
“선생들은 네 칭찬만 하고, 나사르는 널 더 좋아하는 것 같고. 아빠도…….”
“저기요.”
한창 연기에 감정이 실리던 차에 말이 끊겼다.
엘렌시아는 짜증을 참으며 “왜?” 하고 물었다.
“아빠라면 황제 폐하에 대한 이야기죠?”
“뭐 그렇게 당연한 걸…….”
“당신 아빠가 아니잖아.”
“그럼 네 아빠니!”
못 참고 버럭 소리를 지른 엘렌시아를 향해 필로멜은 피식, 하고 웃었다.
“난 내 아빠라고 한 적 없는데요? 엘렌시아의 아빠지.”
굳은 표정의 엘렌시아를 보며 필로멜은 말했다.
“당신, 아까부터 하는 말이 이상하다는 것 알아요?”
그녀는 티스푼으로 찻물을 저었다. 우아한 동작이었다.
“왜 본인이 진짜 엘렌시아라도 되는 것처럼 말해요?”
“……그야 지금은 내가 엘렌시아니까.”
“그 아이의 몸을 차지했다고 해서 엘렌시아가 되진 않죠.”
가만히 들어줄 수 없는 발언이었다.
엘렌시아는 두 팔로 힘껏 테이블을 쿵 내리쳤다.
“내가 엘렌시아야!”
“어제 당신의 기억을 본 제게 그렇게 말해도…….”
“황제한테는 내가 엘렌시아나 다름없잖아?”
“예?”
“뭐가 달라? 어차피 황제는 진짜 엘렌시아를 모르는데!”
필로멜은 말이 없었다. 자신이 내뱉은 말의 요지를 파악하려는 듯싶었다.
엘렌시아는 차근히 설명했다.
“황제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 몸 안에는 내가 들어와 있었지. 이 몸은 그와 그가 사랑했던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몸이야. 이 얼굴은 아내를 쏙 빼닮았고.”
“……그래서요?”
“중요한 것은 알맹이가 아니다, 이 말이야.”
여전히 필로멜은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그전까지 이 몸에 있었던 영혼이 누군지가 뭐가 중요해? 황제가 아는 엘렌시아는 나인걸.”
“저는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생각해 봐. 황제가 엘렌시아를 사랑하는 이유는 딸이기 때문이야. 외적인 이유지. 결코 성품이나 영혼 같은 내면적인 부분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고.”
“그러니 내용물이 전혀 다른 사람이어도 괜찮다?”
“맞아. 중간에 영혼이 바뀌어서 알고 지내던 딸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뭐 어때.”
필로멜은 한숨을 쉬며 검지로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좋아요. 폐하는 그렇다 치고 다른 사람들은요? 카트린이나 마을 사람들은 진짜 엘렌시아에 대해 아는데요.”
“그 사람들이 중요해? 카트린은 죄인이고, 마을 사람들은 두 번 다시 볼 일도 없는 자들인데.”
“진짜 엘렌시아한테는 소중한 사람들이에요.”
엘렌시아는 콧방귀를 꼈다.
“아, 그래? 안됐네. 그래도 어쩌겠어? 이제 그 엘렌시아는 사라졌는걸.”
“……당신, 정말 진짜 엘렌시아에게 미안한 감정은 콩알만큼도 없군요.”
“안타깝게 생각해. 그런데 내가 왜 미안해해야 하지? 내가 남의 몸을 억지로 빼앗기라도 했어? 너도 내 기억을 봤으니 알잖아.”
자신은 불의의 사고로 죽었다. 그리고 눈 떴을 땐 엘렌시아의 몸 안이었다.
“그래도 지금 그 태도는 너무 뻔뻔해요. 적어도 그 애가 좋아했던 사람들을 존중해…….”
“그만해! 우리가 이런 문제로 입씨름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하아, 그래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한데 해보세요.”
필로멜의 건방진 작태가 심히 거슬렸으나 엘렌시아는 애써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우리가 서로 적대해야 할 이유가 없어.”
“저를 먼저 적대한 쪽은 당신인 것 같은데요.”
“……그건 미안해. 아까 사과했잖아. <황녀 엘렌시아>를 훔치라 시킨 것도 도가 좀 지나쳤어.”
“좋아요. 계속 말해보세요.”
“나는 네가 부러웠을 뿐이지 이렇다 할 악감정은 없었어.”
“정말인가요?”
“당연하지. 내가 너한테 크게 잘못한 적은 없잖아. 도둑질을 시킨 것도 단지 내 책을 얼른 되찾고 싶었을 뿐이야.”
