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13)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13화(13/183)
<13화>
필로멜의 얼굴이 새빨간 토마토처럼 변했다.
‘난 어린애가 아닌데!’
믿음직스러운 후계자의 모습을 보여줘도 모자랄 판국에 애처럼 안기기나 하고!
이제까지 노력해 온 게 모두 엉망이 된 것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2년 전에 정원에서 처음 안아 든 뒤로 가끔 필로멜의 걸음이 느려지거나 하면 황제는 자신을 안았다. 그게 습관이 되었는지 지금도 자신을 안아 올려주었다.
그때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대충 넘어가지 말걸 그랬다.
필로멜이 아무 말이 없자 유스티스가 낮게 물었다.
“기념사 안 할 건가? 그렇다면 말해라. 내려 보내주마.”
“……아, 아니요! 할게요!”
이대로 그냥 내려가면 정말 무서워서 도망친 겁쟁이가 될 뿐이다.
‘그럴 순 없지.’
필로멜은 애써 확성석에 입을 대고 준비해 온 기념사를 또박또박 말했다.
“친애하는 벨레로프의 제국민 여러분, 이 자리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오늘은…….”
다행히 부끄러움에 정신이 없어 긴장은 많이 풀린 상태였다.
그날 필로멜은 아쉬움 없는 연설을 모두에게 전했다. 그리고 참석자들은 두 가지 사실에 큰 놀라움을 가진 채 귀가했다.
첫째는 문제아인 줄로만 알았던 황녀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빼어난 연설 능력을 지녔다는 점.
둘째는 황제가 매우 온화한 눈길로 제 딸을 바라보고 있었단 점이었다.
‘어쩌면 기존에 그린 후계 구도가 변할지도 모른다’라는 게 그들의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같은 날, 필로멜은 황제와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같이 식사하자고 권하는 필로멜에게 황제는 “에이브리든 소공자는 어쩌고?”라고 물었다.
나사르와는 아무런 약속도 없다고 대답했더니, 그는 묘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매년 건국제 날엔 그 녀석과 시간을 보내지 않았나.”
‘내가 그랬나? 확실히 아홉 살 때만 빼면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이번엔 황제에게 받아낼 게 있었다. “오늘은 폐하와 같이 먹고 싶은걸요!”라고 말했더니 유스티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입안에 있는 고기를 삼키며 필로멜이 입을 열었다.
“폐하. 오늘 제 연설은 어땠나요?”
“잘하더군. 좋았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나쁘지 않았다.
인정받는 후계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 온 지 어언 3년. 슬슬 이쯤이면 말해도 될 것 같았다.
필로멜은 최대한 착한 표정을 지으려 애썼다.
“폐하, 사실 제가 갖고 싶은 물건이 있습니다.”
“그게 뭐지?”
“홍염의 반지입니다!”
문득, 스테이크를 썰던 유스티스의 손이 멈췄다.
“안 돼.”
단박에 떨어진 거절에 필로멜이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그게…….”
당황한 유스티스가 설명했다.
“아예 안 된다는 게 아니다. 아직 너에겐 일러.”
“허투루 사용하지 않을게요! 잘 쓸 수 있어요!”
필로멜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그런 문제가 아니야. 홍염의 반지는 사용자가 어리면 신체에 무리를 준다. 적어도 성인이 된 이후에나 써야 해.”
“하, 하지만…….”
벨레로프 제국의 성인 기준은 열여덟이었다. 필로멜이 그 나이가 되었을 땐 이미 엘렌시아가 나타난 이후일 것이다.
“너무 멀어요. 그때까진 못 기다려요.”
필로멜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자 주름진 미간을 꾹꾹 피며 유스티스가 말했다.
“왜 그렇게까지 홍염의 반지를 원하지?”
“……그야 권좌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뜻하는 상징이니까요.”
도망치기 위해서라고 솔직히 말할 순 없었다. 필로멜은 미리 생각해 두었던 대답을 건넸다.
“……성인이 되면 주마. 이번엔 다른 걸 말해. 뭐든 줄 테니.”
“전 홍염의 반지가 갖고 싶어요. 그게 아니라면 뭐든 필요치 않아요.”
“…….”
“…….”
좁혀지지 않는 의견 차이에 대화가 사라졌다.
무겁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필로멜은 후회했다.
‘내가 성급했어. 안 된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고집을 부리면 안 됐는데…….’
성인이 되어야지만 주겠다는 말에 순간적으로 욱하고 말았다. 기껏 쌓은 신뢰를 어린애 같은 고집에 다 말아먹게 생겼다.
불편한 식사를 마치고 자리를 떠나기 전에 필로멜이 스치듯이 말했다.
“죄송해요. 앞으로는 억지 부리지 않을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그러고는 꾸벅 고개를 숙인 탓에 황제가 어떤 얼굴을 했는지 보진 못했다.
‘아, 다 귀찮다.’
