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110)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110화(110/183)
<110화>
엘렌시아, 아니 엘렌시아의 몸을 차지한 존재는 눈을 부릅뜬 채 침묵했다. 잠시 후에 그녀가 스산하게 말했다.
“좋아. 네 마음대로 해. 너는 아무래도 내가 싫은 듯한데…….”
“맞아. 네가 나를 싫어하듯이 나도 네가 싫어.”
필로멜은 아예 말을 놓기로 한 모양이었다.
황녀는 아득, 이를 갈았다.
“나가서 아무나 잡고 떠들어 봐. 황녀의 몸에 다른 영혼이 깃들었다고. 누가 진지하게 들어나 줄 것 같아?”
“그건 모르는 법이지.”
“천만에. 다들 네가 진짜 황녀 자리를 빼앗고 싶어서 나를 모함한다고 여길걸.”
“…….”
“지금 여기에서 내 손을 잡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나 마.”
그 말만을 남긴 채 그녀는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이제는 내가 엘렌시아야, 내가 엘렌시아라고.”
강박적으로 중얼거리며 처소로 돌아온 그녀의 눈에 거울이 들어왔다. 매끄러운 표면에 무서운 표정을 지은 소녀의 얼굴이 비쳤다.
“……엘렌시아의 얼굴.”
역시 자신은 엘렌시아였다.
“흣, 흐…… 흐흐하하하!”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신이 엘렌시아가 아니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또한 자신이 엘렌시아인 편이 바람직했다.
‘바보같이 착해빠진 예전의 엘렌시아였다면 그 가짜에게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했겠지.’
분명 멍청하게 손 놓고 필로멜이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모습을 구경만 했을 테다.
엘렌시아는 거울에 비친 소녀를 보며 말을 걸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네 아빠랑 약혼자 모두 되찾아줄게.”
그러고는 한바탕 웃었다.
“…….”
그 괴상한 광경을 유모가 지켜보고 있었다.
똑똑, 그때 하녀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에밀리였다.
“용사 킬리언 님과 에스칼 백작님께서 당도하셨습니다.”
“지금 갈게. 그 전에…….”
엘렌시아는 에밀리에게 다른 하녀를 불러오라고 명했다.
그 하녀에겐 따로 지시 내린 사항이 있었는데, 슬슬 임무를 마쳤을 때였다.
에밀리가 다른 곳에 있던 하녀를 찾아오자 엘렌시아는 물었다.
“알아보라고 한 것은 어떻게 됐지?”
“네. 전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산델라 지역에는 정체불명의 질병을 앓고 있는 자들이 몇몇 있었습니다.”
“증상은?”
“전신이 파랗게 변하고 체온이 떨어지는데, 특이한 점은 환각이 보인다고 합니다.”
역시나. 엘렌시아는 만족에 찬 미소를 띠었다.
“잘했어. 상을 줄게.”
보석함에서 에메랄드 귀걸이 한 짝을 꺼내서 하녀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저, 그 주변 지역의 상황도 알아볼까요?”
엘렌시아는 ‘욕심도 많기는.’ 하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녀는 아쉬운 얼굴로 물러갔다.
근래 들어 엘렌시아는 궁인들의 호감을 얻기 위하여 금품을 뿌리다시피 했다. 확성기가 없으니 이런 식으로라도 명성도를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비용 대비 효과가 어째 영 별로였다. 특히 하녀들은 저들끼리 있을 때는 켈튼 백작 영식을 때려눕힌 필로멜을 칭송했다.
‘쳇, 그런 속 보이는 위선이 뭐가 좋다고.’
미간을 찌푸리던 엘렌시아는 곧 기분을 바꾸고는 흥얼거렸다.
‘조금만 있어 봐. 내가 고것보다 더 칭송받게 될 테니.’
그러기 위해 오늘의 만남을 제안했고, 그러기 위해 하녀에게 조사를 시켰다.
어제 잠깐뿐이지만 <황녀 엘렌시아>가 손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단숨에 자신이 원래 가졌어야 할 명성을 얻을 방법을.
엘렌시아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며 응접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남궁, 국빈관.
에밀리가 물어다 준 정보를 들은 필로멜은 생각에 잠겼다.
골몰하던 제레미아가 말했다.
“분명 무슨 꿍꿍이속이 있다. 대체 뭘까.”