“흐음.”
“필로멜, 그러니까 내 책과 아이템들을 돌려줘.”
“글쎄, 어떻게 할까.”
필로멜이 이도 저도 아닌 태도를 보이자 속이 바짝 탔다. 엘렌시아는 동정심에 호소하기로 했다.
“내가 불쌍하지도 않아? 난 끔찍하게 죽은 데다 이 낯선 곳에 홀로 떨어졌어.”
두 눈을 감고 있던 필로멜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이것만 알려주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게요.”
“그래그래. 뭔데?”
“<황녀 엘렌시아>는 뭐죠? 당신이 게임을 토대로 집필한 소설인가요?”
이미 필로멜도 자신의 기억을 봤기 때문에 이것은 숨길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래, 맞아.”
“왜 그런 소설을 썼죠?”
엘렌시아는 필사적으로 질문의 의도를 궁리했다.
‘그 소설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잘 모르나? 그러면 게임을 라이트하게 플레이한 유저일까?’
‘돌아온 황녀님의 두근두근 궁정 생활’의 팬이라면 모르기 힘든 내용이었다.
‘아니, 애초에 캐릭터가 아니라 정말 빙의자였어?’
머리가 터질 것 같이 복잡했다. 필로멜에 관해 알아낸 바는 없이 안개 속에서 헤매는 느낌이었다.
엘렌시아는 겨우 적당한 대답을 골라냈다.
“그게 내 일이었어. 게임의 공식 소설을 쓰는 것.”
필로멜이 그녀의 진의를 가늠하는 듯한 눈빛을 던졌다. 마음속에서 조바심이 일었다.
“응? 부탁할게. 내 책과 아이템들만 돌려줘.”
“그것만 돌려주면 돼요? 제게 더 원하는 것은 없고요?”
“물론이지!”
“정말이요? 돌려주기만 하면 제가 황궁에 머물러도 전처럼 시비를 걸지 않을 건가요?”
엘렌시아는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얘는 염치도 없나? 가짜인 주제에 뭘 계속 빌붙어 있겠다는 거야. 설마…… 황제의 입적 제안을 받아들일 셈인가?’
절대 싫다! 이런 가짜와 자매가 된다니 상상만으로도 치가 떨린다. 사랑받는 공주님은 단 한 명이어야만 의미가 있었다.
엘렌시아는 떨리는 주먹을 숨기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건 좀 서로 불편하지 않을까? 나는 이왕이면 제2의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어.”
“그래서 나는 떠나라?”
“꼭 그러란 것은 아니지만, 너도 그편이 네 인생을 찾기에 좋잖아. 여기 있어 봤자 뭐 해.”
“그건 그러네요.”
엘렌시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러면 떠나는 거지? 아이템과 책은 돌려주고?”
필로멜의 낯에 산뜻한 미소가 떠올랐다.
“거절할게요.”
엘렌시아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어째서!”
필로멜은 느긋한 태도로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당신이 하는 말은 전혀 신뢰가 가지 않거든요. 제게 악감정이 없었다면 확성기로 제 악담은 왜 퍼트렸어요?”
“그, 그건…….”
낭패였다. 설마 이 여자가 거기까지 파악하고 있을 줄이야.
“당시 저는 제 발로 이곳을 떠난 후였죠. 당신의 신경에 거슬릴 이유가 없었을 텐데.”
“말했잖아! 사람들이 너만 찾아서 질투심이 났다고.”
“그렇다고 사람을 온 국민의 적으로 만들어요? 만일 그때 유난히 저를 싫어하던 백성들에게 잡혔다면 저는 이 자리에 못 있었을 수도 있어요.”
“비약하지 마……!”
엘렌시아는 답답함에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좀 나를 이해해 주면 안 돼? 네가 내 아빠 밑에서 호의호식하며 지내던 동안 나는 네 엄마한테 구박당하며 살았어.”
가슴속에서 묻어 두었던 억울함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 과하게 질투할 수도 있는 법이잖아? 얼른 네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었을 수도 있잖아?”
“그건 진짜 엘렌시아의 사정이고요.”
“엘렌시아가 나잖아!”
“주장이 뒤죽박죽이네요. 언제는 진짜 엘렌시아 따위 상관없는 것처럼 굴다가 지금은 또 매우 생각해 주는 척하죠. 그것도 본인을 엘렌시아와 동일시하면서.”
필로멜의 얼굴에 노골적인 경멸이 떠올랐다.
“너에게 유리할 때만 그 아이의 사정을 끌고 오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