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131)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131화(131/183)
<131화>
에밀리는 눈알을 굴렸다.
“……저, 이대로 가신다면 제 처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요?”
“뭐가?”
“아시잖아요. 제가 전에 필로멜 님께 저지른 큰 잘못이요.”
그녀가 필로멜의 패물을 도둑질했던 행위를 의미했다.
“뭐, 그동안 나를 위해 수고해 줬으니 눈감아 줄게.”
“정말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착하게 살아.”
“당연하죠! 남의 물건에 또 손을 대면 저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져온 선물을 생각하면 영 쉽지 않을 듯싶었다.
‘뭐, 그건 에밀리가 알아서 할 일이고.’
필로멜은 이제 끝났다는 의미로 르귄을 바라봤다.
“진짜 끝이지? 이동할 거니까 둘 다 내 몸을 붙들어…….”
필로멜이 그의 팔을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화아아아아!
환한 빛살 속에서 황제가 기별도 없이 나타났다.
“필로멜.”
그들과 좀 떨어진 곳에 선 유스티스가 필로멜을 불렀다.
그곳에 있던 궁인들이 일제히 놀라 뒤집혔다.
“세상에! 황제 폐하!”
“폐하께서 비를 맞으신다!”
“누가 수건 좀 가져와!”
“폐하, 제 우산이라도…….”
황제는 손짓 한 번으로 그들의 입을 다물게 했다.
“필로멜.”
그가 다가왔다.
“…….”
필로멜은 어찌할까 망설이다가 황제가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지자 입을 열었다.
“폐하, 거기까지만.”
그가 멈춰 섰다. 딱 우산의 경계 밖이었다.
필로멜은 할 말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그때는 저도 감정이 격해져서 말이 과하게 나왔어요.”
황제와의 마지막 만남 이후, 시간이 흐르자 후회가 생겨났다. 딸이 실종된 사람을 너무 몰아붙인 게 아닌가 싶었다.
“저는 폐하께서 잘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꾸밈없는 진심이다.
7년 전에 들었던 말은 여전히 용서되지 않았지만, 그와는 별개로 황제가 불행해지면 제 마음이 편치 않을 테다. 필로멜에게 유스티스는 미워할 수만은 없는 존재이기에.
“지금은 여러 가지로 상심하셨겠지만 곧 괜찮아질 거예요.”
진짜 딸이 돌아오면 그에게도 기쁨이 찾아오겠지.
엘렌시아가 제 몸을 찾는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으나, 필로멜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어쩌면 약간의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몸부림일지 몰랐다.
“그리고 아까는 빼먹고 말았는데 이것도 돌려드릴게요.
필로멜이 손을 들어 올렸다. 약지에서 홍염의 반지가 반짝였다.
그녀는 반지에 신경을 집중하며 선언했다.
“나, 필로멜 메이티아스 벨레로프는 이 반지의 소유권을 포기한다.”
붉은 보석에서 빛이 났다. 그리고 이내 반지가 그녀의 손가락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황제가 제 손을 펴봤다. 사라진 반지는 그곳에 있었다.
소유자를 잃은 반지가 자동으로 그 안에 담긴 신성력의 주인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반지의 소유자와 신성력을 불어넣은 이가 다르니 성립하는 일종의 편법.
‘원래는 황궁에서 도망쳤을 때 쓰려고 알아둔 방법인데.’
결국 안전하다 싶은 장소에 이르기 전에 잡혀서 여태까지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
필로멜은 변명하듯 말했다.
“마음만 감사히 받을게요. 죄송해요. 저는 도저히 그것들을 가진 채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아요.”
꽤 오랜 시간 고민해 본 결과 이게 최선이다. 그를 연상시키는 물건을 가지고 갔다간 미련을 완전히 떨치지 못할 테다.
‘저 사람한테도 부질없는 미련을 남기지 않는 편이 좋겠지.’
황제는 힘없이 중얼거렸다.
“……정녕 안 되겠는가.”
“폐하.”
그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물이 마치 빗물이 아닌 듯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어떤 행동을 해도 정녕 너는 이곳을 떠날 텐가.”
