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111)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111화(111/183)
<111화>
* * *
서궁, 황녀의 개인 응접실.
엘렌시아는 마주 보고 앉은 남자를 향해 날카롭게 물었다.
“그게 정말인가요? 하운즈 상단에서 산살초를 한발 먼저 사들이고 있다고요?”
에스칼 백작의 동생이자, 에스칼 상단의 주인. 티볼트 에스칼은 진땀을 빼며 대답했다.
“그러합니다, 전하. 아무래도 정보가 새어 나간 것이 아닐지…….”
엘렌시아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하운즈의 실질적인 주인이 누군지 모르는 자는 없었다.
“필로멜!”
보나마나 자신의 움직임을 엿듣고 뒤늦게 산살초를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떠올린 듯했다.
게임을 했거나 <황녀 엘렌시아>를 읽었다면 필로멜 역시 그 약초의 효능을 알고 있을 터.
엘렌시아는 필로멜이 서궁에 심은 첩자가 누구일지 고민했다.
에스칼 측일 수도 있지만 그녀의 주변에서 정보가 새어 나갔을 확률도 부정 못 했다.
‘진작 물갈이를 해야 했어!’
지혜의 비약 하나가 사라졌을 때부터 무언가 이상하다 싶었는데, 그냥 넘겼더니 찜찜함은 신발에 붙은 껌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물갈이를 실행에 옮기지 못한 데에는 중대한 이유가 있었다.
‘……착한 척 좀 작작할걸.’
별 이유도 없이 궁인을 갈아치운다니, ‘착한 엘렌시아 황녀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
필로멜과 다른 점을 보이겠답시고 속없이 착한 척한 것이 제 발목을 잡았다.
그때 티볼트가 황녀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어찌할까요? 일단 저희 측에서 확보할 수 있는 분량만이라도 확보를 할까요?”
“안 돼요!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시장에서 독점적인 위치를 차지해야 해요!”
“……하오나 하운즈 상단이 워낙 여러 공급처와 오랫동안 거래를 해왔다 보니 그들도 저희보다는 하운즈 상단을 우선합니다.”
엘렌시아는 우유부단한 인상의 남자를 노려봤다. 티볼트란 사내는 형의 막대한 지원 없이는 절대 성공하지 못했을 자였다.
‘당장 동원할 수 있는 인간이 이런 놈밖에 없다니…….’
분통이 터지지만 하는 수 없었다. 킬리언을 확실히 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에스칼 가문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해야만 했다.
잠시간 고민하던 엘렌시아는 훗, 하고 웃었다.
“상대가 우리를 염탐하고 있다면 이쪽의 정보를 알아도 따라 할 수 없는 방법을 쓰면 됩니다.”
“예?”
“에스칼이 하운즈가 쳐주는 값의 두 배 이상을 지불하겠다고 하세요.”
“두, 두 배요? 예산 초과입니다.”
“상관없어요. 원하던 목표를 달성한다면 들인 돈의 수십 배에 이르는 수익이 들어올 테니까.”
“그렇지만 갑자기 진행하는 일이라 저희도 예산이 그리 넉넉하지는…….”
“제가 드린 자금도 있잖아요.”
“부족합니다!”
엘렌시아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려쳤다.
“부족한 분은 에스칼 백작에게 빌리세요!”
“형님이 빌려주실지…….”
정말이지 열 받게 만든다.
“백작에게 전하세요. 내가 곧 폐하께 킬리언과의 약혼을 허락해 달라 말씀 올리겠다고.”
황녀의 약혼자란 즉, 차기 황제의 부군. 백작은 반드시 아들을 그리 만들고 싶을 테다.
그 자리의 가치를 겨우 이해했는지 티볼트도 이번에는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엘렌시아는 “아, 참.”하고 덧붙이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두 배 이상의 값을 치러도 좋으니 하운즈 상단이 확보한 산살초도 사들이도록 하세요.”
“안 팔려고 할 텐데요……?”
