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116)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116화(116/183)
<116화>
* * *
황제의 집무실.
예상대로 황제는 산살초 대량 매입에 관해 엘렌시아를 추궁했다.
“그자들을 심문한 결과, 네가 산살초의 구입을 지시했다더군. 네가 정말 전염병의 치료제 재료를 두고 투기를 한 것이냐.”
엘렌시아는 최대한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항변했다.
“아니에요, 아빠! 저는 그런 적 없어요!”
“그럼 그자들의 진술이 거짓이란 뜻이군.”
“왜 그분들이 그런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모르는 일이에요. 에스칼 상단의 상단주를 몇 번 만나본 것도 그가 킬리언의 숙부였기 때문이지, 다른 이유는 없었어요.”
“…….”
“애초에 산살초가 마샨 병의 치료제로 이용된다는 사실을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최고 궁의의 말로는 네가 하녀를 치료해 달라며 산살초를 보였다던데.”
가짜 엘리를 데리고 황궁 의료원을 찾았을 때의 이야기였다.“
그, 그거야 혹시나 했을 뿐이지 확신한 것은 아니었어요.”
“정말?”
“제가 그런 나쁜 일을 꾸밀 리 없잖아요!”
황제는 잠시간 창밖을 내다보다가 느른히 말했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물론 책임질 수 있어요.”
“지금이라도 바른대로 고한다면, 당분간 자숙하고 황족의 의무가 어떤 것인지 철저히 교육받는 선에서 끝내주마.”
엘렌시아의 속에서 울컥 화가 치밀었다.
“아빠! 왜 딸인 저를 안 믿어주세요? 너무해요!”
“너를 믿고 싶으니까 이리하는 것이다.”
엘렌시아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고집스레 말했다.
“아빠가 뭐라고 하셔도 제 말엔 한 치의 거짓도 없어요.”
유스티스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끝끝내 내게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군.”
그러고는 문밖을 향해 일렀다.
“들라 하라.”
곧이어 집무실에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엘렌시아는 경악했다.
‘엘리!’
지금쯤 황궁 의료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가짜 엘리가 아니라 진짜 엘리였다.
엘렌시아의 손이 잘게 떨렸다.
‘어떻게 된 거지? 엘리는 분명 내가 황궁 밖으로 내보냈는데!’
혹시라도 엘리가 두 명이라는 사실이 들통날까 봐 가짜 엘리가 입궁하기 전에 그녀를 내보냈다.
엘리는 황녀를 보더니 덜덜 떨면서 고개를 수그렸다.
‘내가 한동안 조용히 숨어 있으라고 신신당부했잖아!’
엘렌시아는 당장에라도 소리치고 싶은 것을 황제를 의식해서 꾹 참았다.
황제가 말했다.
“궁인 명부에 적힌 기록과 대조하여 본인 확인을 끝마쳤다. 다른 궁인들도 저자가 네 밑에 있던 ‘엘리’라는 이름의 하녀라고 증언했고.”
“아, 아빠……. 그게 어떻게 된 거냐 하면요…….”
“그런데 너는 다른 자를 ‘엘리’라고 최고 궁의에게 소개했다지? 몇 개월간 너를 보필한 하녀의 얼굴을 헷갈릴 리 없었을 텐데.”
“잠깐만요! 제가 다 해명할게요. 이건 오해예요!”
변명의 말을 입에 담으면서도 엘렌시아는 절실히 느꼈다.
이것은 티볼트나 에밀리의 증언과는 비할 바 못 되는 부동의 증거였다.
증언뿐이라면 그들이 저를 모함한다고 잡아떼면 그만이지만, 엘리가 두 명 있다는 사실은 무슨 수로도 부정하기 힘들었다.
“티볼트 에스칼이 진술했다. 너의 부탁으로 적당한 인물을 구해서 황궁으로 들여보냈다더군.”
“아빠!”
“할 말이 있다면 해봐라.”
유스티스가 슬프고도 날카로운 눈빛으로 딸을 바라봤다.
“떳떳하지 못한 방법을 써가면서까지 전염병에 걸린 자를 황궁으로 끌어들인 이유를.”
엘렌시아는 가만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럴듯한 변명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침묵하는 엘렌시아를 앞에 두고 황제는 엄숙히 말했다.
“너한테 실망했다. 국난을 이용해 자신의 잇속을 챙기려고 한 것도 모자라, 황궁 내에 전염병이 퍼질지도 모르는데 이런 짓을 저지르다니.”
힐난의 어조, 실망스러운 눈빛, 모두 그녀의 기억에 있었다.
“또 거짓말이야. 너는 왜 매사에 그 모양이니?”
“조금은 착하고 성실한 네 언니를 본받아라.”
그 사람들도 늘 이런 식으로 자신을 몰아세웠다.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에 땀이 났다.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당해야 하지? 진짜 부모도 아닌 데이터 쪼가리한테!’
더는 한계였다. 여태껏 쌓아온 인내심의 둑이 마침내 터졌다.
엘렌시아는 목청껏 소리쳤다.
“아빠가 저한테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 제가 엇나간 게 다 누구 때문인데!”
황제의 말이 멈췄다.
“아빠가 저를 버렸잖아요!”
“내가 언제…….”
“제가 태어났을 때, 아빠는 마음만 먹으면 엄마의 죽음을 충분히 조사할 수 있었어요. 제가 필로멜과 바뀌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고요.”
