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132)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132화(132/183)
<132화>
“뭐, 뭐라고……?”
엘렌시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저자가 지금 뭐라 했나.
“당신이 나를 엘렌시아의 몸에 빙의시켰다고?”
“틀려. 나는 문을 열었을 뿐이지 그 몸을 고른 것은 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잊었는가? 간절히 바라지 않았는가. 그 몸의 주인처럼 살고 싶다고.”
엘렌시아는 숨을 들이켰다.
“나도 엘렌시아처럼…….”
죽기 전에 무심코 희망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게임 속 공주님처럼 살게 해달라고.
마리카가 고개를 내저었다.
“하필이면 벨레론의 자손을 고르는 바람에 곤란했다. 다른 몸이었다면 좀 더 일찍 접촉할 수 있었을 텐데.”
“……왜 나를 이 세상에 떨어트려 놨어?”
엘렌시아의 불끈 쥔 주먹이 떨렸다.
“나를 제대로 돌봐주지도 못할 거면서 왜 이 세상에 데려왔냐고! 왜!”
눈앞의 존재가 자신이 원망했던 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분노가 들끓었다.
분노는 두려움도 잊게 해줬다. 이제까지 겪은 수모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데이터 쪼가리들한테 웃음거리가 됐다. 냉대받았으며, 맞기도 했다.
“내가 원하던 게임 속 공주님의 삶은 이게 아니었어!”
발광하는 엘렌시아를 보며 마리카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큭.”
그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하하하!”
“왜 웃어!”
“큭, 크흐흐…….”
그녀는 눈물까지 흘리며 한바탕 웃다가 겨우 웃음을 그쳤다.
“아직도 여기가 단순한 게임 속이라고 여기는 것이냐.”
“……뭐?”
“이건 그렇게 믿고 싶은 건지, 멍청한 건지.”
“누굴 바보로 취급하는 거야!”
“아니다. 흘려들어라.”
마리카가 엘렌시아의 어깨를 살갑게 토닥였다.
“너는 그 정도가 딱 적당해.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있다니까.”
자신을 노려보는 엘렌시아를 무시하고 그녀는 걸어갔다. 맨 끝 쪽에 위치한 제단 쪽으로.
“네가 어떤 꿈을 가지고 여기 왔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한테 온 이상 밥값은 해줘야겠어.”
“밥값이라니?”
제단에 걸터앉은 채 여자는 한쪽 입꼬리만 올려 웃었다.
“귀한 공주님 대우는 끝이라는 뜻이다.”
하하하하하.
마리카가 웃자 신도들도 따라 웃었다. 지하 굴 안을 괴기스러운 웃음소리가 가득 채웠다.
엘렌시아의 안에서 공포심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가 좀 구해줘……!’
그러나 자신을 보호해 줄 존재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 * *
황제의 집무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리볼버는 바닥에 떨어졌다.
유스티스는 물끄러미 떨어진 리볼버를 내려다봤다.
또 실패했다. 그는 결국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이유는 이사벨라가 막 떠났던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좋으나 싫으나 그가 어깨에 짊어진 짐은 막중했다.
황제가 후계자도 남기지 않고 사망한다면 제국에는 큰 혼란이 초래될 터. 더욱이 엘렌시아의 몸에 들어간 침입자가 다음 황제가 된다면 최악의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죽음이 목전에 이르렀다고 여기자 두 얼굴이 어른거렸다.
필로멜. 착한 그 아이는 유스티스를 원망했지만 불행해지기를 바라진 않았다. 필시 자신이 죽으면 마음의 가책을 느낄 테다.
그리고 엘렌시아. 죽은 아내가 목숨과 맞바꿔 남기고 간 아이.
단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아이의 얼굴은 죽음 앞에서 점점 더 선명해졌다.
‘필로멜에겐 내가 삶에서 영영 사라져 주는 편이 이롭겠지만 그 아이는 아니야.’