푹신한 안락의자에 파묻힌 필로멜이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대충 어떤 생각인지 감이 와요.”
“그게 뭐지?”
에밀리는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며 엘렌시아와 에스칼 부자 사이에 오갔던 대화까지 들었다.
‘앞으로 하려는 일을 철저히 숨길 의향은 없었겠지.’
애초에 눈에 띄지 않게 실행하기도 어려운 작업이었다. 꽤 유명한 약초 중에 하나인 산살초를 대량으로 사들이는 일은.
산살초. 어릴 적에 유스티스의 숙취를 풀어주기 위해 필로멜이 자주 차로 우렸던 풀.
‘산살초에는 숙취 해소 말고도 숨겨진 놀라운 효능이 있지.’
이 또한 <황녀 엘렌시아>에 적혀 있는 내용이었다. 엘렌시아는 어제 그 부분을 본 듯했다.
“그래도 설마 이런 짓을 벌일 줄은…….”
“왜, 뭔데 그래?”
“자세한 내용은 차차 설명해 줄게요. 지금은 그런 것보다 이게 중요하죠.”
필로멜은 조그만 돌조각을 손안에서 굴렸다. 조금 전까지 고양이 모습을 한 르귄이 가지고 있던 물건이었다.
필로멜이 마력을 띤 돌조각을 살짝 누르자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도 원해서 이 몸에 들어온 것은 아니야.”
“나가서 아무나 잡고 떠들어 봐. 황녀의 몸에 다른 영혼이 깃들었다고. 누가 진지하게 들어나 줄 것 같아?”
몇 시간 전, 엘렌시아가 이 자리에서 내뱉은 말들이었다.
주의 깊게 음성을 확인한 뒤에 필로멜이 흐뭇하게 말했다.
“기대보다 선명하게 녹음이 되었네요.”
필로멜을 사이에 두고 제레미아와 반대편 방향에 앉아 있던 르귄이 물었다.
“마음에 들어?”
“쏙 들어요. 그 사람의 장황한 헛소리를 인내심 있게 들어준 보람이 있네요.”
필로멜이 가지고 있는 푸른색 돌조각은 이른바 ‘녹음석’이라는 마도구였다. 원래대로라면 결계의 영향으로 허가받지 못한 마도구는 황궁 내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엘렌시아가 방심하고 주저리주저리 자기 이야기를 떠벌린 것도 무리는 아니지.
’그녀는 단지 미처 파악하지 못했을 뿐이다. 필로멜이 마탑주 아버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녹음석도 제레미아의 변신 마법 목걸이처럼 르귄이 손을 봤다.
‘단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르귄 역시 이러한 마도구를 대량으로 만들어 내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마도구의 공정 작업에 희귀한 재료와 적잖은 수고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하기야 마탑주라고 해서 그런 짓이 가능했다면 이미 세상은 마탑이 지배했겠지.’
제레미아가 녹음석을 바라봤다.
“거기에 녹음된 내용을 터트릴 건가?”
“터트릴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써먹긴 해야죠.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해요.”
가짜 엘렌시아에게 빠져나갈 구멍은 얼마든지 있었다.
예를 들어, 녹음된 음성이 그저 자신의 목소리와 닮았을 뿐이라 주장하면 된다. 혹은 필로멜의 말에 장난으로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었다고 우기거나 말이다.
‘그렇게 나온다면 미심쩍은 구석은 남지만 더는 몰아붙일 근거도 없어.’
어찌 되었든 이것은 고작 녹음에 불과했고, 상대는 신에게 미들네임을 하사받은 황녀였다. 그런 황녀의 파격적인 정체를 까발리는 일이니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생각해 둔 수라도 있어?”
르귄의 질문에 필로멜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 여자를 더욱 심리적으로 궁지에 몰아넣어야 해요.”
가짜 엘렌시아는 별빛 상점의 상품들을 필로멜에게 빼앗긴 탓에 초조함에 휩싸였다. 전과 달리 표정 관리에 허점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필로멜이 확성기에 대해 언급했을 때, 그녀는 눈에 띄게 당황한 모습을 보였다.
“당신이 하는 말은 전혀 신뢰가 가지 않거든요. 제게 악감정이 없었다면 확성기로 제 악담은 왜 퍼트렸어요?”