“당연히 사람을 매수해서 몰래 빼돌려야죠.”
필로멜에게 단 한 포기의 산살초도 넘길 생각은 없었다.
티볼트가 돌아간 후, 홀로 응접실에 남은 엘렌시아는 허공에 대고 소리쳤다.
“그래, 필로멜! 어디 한번 해봐! 네 빈약한 상단이 얼마나 돈을 쓸 수 있는지 보자!”
그리고 시간은 흘렀다.
티볼트가 사람을 통해 성공적으로 목표했던 물량을 확보했음을 알렸다.
물론 하운즈 상단에서 확보했던 산살초 역시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 임시 상단주에게 반감을 가진 하운즈 상단의 직원을 잘 구슬렸다고 한다.
엘렌시아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며 명령했다.
“그 애를 데려와.”
얼마 안 돼 한 하녀가 다른 하녀의 손에 이끌려 왔다.
“으으으으…….”
앓는 소리를 내뱉는 하녀의 얼굴이 푸르죽죽했다.
다른 하녀들은 모두 복면과 장갑으로 중무장을 한 상태였고, 엘렌시아도 하녀들에게 그것들을 건네받아서 착용했다.
혹시 모를 전염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가자.”
엘렌시아는 하녀들을 대동하고 서궁을 나섰다.
목적지인 황궁 의료원에 도착하자 그녀는 즉시 최고 궁의가 있는 의원실로 향했다.
썩 마음이 내키는 상대는 아니었으나 약을 제조하는 데 그만한 인재가 없었다.
최고 궁의가 엘렌시아를 알아보고 예를 갖추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이곳엔 어인 일로…….”
“제 하녀 중 한 아이가 정체 모를 병에 걸려서 왔어요.”
최고 궁의의 시선이 황녀의 뒤에 있는 인물에게로 향했다.
환자를 발견하자마자 궁의는 하녀를 침대에 누이고 진찰하기 시작했다.
엘렌시아는 그 옆에 서서 하녀가 병에 걸리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이 아이는 며칠 전에 제 부탁으로 산델라 지방에 갔다가 왔는데, 어제부터 상태가 이래요.”
“전체적으로 피부가 파랗고 열이 나는군요. 게다가 산델라 지방이라면…….”
“환각도 본다고 해요. 이 아이가 그곳에 갔을 때 비슷한 증상을 앓는 사람을 여럿 봤다고 했는데, 병이 옮은 게 아닐까요?”
“……자세한 것은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제 소견으로는 마샨 병인 듯합니다.”
최고 궁의는 찬찬히 설명했다.
몇 달 전부터 이웃 나라인 엘리타에서 마샨 병 환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는데, 산델라를 비롯해 엘리타와 국경을 마주한 제국의 남부에도 병이 번졌다고 한다.
엘렌시아의 입꼬리가 아무도 모르게 살짝 올라갔지만 목소리에는 비감이 서렸다.
“제 탓이에요. 제가 그런 곳으로 심부름을 보낸 탓에……. 엘리, 미안해.”
이름이 불리자 병든 하녀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으나 사실 그녀의 이름은 엘리가 아니었다.
이자는 엘렌시아의 요구로 티볼트가 수배해 온 마샨 병 환자로, 잠시 하녀복을 입고 하녀의 이름을 빌렸을 뿐이다.
가짜 하녀는 엘렌시아가 마샨 병 치료제 개발에 관여할 구실에 불과했다.
마샨 병, 원작 게임과 <황녀 엘렌시아>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흉악한 전염병.
지금은 비교적 치사율과 전염성이 낮지만 마샨 병은 여러 사람에게 전파되며 변이되고 만다.
지금으로부터 약 일 년 후에는 엘리타의 국가체계는 붕괴하기 직전에 이르고, 제국 역시 전역에서 병이 창궐한다.
그럴 때 국가를 위기에서 구하는 자가 바로 나타난 지 얼마 안 된 황녀, 엘렌시아다.
