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127)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127화(127/183)
<127화>
* * *
필로멜을 향해 방긋 웃던 그는 그녀의 옆에 있는 인물을 보고는 얼굴을 경직시켰다.
뻣뻣한 걸음걸이로 다가온 나사르가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좋은 오후입니다, 필로멜 님. 그리고…… 아버님.”
르귄의 표정이 전에 없이 차가워졌다.
“누가 네 아버님이야?”
눈을 부라리는 마탑주 앞에서도 나사르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일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아버님.”
참고로 그는 여전히 고양이 귄귄이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
“저는 나사르 에이브리든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현재 따님과 교제 중입니다. 가능하다면 아버님께 허락을 받고 싶어서…….”
르귄은 이를 갈았다.
“너는 진짜, 내가 언제 한 번…….”
그는 필로멜의 눈치를 살피더니 나사르의 팔을 잡아끌었다.
“잠깐, 나랑 어디 조용한 곳에서 깊은 이야기 좀 나눌까.”
“어디 가시게요?”
“그런 게 있어. 필, 너는 먼저 들어가.”
나사르는 끌려가면서도 필로멜을 안심시켰다.
“괜찮습니다. 아버님과 남자들끼리의 대화를 나누고 오겠습니다. 그리고 이것 받아주세요.”
그가 안고 있던 커다란 꽃다발을 내밀었다.
“오는 길에 그대가 생각나서 저도 모르게 사고 말았습니다. 물론 필로멜 님에 비하면…….”
“이놈이 끝까지!”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르귄에게 잡힌 나사르가 빠르게 저 멀리 사라져 갔다. 필로멜은 괜히 걱정스러워졌다.
“몰래 따라가 봐야 하나?”
르귄이 정말 나사르에게 해를 끼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음, 아닌가? 역시 따라가 봐야 하나?’
필로멜이 고민하고 있던 그때, 근처에 있던 나무 뒤에서 한 인영이 튀어나왔다.
남자는 필로멜에게 상체를 구부리며 예를 표했다.
“안녕하십니까, 필로멜 님.”
“험프리 씨.”
험프리. 최고위 궁정 마법사.
필로멜에겐 어릴 적 예언서에 관해 물었을 때, 장광설을 늘어놓았던 마법사로 인상에 깊었다.
필로멜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런 곳에 계셨어요?”
누가 봐도 켕기는 바가 있어서 숨어 있는 모양새였다.
험프리는 얼굴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멀리서 마탑주께서 오시는 모습을 보자 조건반사적으로…….”
마법사의 얼굴은 다소 누런빛을 띠었다.
필로멜은 비슷한 현상을 과거에도 본 적이 있었다. 어린 필로멜이 마탑주에 관하여 질문하자, 그는 얼굴이 노래지더니 배를 잡고 밖으로 뛰쳐나갔었다.
‘그때는 왜 그러는지 몰랐지만…….’
예전에 그녀가 형제들과 잡담을 나누던 중에 최고위 궁정 마법사에 대한 화제가 나온 적 있었다.
“르귄 님께서 이곳에 계신다는 것을 알면 험프리 씨는 까무러칠 수도 있습니다. 옛날에 르귄 님의 밑에서 일하다가 하도 시달려서 마탑을 나가버렸거든요.”
그때 렉시온이 한 말이었다.
자세히 들어보니, 성실하고 고지식한 험프리는 그 정반대인 상사와 자주 마찰을 빚었다고 한다.
렉시온은 웃으면서 “르귄 님 같은 분은 올곧게 조언하기보다는 살랑살랑 비위를 맞춰줘야 해요”라고 덧붙였다.
얼마나 시달렸으면 르귄의 모습만 봐도 저럴까 싶어, 필로멜은 눈앞의 남자가 안쓰러워졌다.
“배가 많이 아프세요?”
“이 정도면 괜찮은 편입니다. 마탑을 떠나온 지도 꽤 되어서 증상이 완화된 편이죠.”
“……그게 완화된 편이군요.”
“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이 몇 달 전부터 아무 일도 없는데 이따금 배가 아팠습니다. 아무래도 곧 마탑주께서 나타나신다는 사실을 제 몸이 먼저 안 게 아닌가 싶군요. 하하.”
험프리는 애써 미소 지었다.
‘그때부터 복통의 원흉이 황궁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필로멜은 차마 밝힐 수 없는 진실을 목구멍 안으로 삼켰다.
그는 존경심과 놀라움이 반반 섞인 눈으로 필로멜을 바라봤다.
“그나저나 필로멜 님도 대단하십니다. 저분과 그리 친하게 지낼 수 있다니.”
필로멜은 변명하듯 말했다.
“성격이 좋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알고 보면 꽤 괜찮은 분이에요. 나름 인간적인 면도 있고…….”
“……마탑주께서요?”
험프리는 미심쩍은 표정을 짓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뭐, 필로멜 님이 그렇게 여기신다면 그런 것이겠죠. 그분도 따님을 상당히 귀애하시는 모양입니다.”
그가 품에서 두 장의 종잇조각을 꺼내 필로멜에게 건넸다. 침입자가 사용한 마법 스크롤의 조각이었다.
“이것을 마탑주께 전해주십시오. 이곳에선 아무것도 발견해 내지 못했지만, 마탑의 장비를 사용하면 뭔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험프리와의 대화를 마치고 필로멜은 남궁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나사르가 준 꽃다발의 꽃들을 화병에 장식하고 있을 때쯤에 르귄이 홀로 돌아왔다.