“…….”
“그런데도 그냥 내버려 뒀죠. 자기한테 닥친 슬픔만 중요해서 딸은 아무래도 좋았던 거예요.”
한참 뒤에 고개를 수그린 유스티스가 인정했다.
“그래. 내 잘못이다. 너한테 일평생 속죄해야겠지.”
그러나 그는 곧 다시 엄한 눈으로 딸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 일과 무슨 상관이지?”
“아빠가 그때 저를 외면했으니 인정받고 싶어서…….”
“남 탓하지 마. 이 상황은 네 선택의 결과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확신이 섰다. 나에게는 너를 바른길로 이끌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동안 네게 미안해서 너무 무르게 굴었군.”
그의 표정은 결연했다.
“네 앞으로 된 재산은 동결이다. 그리고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처소에서 근신하도록.”
“그럴 수가……!”
“그뿐만 아니라 조만간 네 잘못을 정식으로 문제 삼을 것이다.”
엘렌시아는 놀라서 물었다.
“뭐, 뭐라고요? 그랬다간 제위 후계자인 제 평판이 뭐가 되겠어요? 황제의 권위를 생각하세요!”
“네게 마땅한 소양이 있다면 어떤 시련도 극복하고 권위 있는 황제가 되겠지.”
“아빠! 제가 잘못한 것은 맞지만 이건 말도 안 돼요!”
그러나 유스티스는 요지부동이었다.
엘렌시아는 분에 차서 한참을 씩씩거리다 결국 체념했다.
그러고는 마지막 발악으로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아빠가 너무 미워요.”
황제는 잠깐 침묵하다가 자조적인 목소리를 냈다.
“이제야 네 진실한 속내를 털어놓는군.”
“……네?”
“줄곧 나를 싫어하지 않았나. 그러면서 겉으로는 좋아하는 척해서 너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었다.”
엘렌시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고작 게임 속 캐릭터한테 제 속마음이 읽혔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너무 미워요. 하늘에 계신 엄마도 제게 이러시는 것을 보면 아빠를 싫어할 거예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엘렌시아는 황제의 집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제 처소로 돌아온 그녀는 발작적으로 고함을 터트렸다.
“아아아악!”
어떻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이딴 게임에 고전하는 저 자신이 도무지 용납되지 않았다.
“다 나가!”
황녀의 서슬 퍼런 외침에 하녀들이 재빨리 방을 나갔다.
분노를 참지 못한 엘렌시아는 화장대 위를 팔로 쓸어버렸다.
쨍그랑!
잡동사니들이 바닥에 떨어지며 그중 유리로 된 병이 박살 났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려 그녀가 다른 물건을 박살 내던 중.
“썩 물러가라! 이 악귀야!”
침대 근처에서 기묘한 외침이 들렸다.
“……유모.”
침대 기둥을 붙잡고 몸을 일으킨 유모가 작은 동상을 들고 있었다. 벨레론 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이었다.
그 동상을 엘렌시아 쪽으로 들이대며 유모는 소리쳤다.
“황녀님의 몸에서 얼른 나오지 못해?”
엘렌시아는 하도 황당해서 웃음이 나왔다.
유모가 빙의에 대해 눈치챘을 리는 없고, 요즘 자신의 상태가 평소와 달라서 멋대로 악귀가 붙었다고 판단한 듯했다.
“……이제는 이런 허접한 인간까지 나를 무시하네.”
“역시 악귀였어! 착한 엘렌시아 황녀님께서 이리 말하실 리가 없지.”
유모가 확신에 차서 말했다.
“너 같은 것은 엘렌시아 황녀님이 아니야!”
“……시끄러워. 조용히 해. 내가 엘렌시아야.”
필로멜이고, 황제고, 유모고 하나같이 다 눈에 거슬린다.
그 순간 엘렌시아의 마음속에 한 가지 의혹이 돋아났다. 필로멜은 분명 제 곁에 첩자를 심어놓았을 테다.
‘혹시 그 첩자가 유모 아니야?’
돌이켜보니 필로멜의 제안으로 유모가 제 방에 눌러앉았다.
조금만 깊게 생각하면 그 의혹이 이상하다고 느꼈겠지만, 그녀는 현재 한껏 격양된 상태였다.
엘렌시아에게 이미 유모는 그동안 자신을 속여온 배신자였다. 황녀의 전신이 노여움으로 부들부들 떨렸다.
‘감히 은혜를 원수로 갚아?’
자신의 등 뒤에서 필로멜과 깔깔대고 웃었을 유모가 상상됐다.
그래서였다. 재차 들려온 유모의 외침에 이성적으로 행동하지 못한 이유는.
“엘렌시아 황녀님을 돌려줘!”
“시끄럽다고 했잖아!”
엘렌시아는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을 들어 유모에게 휘둘렀다.
“억!”
그것을 머리에 정통으로 맞은 유모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노파의 몸이 힘없이 쓰러졌다.
엘렌시아는 뒤늦게 제가 던진 물체를 파악했다. 하필이면 대리석으로 된 무거운 문진이었다.
“……유, 유모?”
유모의 육체는 한동안 경련하더니 이윽고 완전히 멈췄다.
“왜, 왜 그래? 많이 아파?”
그녀의 머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을 적셨다.
떨리는 손을 유모의 코 밑에 대본 엘렌시아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유모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