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117)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117화(117/183)
<117화>
“내, 내가…… 사람을…….”
엘렌시아는 엉금엉금 기어 시체에서 떨어졌다. 살아 있을 때와 다를 것 없지만 숨을 쉬지 않는 육신이 소름 끼쳤다.
오한이 엄습했다.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야! 이건 게임 캐릭터야!’
로잔느를 처리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단지 이번에는 제 손으로 실행했을 뿐.
플레이어가 게임 캐릭터를 좀 죽였다고 죄책감을 느끼다니, 가당치 않은 일이었다.
엘렌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정신 놓고 있을 틈은 없다.
‘얼른 이 상황을 정리해야 해!’
유모는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가뜩이나 불리한 형국인데 자신이 유모를 살해한 사실까지 밝혀져선 안 된다.
그녀는 주변에 흩어진 물건들을 대충 치우고 낑낑대며 시체의 자세를 조금 바꿔놓았다.
거동이 불편한 유모는 걷는 연습을 하다가 넘어지며 책상에 있던 문진을 건드리고 말았다. 충격을 받은 문진이 쓰러진 사람의 머리 위로 떨어진 것은 우연한 불행이었다.
완벽한 변명은 아니지만 현재로서는 이게 최선이다.
모든 준비를 끝마친 다음에 엘렌시아는 숨을 들이쉬었다.
“꺄아아악!”
곧이어 겁에 질린 비명이 황녀의 처소에서 흘러나왔다.
“거기 누구 없어? 유모가, 유모가……!”
* * *
황제궁.
필로멜은 엘렌시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모퉁이에서 나왔다.
사실 집무실 앞까지 갔다가 엘렌시아의 고함이 들리기에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대충 듣기로도 두 부녀의 분위기는 험악하기 그지없었다.
‘이 정도면 성공적으로 둘의 사이를 갈라놓은 듯한데.’
더구나 가짜 엘렌시아의 손발을 어느 정도 묶기까지 했다.
이게 다 카딘의 공이었다. 진짜 엘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 그였다.
엘리는 엘렌시아의 명을 받고 이곳을 떠나기 전에 황궁 통신소에서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곧 내려간다고 연락을 했다. 그리고 우연히도 엘리가 사용한 통신석에 마력을 불어넣은 마법사가 카딘이었다.
그는 졸면서도 ‘황녀님이 특별히 주신 휴가’ 어쩌고 하는 내용을 귀담아듣고는 필로멜에게 알려주려고 찾아왔다.
마침 그때, 필로멜은 에밀리로부터 신경이 쓰이는 보고를 들은 직후였다.
“황녀가 웬 이상한 여자를 데려왔어요!”
엘렌시아는 무슨 연유인지 골골거리는 여자를 외딴 방에 두고는 하녀들의 입을 철저히 단속시켰다고 했다.
필로멜이 그밖에 이상한 점은 없냐고 묻자 에밀리는 기억을 더듬었다.
“……글쎄요. 그러고 보니 어제부턴가 엘리가 갑자기 안 보이네요. 아, 엘리는 저처럼 황녀 밑에서 일하는 하녀예요.”
돌연 나타난 여자와 비슷한 시기에 사라진 하녀.
단순한 우연일 리는 없었다.
카딘이 가져온 정보로 필로멜의 심증은 굳어졌고, 엘리는 자신의 고향으로 가려면 지나야 하는 관문에서 제레미아에게 잡혔다. 그는 곧잘 형의 업무를 시시하다며 우습게 여기곤 했으나…….
‘알고 보면 가만히 앉아서 황궁 내의 잡다한 사정을 파악할 수 있는 요직이었어.’
통신석을 소지하고 다니는 귀족과 다르게 궁인들은 통신을 하려면 통신소를 이용해야만 한다. 그러니 그들이 떠드는 바가 곧 카딘의 정보였다.
엘렌시아로부터 신변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엘리는 황제의 앞에서 진실을 고했다.
엘리를 움직이는 일은 예상보다 수월했다. 그녀는 필로멜을 보며 수줍게 말했다.
“그때는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는데, 도와주셔서 감사했어요.”