필로멜의 목이 메었다.
“죄송해요. 안녕히 계세요.”
그녀는 돌아섰다.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결심이 흔들릴까 봐.
“가요.”
필로멜이 르귄의 팔을 붙잡자 그는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뒤쪽을 일별한 다음에 마탑주는 느긋이 정문 밖으로 향했다.
그들을 피해 내리는 빗줄기를 보며 필로멜은 문득 과거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아홉 살 때의 건국제.
‘그때도 비가 많이 내렸지.’
필로멜은 행사를 연기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하며 비를 맞다가 감기에 걸리고 말았다.
얄궂게도 지금의 상황이 그때와 참 비슷하다.
다만 이제는 비를 맞는 이도, 떠나는 상대의 등을 보는 이도 자신이 아니다.
두 번째 이별이었다.
* * *
황제의 집무실.
황제는 내빈용 장의자에 늘어져 있었다. 옷에 스며든 물기가 천을 적셨으나 아랑곳하지 않았다.
임시 비서관과 시종들이 그에게 환복하기를 간청했으나 그럴 의지조차 없었다.
그때, 임시 비서관이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
“폐하, 두더지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들어와라.”
유스티스는 그냥 누워서 그의 보고를 들었다.
“뭐라 하던가.”
“그것이, 막힌 땅굴이라는 말만 남겼습니다.”
“……그런가. 다시 한 번 파보라고 해라.”
“……명 받잡겠습니다.”
임시 비서관은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저도 알 테다. 이것이 쓸모없는 명령이란 사실을.
벌써 수차례 똑같은 명령을 내렸으나 답은 한결같았다.
방법이 없다.
‘두더지’란 황제가 대신전 측에 심어놓은 세작을 가리켰다.
정체는 대신관의 측근인 고위 신관.
‘타인의 몸에 깃든 이방의 존재를 쫓아낼 방법을 알아 와라.’
그것이 황제가 두더지에게 맡긴 임무였다.
신의 서에는 용사가 침입자를 무찌를 수 있다고만 적혀 있지, 그 몸의 주인이 어찌 되는지는 언급조차 없었다.
하나 신의 말씀이 적힌 것은 신의 서뿐만이 아니다.
신전에서도 예로부터 신탁을 기록해 왔다. 일부 신관만이 접근할 수 있는 기밀 자료.
‘실낱같은 희망을 거기에 걸었으나…….’
아무 데도 방법이 없단다.
유스티스는 얼굴을 쓸었다.
“저, 폐하…….”
그제까지도 떠나지 않은 비서관이 그를 불렀다.
“뭐지?”
“폴란 백작께서 휴가의 연장을 요청하셨습니다. 쉬시면서 의원에게 진찰을 받은 결과, 복부에서 혹이 발견되어 당분간 치료에 전념하셔야 할 것 같답니다.”
“그런가.”
얼마 전부터 묘하게 안색이 좋지 않았던 남자가 떠올랐다.
“이참에 쉬고 싶은 만큼 쉬면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라고 해라.”
그자도 고생이 많았지. 십수 년 전에 주인을 잘못 골라서.
임시 비서관이 물러간 후에 황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정말 혼자군.”
무심코 내뱉은 혼잣말에는 씁쓸함이 묻어났다.
그는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을 열었다.
서랍 속에서 초상화가 든 작은 액자가 나왔다. 액자 속에서 금빛 머리카락을 늘어트린 여자가 웃고 있다.
“이사벨라, 나는 결국 네가 낳은 아이를 지키지 못했어. 내가 품은 아이와 마찬가지로.”
그는 액자를 제자리에 내려놓은 뒤에 그 위에 홍염의 반지를 뒀다. 그리고 옆에 있던 물체를 집었다. 리볼버였다.
유스티스는 리볼버의 실린더를 열어서 총알을 장전했다. 총구는 관자놀이를 향했다.
놀라울 만치 두려움은 없었다. 다만 조금 안타까웠다.
“이대로 가도 너를 만나진 못하겠지. 넌 천국에 있을 테니.”
그는 눈을 감았다.