“그, 그건…….”
덕분에 반신반의하던 추측이 진실로 굳어졌다. 그리고 필로멜이 그자가 가진 크나큰 모순점을 지적하자…….
“너에게 유리할 때만 그 아이의 사정을 끌고 오지 마.”
“……!”
가짜 엘렌시아가 여태껏 쓰고 있던 가면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자는 제 분을 못 이겨 필로멜에게 아이템을 받아내야 한다는 소기의 목적조차 잊은 채 돌아갔다.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에밀리 또한 이곳에 다녀간 뒤로 황녀의 상태가 좀 이상하다고 보고했다.
“미친 사람처럼 시도 때도 없이 웃었다가 인상 썼다가 해요. 유모도 그 모습이 무서운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니까요.”
지금이 엘렌시아를 몰아붙일 적기였다.
‘궁지에 몰릴수록 허점은 더 많이 드러나는 법.’
그리고 그자가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가 되었을 때, 알아내야 했다.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황녀 엘렌시아>의 비밀을.
제레미아가 물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몰아넣을 거지?”
“엘렌시아가 이번에 에스칼 백작과 손잡고 벌이려는 일을 역이용하면 될 듯싶어요. 아마도 그들은…….”
필로멜이 자세히 설명하려던 순간, 문밖에서 낸시의 목소리가 들렸다.
“필로멜 님, 하운즈 상단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 * *
얼마 후.
남궁 응접실에는 하운즈 상단의 임시 주인 미첼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또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미첼은 깍듯하게 인사했다.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인데도 그녀는 꾸준히 국빈관을 찾았다. 상단의 이런저런 동향에 관해 필로멜에게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지난번에 다시 카트린을 찾았을 때, 필로멜은 친모에게 상단에 대한 소식을 알려줬다.
상단을 어떻게 하고 싶냐 물으니 그녀는 손사래 쳤다.
“에이, 여기 갇힌 처지에 내가 뭘 어쩌겠어. 원한다면 상단은 네가 가지렴.”
다만 부친이 재산의 반을 본인에게 남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서 조금은 기쁜 듯 보였다.
“부끄러워서 없는 셈 친 딸인 줄로만 알았는데…….”
부모 자식 관계는 참으로 복잡한 것이라고 느끼며 필로멜은 탑을 내려왔다.
아무튼 상속자인 카트린이 운신 불가능한 이상 상단의 실질적인 주인은 모친의 대리자인 필로멜이었다.
‘그러고 보니 하운즈 상단은 자금난에 허덕인다고 했어.’
필로멜의 후광 덕에 망하지는 않았으나 그런 일을 겪고도 재정이 멀쩡할 리는 없었다.
좋은 생각을 떠올린 필로멜은 입을 열었다.
“미첼, 에스칼 상단에 관해서 잘 아시나요?”
“경쟁업체이니 당연히 알지요. 에스칼 백작의 동생이 운영하는 상단 아닙니까.”
“그래요. 제가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에스칼 상단에서 조만간 산살초를 대량으로 사들일 거예요. 독점할 정도로요.”
‘독점’이라는 단어에 미첼의 눈빛이 바뀌었다. 상인의 눈이었다.
필로멜은 역시 미첼이야말로 상단주에 어울리는 재목이라 생각하며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하운즈 상단에서 더 신속하게 산살초를 확보할 수 있나요?”
미첼은 지체 없이 대답했다.
“할 수 있습니다. 본디 약초는 그곳보다 저희가 중점적으로 취급하는 품목입니다. 더 많은 거래처와 관계를 구축하고 있죠. 또한…….”
그녀의 대답에선 자부심이 흘러넘쳤다.
“에스칼 백작을 등에 업고 최근 몇 년 새 급성장한 신생 상단보다는 하운즈 쪽이 더 노하우가 있다고 자신합니다.”
필로멜은 잠시 뜸을 들이다 다른 말을 했다.
“어쩌면 제 선택이 틀렸을 수도 있어요. 만일 그렇다면 상단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받겠죠.”
“…….”
“그럼에도 저를 믿고 제 지시를 따라주실 수 있나요?”
“물론이죠! 레이디 필로멜이 아니었다면 이미 망했을 상단입니다.”
필로멜은 미소 지으며 미첼에게 그들이 해야 할 바를 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