“나사르는 어쩌고요?”
“아무 짓도 안 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알아듣게 잘 말했어.”
“어떻게 말씀하셨는데요?”
“나한테 인정받고 싶으면 힘으로 나를 꺾으라고.”
너무 험난한 과제였다.
필로멜은 나사르가 걱정스러워져 르귄 몰래 통신석으로 그에게 연락을 해봤다.
나사르는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쾌활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필로멜 님의 얼굴을 뵙고 가려고 했는데 아버님께서 허락을 안 해주셔서 그러지 못했습니다.”
“둘이서 무슨 말을 나눴나요?”
“사실, 아버님께서 저희의 교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정말이요?”
“네! 조건이 달리긴 했지만요. 하지만 심려치 마십시오. 제가 열심히 단련해서 금방 조건을 충족시키겠습니다!”
나사르는 마탑주의 예상보다 훨씬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그가 정말로 조건을 충족시키는 날이 올지는 모르겠으나, 필로멜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나사르는 절대 포기하지 않을 테다. 필로멜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르귄이 있던 방으로 돌아갔다.
가자미눈을 한 마탑주가 그녀의 동태를 살폈다.
“또 그놈이랑 연락했어?”
“……그런 것까지 일일이 보고해야 하나요? 저한테도 사생활이 있어요.”
“흐음.”
필로멜은 그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스크롤 조각을 건넸다.
“험프리 씨가 돌려줬어요. 마탑에 가져가서 살펴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하네요.”
“그래. 이번에 가는 김에 한 번 살펴볼게. 그러고 보니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뭐가요?”
그가 지긋이 딸을 응시했다.
“필, 언제까지 여기에 있을 생각이야?”
인내심이 떨어졌는지 그는 얼마 전부터 계속 마탑으로 가고 싶다는 속내를 은근히 보였다.
필로멜은 검지로 뺨을 쓸었다.
“음, 적어도 도망간 침입자를 찾을 때까지는…….”
“왜 그래야 하는데? 네가 거기까지 신경 써줄 필요 없잖아.”
“……예?”
“네가 여기에 남기로 했던 목적, 그 책에 관한 진실을 알고 싶어서였지?”
“맞아요.”
“그럼 알았으니 목적은 달성한 거잖아.”
맞는 말이다.
요전에 침입자의 기억을 엿봄으로써 그녀는 <황녀 엘렌시아>의 탄생 과정을 낱낱이 알게 되었다.
그 책이 어떻게 하여 제 손에 들어왔는지는 아직 의문이었지만, 침입자도 그것까지는 모르는 듯했다.
르귄은 명쾌한 결론을 내렸다.
“이제 다 끝났어. 그만 마탑으로 가자.”
“하지만 엘렌시아가…….”
“네가 신경 쓸 필요 없대도. 그리고 네가 여기 있어봤자 딱히 그 여자가 더 빨리 발견된다는 법도 없잖아.”
“그렇지만 침입자는 언젠가 상점에 나타날 가능성이 높아요.”
도망간 침입자가 의지할 구석은 상점의 상품밖에는 없을 터.
“상점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니까 제가 필요하죠.”
“아마 상품이 다시 채워지기 전에는 안 들어올걸. 그리고 채워지기까지 두 달 넘게 남았잖아?”
“그, 그건 그렇죠.”
“그동안 계속 여기에 죽치고 있는 것은 시간 낭비야. 꼭 황궁에 있어야만 상점에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것도 맞다.
만약 나중에 필로멜이 상점에서 침입자를 생포한다 하더라도 황제에게 보내면 그만이다. 굳이 황궁에 남아 있을 필요는 없다.
“침입자를 잡은 이후에도 어떻게 처분할지는 황제가 알아서 정할 일이잖아.”
르귄은 머리를 긁적였다.
“난 사실 네가 황녀한테 이렇게까지 연연하는 이유도 잘 이해가 안 가.”
“…….”
“사정이 딱하긴 하지만 엄연히 남의 일이잖아?”
왜인지 아니라 부정하고 싶었으나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필로멜은 진짜 엘렌시아와는 단 한 번도 만나본 적 없었다. 친구도 아니고, 가족도 아니고. 사람들은 이런 관계를 보통 ‘남’이라고 정의한다.
르귄은 황궁에서 처음 재회했을 때처럼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신경 끄고 얼른 마탑으로 가자.”
필로멜은 망설이다가 고민해 볼 시간을 달라고 대답했다.
흔들리는 마음을 읽었는지 그는 흔쾌히 그러라고 했다.
그날 저녁.
필로멜은 침대에 늘어져서 혼잣말을 내뱉었다.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야.”
엘렌시아가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그게 필로멜이 황궁에 남아 있을 이유는 되지 못한다.
반면 남아 있지 말아야 할 이유는 명확했다. 곧 황제는 황녀의 실종을 공표할 것이다. 그러면 자연히 궁내 분위기는 뒤숭숭해질 테다.
손님 신분인 마탑주와 그 딸이 특별한 이유도 없이 계속 황궁에 머무르는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다.
‘마탑이라.’
필로멜은 막연하게만 상상했던 마탑에서의 생활을 그려봤다.
마탑에는 르귄이 있고, 렉시온과 카딘과 제레미아가 있다.
‘나사르도 내가 간다고 하면 따라오겠다고 말했고.’
낯선 곳, 낯선 생활이 기다리겠지만 그들과 함께라면 나쁘지 않을 것이다. 분명 즐겁겠지.
필로멜은 그럴듯한 미래를 떠올리려 노력하며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