방아쇠에 건 손가락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 * *
엘렌시아는 발버둥 쳤다.
“이거 놔! 너희 누구야!”
그러나 그녀를 억세게 포박한 손길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놓으라고!”
괴상한 로브를 입고 가면을 쓴 자들은 그녀를 어딘지 모를 곳으로 끌고 갔다.
이곳에 오고 나서 며칠이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계속 창문이 없는 독방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몸에 힘도 안 들어갔다. 하루에 세 끼 제공된 음식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왜 일이 이렇게 된 거야!’
필로멜과 다투었던 그 날, 마법 스크롤은 엘렌시아를 전혀 모르는 장소로 이동시켰다.
분명 누군가가 개입한 것이다.
자신이 떠올린 장소는 이런 어두컴컴한 지하 굴이 아니었다.
이곳에 있던 이상한 무리는 엘렌시아를 보자마자 가타부타 말도 없이 가둬놨다.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입에 재갈이 물리고 팔다리는 결박했다.
“당장 풀어주지 못해? 내가 누군지 알아! 난 제국의 황녀라고!”
식사하는 그녀를 감시하러 들어온 인간에게 소리쳐 봤자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자는 엘렌시아가 이상행동을 보이면 바로 다시 구속했고, 음식도 회수해 갔다.
엘렌시아는 두려움에 떨면서 무력하게 시간을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상점으로 도망치려고 해도, 인벤토리를 열려고 해도 이상하게 이곳에선 전부 불가능했다.
“아얏!”
넓은 장소가 나오자 사람들은 엘렌시아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아프잖아!”
“환영합니다. 다른 세계에서 온 이방인이여.”
그때, 한 인영이 걸어왔다. 정체불명의 무리 중 엘렌시아에게 말을 건 사람은 그자가 처음이었다.
“누, 누구야?”
그자가 로브의 모자 부분을 걷자 얼굴이 드러났다. 정확한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중년의 여성이었다.
여자가 자기소개했다.
“제 이름은 마리카. 신을 모시는 사람이죠.”
“……대체 목적이 뭐야? 왜 나를 가둬둔 거지?”
“가둬두다니. 잠시 따로 모신 것일 뿐이에요. 당신 안에 남아 있던 벨레론 신의 힘이 완전히 사그라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여간 불쾌한 것이 아니어서요.”
신성력을 말하는 듯했다.
“신을 모시는 사람이 신성력을 싫어한다고? 말이 돼?”
그 말에 그녀는 싱긋 웃었다.
“그야 내가 모시는 신은 벨레론 따위가 아닌걸.”
어딘지 소름 끼치는 미소였다.
“베, 벨레론 신이 아니면?”
마리카는 주위의 벽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사방의 벽에는 빼곡히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녀는 황홀한 눈으로 그림의 한 부분을 응시했다. 어두운 물감으로 칠해진 검은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이 세상에 종말과 안식을 가져오실 분. 파멸의 신, 이에리스 님이십니다.”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 없어.”
엘렌시아가 황녀로서 교육받을 때, 신학 수업도 들었다. 그런 거창한 명칭의 신에 대해 배웠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바깥의 인간들이 그분의 존재 자체를 지웠으니까!”
여자가 갑작스럽게 노성을 터트렸다. 분노로 눈이 희번덕거렸다.
엘렌시아가 겁먹은 기색을 드러내자 마리카는 금방 표정을 바꾸고 웃었다.
“놀랐나요? 미안해라.”
엘렌시아는 깨달았다.
‘제정신이 아니야! 미쳤어!’
자신은 광신도 집단에 붙잡힌 것이다.
마리카는 덜덜 떠는 엘렌시아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두려워 말아요. 지금부터 제 몸을 빌려 이에리스 님의 음성을 들려드리겠습니다.”
마리카는 눈을 감더니 어느 순간 돌연 부릅떴다.
“직접 말을 나누는 것은 처음이군. 이방인이여.”
여자의 입에서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몸에 다른 존재가 들어간 듯한 형상이었다.
“내가 이에리스다. 너를 이 세상으로 초대한 존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