만에 하나 신전 측에서 진실을 알게 된다면? 침입자는 경계하라는 신탁까지 내려진 존재다.
‘당연히 배제하려 들겠지.’
또한 엘렌시아를 눈에 거슬려 하는 존재는 신전뿐만이 아니다.
마탑주. 필로멜이 엘렌시아를 찾으러 상점이란 곳에 들어갔을 때, 그자와 같은 장소에 머무를 기회가 있었다. 늦어지는 딸을 기다리며 그는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이해를 못 하겠어. 왜 필은 쓸데없는 고생을 사서 하는 걸까.”
겨우 그런 인간을 위해서.
입 밖으론 뱉지 않았지만 차가운 눈빛은 그리 말했다.
일전에 이곳에서 대화할 적에도, 딸이 진짜 엘렌시아에 대한 걱정을 내비칠 때마다 그자는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필로멜은 보지 못했으나 맞은편에 앉은 자신은 똑똑히 봤다.
‘웬만하면 필로멜의 뜻에 반하는 짓은 하지 않겠지만…….’
만일 적으로 돌아선다면 신전 이상으로 까다로운 상대다.
유스티스는 임시 비서관을 호출해서 물었다.
“엘렌시아의 수색은 어떻게 되어가지?”
“황녀님의 인상착의와 비슷한 이를 목격했다는 제보는 계속해서 들어오고 있습니다.”
비서관은 들고 있던 서류를 뒤적거렸다.
“현재 황녀님을 직접 뵌 적이 있는 자들을 보내서 제보의 진위를 가리고 있으니…….”
“내가 간다.”
“예? 폐하께서요?”
“부모보다 자식을 더 잘 알아볼 자가 있겠나.”
“제보가 전국에서 들어오는 탓에 거리가…….”
“마법으로 이동하면 된다.”
“하오나 국정도 돌보셔야 하는데 옥체를 생각하심이…….”
“됐다. 얼른 제보가 들어온 장소나 정리해서 올리도록.”
황제가 뜻을 굽히지 않자 그는 하는 수 없이 명을 따랐다.
자신이 직접 가야만 했다. 황궁에 소속된 자라고 해서 모두 신뢰할 순 없었다. 그가 신전 측에 세작을 붙였듯이, 황궁 내에도 다른 자를 섬기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더구나 목숨을 노린다면 지금이 적기이겠지.’
그 아이가 제 손에서 빠져나간 바로 이때.
그는 딸아이의 몸을 찾기 전까지는 절대 죽을 수 없었다. 엘렌시아를 지켜줄 존재는 세상에서 자신이 유일하니.
설사 침입자를 그 몸에서 쫓아낼 방법이 없다 하여도 상관없다.
엘렌시아는 반드시 자신의 곁에 있어야만 한다. 일평생 빈껍데기로 남는 한이 있어도. 그것이 이제 그의 삶에 남은 유일한 목적이므로.
빈 집무실에서 황제는 낮게 읊조렸다.
“어떻게 해서든 되찾을 거다. 어떤 희생을 치러서라도.”
* * *
필로멜은 눈을 떴다. 창으로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빛으로 보건대 이른 아침이었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필로멜은 머리를 긁적였다.
“간밤에 뭔가 뒤숭숭한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난다.
“아무렴 어때.”
필로멜은 제 방을 돌아봤다.
마탑에서의 생활이 시작된 지도 어언 보름이 지났다. 새로운 생활 공간도 꽤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정말 난리였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도자기며, 보석이며 온갖 사치품이 방 안 가득 채워져 있었다.
“어때? 멋지지? 끝내주지?”
마탑주는 의기양양한 낯으로 방을 소개했다. 그 휘황찬란한 모양새는 그의 작품이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필로멜이 여태껏 경험해 보지 못한 방을 선사해 주고 싶어서였다는데…….
‘아무리 갑부라도 누가 욕조에 금화를 채워두냐고요.’
재산을 자랑하지 못해 안달이 난 졸부가 값진 물건이라면 모조리 사서 방에 모아둔 꼴이었다.