무슨 말인가 했더니, 켈튼 백작 영식에게 희롱을 당하던 하녀가 바로 엘리였다고 한다. 켈튼 백작 영식에게 주먹을 날린 자도 카딘이었으니, 이번 일은 전적으로 그 덕분이었다.
필로멜이 고맙다고 하자 그는 눈에 띄게 기뻐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잘 풀렸는데도 그녀의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어서 와라, 필로멜.”
집무실에서 필로멜을 맞이하는 황제를 마주하자 기분은 더욱 가라앉았다.
“오랜만입니다, 폐하.”
세계수를 만나러 떠나기 전에 같이 식사한 것이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자리에 앉은 필로멜을 바라보던 유스티스가 말했다.
“진짜 너군.”
“……예?”
“별것 아니다.”
영문 모를 소리를 하더니 그는 말을 아꼈다.
필로멜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진짜 나라고? 그럼 가짜 나도 있나?’
가짜는 필로멜이 아니라 그가 방금 만난 자였다. 자신이 유스티스의 진짜 딸이나 다름없다고 믿는 그 사람.
바로 그러한 이유로 필로멜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가짜 엘렌시아는 아빠가 밉다느니 하는 망언을 실컷 퍼붓고 돌아갔다. 황제는 진짜 딸이 자신을 원망한다고 여길 것이 아닌가.
“요즘은 어떻지?”
기분 탓인지 안부를 묻는 그의 모습이 유독 쓸쓸해 보였다.
“폐하의 은덕으로 하루하루 충실히 보내고 있습니다.”
“내 덕이 뭐 있겠느냐마는 잘 지낸다니 다행이군.”
그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도 필로멜은 고뇌했다.
‘원래는 좀 더 상황을 보다가 말하려고 했는데…….’
황제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붉은 막대에 눈이 갔다.
‘92%’
이쪽도 못 보던 사이에 호감도 수치가 상승했다.
‘이런 걸 보니까 마음이 약해지잖아…….’
게다가 호감도는 필로멜에게 기묘한 안도감을 선사했다. 자신이 엘렌시아의 정체를 밝혀도 황제는 귀담아 들어줄 것 같았다.
결국 필로멜은 당초의 계획을 버리고 녹음석이 들어 있는 주머니에 손을 댔다.
똑똑똑똑. 그런데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폐하! 갑작스레 죄송하지만 아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문밖에서 폴란 백작이 면담을 청했다. 그의 목소리는 심상치 않은 기운을 풍겼다.
동의를 구하는 유스티스의 눈짓에 필로멜은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폴란 백작이 집무실에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황제의 물음에 그가 심각한 얼굴로 아뢨다.
“유모가 사망했습니다.”
필로멜은 적잖이 놀랐다.
황제의 미간에도 금이 갔다.
“뭣 때문에?”
“정황을 봐선 사고인 듯한데, 당시 유일하게 유모와 함께 있었던 황녀 전하께서 아무 말씀도 안 해주셔서 자세히는…….”
“엘렌시아가?”
“전하께서 크게 충격을 받으셨는지 계속 우시면서 폐하를 찾고 계십니다. 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알겠다. 나가봐.”
필로멜은 혼란에 빠진 머리를 회전시키려고 노력했다.
어릴 적 많은 시간을 함께한 존재가 죽었다니 기분이 이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태평히 생전의 유모를 떠올릴 때가 아니었다.
‘유모가 사고로 죽었다고?’
자신의 직감이 이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속삭였다. 그렇다면 무엇일까.
엘렌시아는 잔뜩 화가 난 채 돌아갔다. 에밀리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평소 잔소리 많은 유모를 성가셔했다.
‘그리고 유모가 죽을 때 같이 있던 사람이 엘렌시아였어.’
사고의 가능성을 지우면 답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필로멜, 상황이 이리되어 나는 가봐야겠다.”
“잠시만요!”
필로멜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황제의 옷자락을 잡았다. 이 순간이 엘렌시아의 진실을 털어놓을 적기라고 느껴졌다.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급한 일이 아니라면 이다음에 만났을 때…….”
황제는 말을 멈추고 필로멜을 응시했다.
노란색 눈동자는 간절한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 옛날,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어느 날. 이 아이의 이런 눈빛을 무시했다가 후회한 적이 있었다.
황제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 말해라.”