엘렌시아의 고향 마을 역시 남부에 위치한 까닭에 상대적으로 이르게 첫 발병자가 나왔다.
외지에서 상품을 들여오던 잡화점 주인이 어느 날부터 마샨 병의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천만다행으로 평소 애주가였던 그자는 숙취에 좋은 산살초를 입에 달고 살았다.
남자의 상태는 곧 호전되었고, 자신의 증세가 평범한 감기와는 좀 달랐다고 여기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엘렌시아는 이때의 기억을 통해 마샨 병의 치료제에 관한 힌트를 얻는다. 잡화점의 단골이었기 때문에 주인의 증상을 눈여겨본 덕이었다.
황녀의 주장으로 황궁 의료진은 산살초를 연구한 끝에 치료제를 개발해 낸다.
‘이 간단한 내용이 기억이 안 났지.’
필로멜에게 잠시 <황녀 엘렌시아>를 건네받았던 그날 밤, 비로소 겨우 떠올렸다.
무서운 병이 유행한다는 내용은 기억났다. 주인공이 치료제의 주재료가 되는 약초를 발견해 낸다는 것 또한 기억났다.
“그런데 그 약초가 정확히 뭐였는지 모르겠어……!”
마샨 병을 이용하기로 마음먹고 기억을 더듬었던 때, 엘렌시아는 절규했다.
하다못해 엘렌시아가 산살초에 주목하게 된 경위라도 기억났으면 좋으련만 그조차 흐릿했다.
<황녀 엘렌시아>를 막 썼을 무렵이면 몰라도, 지금 와서 그런 세부적인 사항까지 정확히 기억할 리가 만무했다.
하여간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엘렌시아는 품에서 산살초를 꺼내 들었다.
‘원래는 벌써부터 산살초에 대해 밝힐 생각은 없었지만…….’
지금은 긴급 사태였다. 필로멜에게 대항하려면 호감도를 끌어 올려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높은 명성도가 먼저 필요했다.
게임에서는 같은 선택지를 골라도 명성도가 높으면 호감도 더 많이 쌓였다.
‘아빠도, 나사르도 이걸로 나를 다시 보게 되겠지.’
엘렌시아는 최고 궁의에게 산살초를 보이며 말을 꺼냈다.
“혹시 이 풀이 병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예전에 제가 마을에서 살 때…….”
잡화점 주인이 병에 걸리는 것은 더 나중 일이었으나 지금 말하기로 했다. 어차피 누가 자세히 조사하지도 않을 테니.
그런데.
산살초를 본 최고 궁의는 경쾌하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산살초는 마샨 병의 치료제로 사용됩니다.”
“네?”
“엘리타에서 이미 그 효능이 검증되어서 제국에서도 치료제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 양이 충분치 않아 모든 발병지에 치료제가 배포되지는 못했습니다. 특히 산델라에는 환자가 제일 많다 보니…….”
“……자, 잠깐만요.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백성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전염병과 관련된 사안은 양국의 긴밀한 협조를 통해 비밀리에 다루어지고 있으니까요.”
최고 궁의는 그리 말하며 약장에서 약병 하나를 꺼내와 하녀에게 먹였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최근 한 상단이 엄청난 양의 산살초를 구매하고 있어요.”
엘렌시아의 몸이 흠칫 떨렸다.
“산살초를 매점매석하고 싶었던 모양인데, 조금 늦었네요. 필요한 양은 이미 확보해 두었거든요.”
……뭐라고?
그녀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청력을 의심했다.
“이런 일이 있을까 봐서 대부분의 귀족들에게도 치료제에 관한 정보를 숨긴 것인데…….”
뒤에 이어지는 말은 들리지 않았다. 엘렌시아는 넋이 빠졌다.
‘치료제가 이미 만들어졌다고?’
평범하게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숙취 해소에나 쓰이는 고약한 냄새의 풀과 무서운 전염병을 연관 짓기란 쉽지 않았다.
엘렌시아 자신과 다른 한 명을 제외하고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