“뭐, 황녀의 방보다 더한 것을 만들려다 보니 그런 작품이 나온 것이겠지만.”
어쨌거나 르귄의 성의는 필로멜에 의해서 정리됐다. 마음은 고마웠지만 정신 사나워서 편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필로멜은 가볍게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에 방에서 나왔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마탑주님께서 또 사라지셨다!”
“시급히 결정해 주셔야 하는 일이 있는데 대체 어디 가신 거야!”
마법사 몇이 마탑주의 방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이제는 일상적으로 보는 광경 중 하나다.
필로멜이 배정받은 방은 마탑주가 기거하는 공간과 마찬가지로 마탑의 최상층에 있었다.
“어엇!”
필로멜을 발견한 그들이 깍듯하게 인사를 해왔다.
“좋은 아침이네요. 필로멜 님!”
“잠은 편히 이루셨어요?”
“네. 저는 잘 잤어요. 좋은 아침이에요.”
“그거 다행이네요.”
“수면이 건강에 참 중요하죠.”
마법사들이 어색하게 웃었다. 필로멜을 대하는 태도에서 숨길 수 없는 어색함이 드러났다.
필로멜은 몇 번이나 자신을 특별 취급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세 형제는 마탑주의 자식이지만 평범하게 이름으로 불리며 격의 없이 남들과 어울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법사들은 크게 난처해하면서 황녀님이셨던 분을 편하게 대하기 힘들다고 답했다.
르귄의 태도도 한몫 거들었다. 마탑주가 제 딸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서 뒤로 넘어갈 뻔한 마법사들이 수두룩했다.
‘저들이 내 존재에 익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이곳에서 살기로 한 이상 마탑의 자연스러운 일원이 되는 것이 목표다.
“그런데 무슨 일 있나요?”
필로멜은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 역력한 그들을 향해 물었다.
그들은 하소연을 쏟아냈다.
“마탑주님께서 보이지 않으십니다! 또 사라지셨어요!”
“정말이지, 차라리 마탑에 안 계셨을 때가 더 일 처리 속도가 빨랐던 것 같아요.”
“맞아! 어쩌다가 마탑에 들르면 밀린 일을 한꺼번에 끝내놓고 가셨는데.”
“그분을 모신 지 십 년 가까이 되지만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은 처음 봤어.”
“그런가? 내 눈에는 그냥 내용은 안 읽고 서명만 하시는 것처럼 보이던데.”
“얘가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가, 뭘 모르네.”
“내가 뭘?”
“그래야지 우리가 편해. 읽어봤자 꼬투리밖에 더 잡히겠냐.”
“……그건 그래.”
“내가 팁 하나 주자면, 금액 큰 연구비를 결재 올릴 땐 무조건 그분이 기분 좋으실 때를 노려.”
어느새 자신의 존재를 잊었는지 편하게 잡담을 나누는 그들을 보며 필로멜은 고뇌했다.
‘이 집단 괜찮은 건가?’
그녀가 길지 않은 시간 느낀 바, 마탑의 운영은 상당히 주먹구구식이었다. 르귄의 일 처리는 말할 것도 없이 대강대강, 하급자들도 적당히 그의 비위를 맞춰주며 얼렁뚱땅.
다들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에는 대단한 열정을 보였으나 아니라면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마법사들의 성향이 원체 자유분방해서 어쩔 수 없다지만…….
‘아, 뜯어고치고 싶다.’
황궁의 칼 같고 엄격한 체계에 익숙해진 필로멜의 눈에는 영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때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다.
“필, 좋은 아침이에요. 근데 아침부터 무슨 일 있어요?”
막 부유석을 타고 꼭대기 층에 도착한 렉시온이었다.
“마탑주님께서……!”
그는 동료들의 난처한 얼굴만으로도 대강 상황을 파악했다.
“이럴 때는 방법이 있죠.”
마탑주의 장남이자 비서는 믿음직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