* * *
서궁의 어느 방, 갑작스럽게 마련된 황녀의 임시 거처.
“흐윽…… 흐…….”
엘렌시아는 훌쩍이며 주변의 반응을 확인했다.
“황녀 전하, 이렇게 우시면 탈수가 와요.”
“제발 물이라도 드세요.”
하녀들은 걱정스러운 낯으로 그녀를 챙겼다.
엘렌시아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역시 자신은 천재적이었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다니!’
모두 유모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황녀를 동정했다. 그동안 유모를 좋아하는 척한 것이 이럴 때 도움이 되었다.
이제 한 사람만 오면 된다. 그런데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폴란 백작이 간 지가 언제인데 왜 안 오는 거야?’
그때였다.
“황제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시종의 말과 함께 황제가 방에 들어섰다.
“아빠!”
엘렌시아는 달려가 황제의 팔에 매달렸다. 푸른 눈에서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나왔다.
“어떡해요? 유모가…… 유모가 죽었대요…….”
그녀가 흐느끼며 말을 이었다.
“흑, 제가 문진을 그런 곳에 두면 안 되는 거였는데……. 다 제 탓이에요.”
황제가 아무리 냉혈한에 아까 자신과 말다툼을 했다지만, 충격에 빠진 딸을 몰아세울 위인은 아니었다.
‘자연히 동정심이 생기겠지.’
산살초에 관한 일을 공표하거나 그녀의 재산을 동결하겠다는 결정도 물릴지 몰랐다. 아니, 물리게 만들어야 했다.
그런데.
‘어?’
황제를 올려다본 엘렌시아는 몸을 굳혔다.
딸을 향한 그의 눈빛에서 싸늘함이 묻어 나왔다. 평소처럼 꾸짖거나 질책하는 느낌이 아니라 그보다 더 차가운 무언가.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아, 아빠……. 화나셨어요? 제가 조금 전에 버릇없게 굴었던 것이라면 사과드릴게요…….”
“…….”
황제는 아무런 대꾸 없이 엘렌시아가 원래 사용하던 처소로 향했다.
그녀는 불안감을 느끼며 그의 뒤를 졸졸 쫓았다.
방에는 아직 유모의 시신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부릅뜬 눈을 보자 엘렌시아의 팔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유스티스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빠, 유모가 너무 불쌍해요. 차가운 바닥에 저렇게……. 얼른 눈을 감겨줘요. 네?”
매장이든 화장이든 뭐든 좋으니 빨리 저것이 인멸되었으면 했다.
황제는 감정을 읽기 힘든 목소리로 대답했다.
“걱정 마라. 저자의 억울함이 남지 않도록 할 테니.”
엘렌시아가 그게 무슨 뜻인지 물어볼 틈도 없이 황제는 옆에 있던 폴란 백작에게 명했다.
“책임지고 사망 원인과 그 경위를 확실히 밝혀내라.”
“명 받잡겠습니다.”
이어서 폴란 백작은 시종들에게 현장을 봉쇄하라고 지시했다.
엘렌시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잠시만요! 유모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제가 똑똑히 봤어요. 이제부터 설명할…….”
황제가 그녀를 제지했다.
“네 설명과는 별개로 조사는 진행될 것이다.”
“무슨 조사요?”
“사람이 죽었으니 당연히 조사해야지. 사고인지 사고가 아닌지 가리기 위해서라도.”
안 된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자신은 범죄의 전문가가 아니었다. 조사가 진행되면 사고가 아니라 살인이라는 것이 밝혀질 확률이 높았다.
“제가 사고라는데 왜 사고가 아니에요! 저를 못 믿으세요?”
“조사를 막고 싶은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
“그, 그런 것 없어요! 단지 제가 의심받는 것 같아서……. 아빠, 제발 이러지 마세요.”
유스티스는 애절하게 눈물을 쏟는 그녀에게 무정히 말했다.
“당분간 근신하도록. 나는 이만 가보겠다.”
순간 엘렌시아는 황제의 머리 위를 바라봤다. 붉은 막대가 위태롭게 깜빡거렸다.
‘80%’
이제껏 절대 그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던 호감도 수치, 이를테면 최후의 선.
‘79%’
‘78%’
‘77%’
그 선이 붕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