필로멜은 소파에 늘어져 여유 시간을 낭비하는 중이었다.
평소 같으면 어떤 핑계로 유스티스한테 눈도장 찍으러 갈지 궁리했을 텐데, 지난번 식사 이후로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홍염의 반지를 제때 손에 넣지 못한다면 도주 계획을 전면 수정해야만 했다.
마냥 이렇게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지만 일단 지금은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고 싶었다.
그때 델레스 백작 부인이 필로멜의 기색을 살피며 다가왔다.
“저……. 황녀 전하.”
“무슨 일 있나요?”
“황제 폐하께서 후원으로 부르십니다. 엘리타에서 귀한 찻잎을 선물로 보냈다고 합니다.”
필로멜이 일언반구도 없었는데 유스티스가 먼저 부른 건 처음이었다.
‘뭐, 부르지 않아도 찾아가니 그럴 틈도 없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지 모르겠지만 부르니 가야 하긴 했다.
‘하지만…….’
털썩. 필로멜의 몸이 도로 늘어졌다.
“전하?”
“몸이 좋지 않아서 못 가겠다고 전해드려요.”
“이런, 어디 편찮으십니까?”
“심한 건 아닌데요. 뭐라고 해야 하나……. 그냥 조금 피곤하네요.”
“알겠습니다. 쉬셔요, 전하.”
백작 부인이 떠난 뒤에도 필로멜은 계속 늦장을 부렸다. 그런데 떠났던 델레스 백작 부인이 돌아왔다.
“전하. 황제 폐하께서 직접 오셨습니다.”
“……네?”
필로멜은 당황해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도 지금 얼굴 보기는 싫은데…….’
“저, 잠들었다고 해주세요.”
필로멜은 얼굴을 소파 등받이 쪽으로 두고 누우며 말했다. 그러고선 깜빡 잠이 든 척했다.
필로멜을 바라보며 잠시 망설이던 델레스 백작 부인이 문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알고 있었다. 이것이 괜한 오기라는 걸.
황제가 방문했다면 상대가 자고 있다 하더라도 깨워야 했다.
자신을 바로 깨우지 않고 황제에게 고하러 간 백작 부인 입장만 난처해질지도 몰랐다.
‘그래도 싫은걸…….’
잠시 후 문이 열렸다.
백작 부인이 자신을 깨우려고 돌아온 줄 알았던 필로멜은 이윽고 들려온 음성에 숨을 멈췄다.
“필로멜.”
황제가 나지막하게 말해다.
“잠들지 않은 거 안다.”
헉. 무슨 귀신인가.
필로멜은 움찔했다.
잠시 일어나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계속 잠든 척하기로 하고 눈을 뜨지 않았다.
“……이제는 나와 얼굴을 마주하기도 싫더냐.”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층 깊게 잠겨 있었다.
어째 느낌이 안 좋다.
‘폐하께서 많이 화나셨나 봐!’
어째 이쯤에서 반항은 그만두고 일어나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아직 네가 왜 그렇게 그 반지를 원하는지 모르겠다. 그게 없어도 넌 엄연한 내 후계자인데.”
발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하지만…… 네가 그리도 원한다면.”
유스티스가 바로 등 뒤까지 다가와 있는 게 느껴졌다. 무언가가 필로멜의 머리를 간질였다.
“3년 뒤. 네가 열다섯이 되는 해에 홍염의 반지를 주겠다.”
“정말요?”
필로멜이 벌떡 일어났다.
유스티스는 뻗었던 손을 치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성인은 아니지만, 그쯤이면 몸에 가는 부담도 많진 않겠지. 그래도 가급적이면 적게 사용하는 편이…….”
“감사해요! 폐하가 최고예요!”
덥석. 필로멜은 감격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유스티스를 끌어안았다.
“…….”
“…….”
곧바로 제정신이 돌아왔다.
‘……아차.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필로멜은 황제가 뭐라 하기 전에 재빨리 샤샤샥 품에서 떨어졌다.
필요할 땐 그가 필로멜을 안아 들었다지만 자신이 먼저 안기는 걸 반기란 법은 없었다. 실제로도 유스티스는 좀 놀란 눈치였다.
“와! 기쁘다!”
필로멜이 어색하게 두 손을 높이 들어 올리자 그는 조금 전 행동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다.
“그렇게 좋은가.”
“네!”
3년. 길다면 긴 시간이지만 처음 제시된 6년에 비하면 3년은 반으로 줄어든 시간이었다.
‘게다가 엘렌시아가 나타나기 전이기도 하고.’
어차피 당장 반지를 얻게 되어도 어린아이의 몸으로 도망치는 데엔 한계가 있다. 고아라고 신고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열다섯이면 여전히 성인이 아니긴 하지만 혼자 못 돌아다닐 나이는 아니다.
앞으로 3년. 3년만 기다리면 밖으로 나갈 수 있다.
필로멜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