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142)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142화(142/183)
<142화>
‘자기 걱정이나 할 것이지.’
제레미아는 픽, 웃은 후에 상대를 보며 말했다.
“어떡하나? 필로멜은 갔는데.”
렉시온은 여유롭게 답했다.
“괜찮습니다. 당신을 제압한 다음에 데리러 가면 됩니다.”
제레미아의 반듯한 이마에 빗금이 갔다.
“믿는 구석이 있나 보군.”
“만약의 상황을 위해 대비는 이중으로 하는 편이거든요.”
“마음에 안 드는 자식.”
“말할 시간이 아깝네요. 얼른 덤비기나 하세요.”
“네 마음대로 될 것 같나?”
“제레미아, 당신은 나와의 대련에서 단 한 번도 이긴 적 없었던 것 같은데.”
제레미아는 제 형의 도발에 걸려드는 대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아니, 필로멜 말이야. 안 그런 듯 보여도 자기 주관이 뚜렷한 녀석이야.”
“…….”
“절대 네 손바닥에서 놀아나지 않을걸.”
고작 넉 달밖에 겪어보지 않은 동생이지만 제레미아는 그리 확신했다. 그것은 렉시온도 마찬가지인 듯 대꾸가 없었다.
* * *
“이건 또 뭐야…….”
달리다가 멈춰 선 필로멜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제레미아가 분명 일직선으로 달리면 된다고 했는데.”
그러나 도저히 일직선으로 나아갈 순 없는 상황이었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나타난 폭이 넓은 복도엔 미로가 펼쳐져 있었으니.
그녀는 미로의 벽을 만져봤다.
“이끼가 끼었어.”
오랜 기간 관리가 안 되고 있었다는 증거. 마탑 다른 곳의 벽과는 명백히 다르다.
즉, 이 미로는 갑자기 생겨난 구조물이다.
‘아니, 원래부터 있었으나 이곳에 있던 것은 아니었어.’
마탑 생활의 첫날, 렉시온은 필로멜에게 마탑을 안내해 주며 이런 말을 했었다.
“이상한 버튼을 발견해도 절대 누르지 마세요. 어떤 것이 튀어나올지 모르거든요.”
그의 설명에 따르면, 마탑에는 외적의 침입을 막는 다양한 장치들이 설치되어 있다고 한다.
‘벽면으로부터 칼이 튀어나온다든가. 바닥이 꺼진다거나.’
마탑에 적대적인 세력이 많았고 전쟁도 일상이었던 시기가 남긴 낡은 흔적들. 보아하니 눈앞의 미로도 그중 하나인 듯했다.
“어쩐지 렉시온이 나를 너무 순순히 보내준다 싶었어…….”
필로멜은 물끄러미 미궁 안쪽으로 통하는 입구를 바라봤다.
출구는 분명 있을 것이다. 밖으로 나가려는 그녀의 입장에서나 저곳이 입구이지, 외부에서부터 침입하려는 자들의 시점에서 보자면 이곳은 출구다.
‘나의 출구는 저들의 입구.’
상식적으로 침입자들을 가둬두려고 만든 미궁에 입구를 뚫어놓지 않았을 리는 없다.
‘그리고 안에 위험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을 걱정도 없어.’
필로멜의 발을 묶어둘 작정이었으면 더 쉽고 간단한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그럼에도 굳이 미로를 고른 이유는 나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거야.’
그녀는 입구를 바라봤다.
자신의 수중에 미궁의 지름길을 알려줄 만한 도구는 없었다.
“정공법으로 가는 수밖에.”
필로멜은 입구로 들어서며 한쪽 벽면에 오른손을 댔다. 그러고는 손을 떼지 않은 채 벽을 따라 움직였다.
일명 우수법(右手法). 미로를 탈출하기 위한 대표적인 방법이다.
모든 벽은 이어져 있기에 벽을 따라가다 보면 언젠가는 출구에 도착하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게 대체 언제인가이지만.’
우수법을 사용하면 중간에 같은 곳을 빙빙 돌 걱정은 없지만, 미로의 모든 구역을 지나야 하므로 시간이 많이 소요된다.
‘제레미아가 만들어 준 기회를 헛되이 날려선 안 돼.’
자연히 걸음이 빨라진다. 필로멜은 거의 뛰듯이 걸었다.
이끼 냄새가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익숙해질 무렵, 드디어 출구에 도착했다.
“다 왔다!”
미로를 빠져나오자 북동쪽 4번 문이 눈에 들어왔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 필로멜은 문을 향해 달렸다.
쿠구구구궁.
그때, 뒤에서 아까 전처럼 굉음과 함께 땅이 진동했다.
미로가 흔들리더니 점점 밑으로 꺼지기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미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고, 평범한 바닥만 남았다.
“바닥 밑에 있었구나.”
유사시에 미로가 바닥에서 튀어나오는 구조였나 보다. 렉시온과 처음 대치했을 때 느꼈던 땅울림은 미궁이 솟아나며 발생한 현상이었다.
필로멜은 다음 순간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렉시온이 엄청난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필! 어딥니까?”
그가 사방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베일의 효과로 렉시온의 눈엔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필로멜은 구석으로 물러선 채 가만히 숨을 죽였다.
‘렉시온이 이 자리를 뜰 때까지 기다리자.’
필로멜의 모습이 보이지 않으면 의심이 고개를 들 수밖에 없다. ‘이미 문밖으로 나간 것이 아닐까?’ 하는. 그리고 자연스레 밖을 확인하고 싶을 테다.
‘렉시온은 무지의 베일의 존재를 알고 있지만 급할수록 시야가 좁아지기 마련이지.’
지금은 그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기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다.
“……늦었나?”
렉시온은 그녀의 예상대로의 오해를 입에 담으며 문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직 나가지는 않았군.”
문을 살피던 렉시온이 중얼거렸다. 손에는 아주 작은 종잇조각이 쥐어져 있었다.
필로멜은 곧 그 종잇조각의 정체를 깨달았다.
‘저것을 문틈에 끼워뒀었구나!’
문을 이용한 사람이 있었는지 알아보기 위한 장치다. 문이 단 한 차례라도 열린다면 종잇조각은 바닥으로 떨어질 테니.
필로멜은 그의 철두철미한 준비에 혀를 내둘렀다.
“필, 아직 여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부탁이니까 모습을 드러내 주세요.”
렉시온은 그리 말했지만 당연하게도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를 생각은 없다.
‘아쉽지만 다른 쪽 문으로 나가는…… 어?’
렉시온의 동태를 살피던 필로멜의 눈이 커졌다. 그의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머리색이 붉어 멀리서는 알아보지 못했다.
‘대체 형제 싸움을 얼마나 격하게 한 거야!’
두고 온 제레미아의 상태가 걱정됐다. 싸움의 승자가 저 정도인데 패자는 어떨까.
“같이 돌아갑시다. 당신이 나서지 않아도 악신을 막을 방법이 따로 있을…… 윽.”
렉시온이 어지러운지 휘청댔다.
필로멜은 저가 가려던 길과 그를 번갈아 봤다. 그러고는 입술을 깨물고는 무지의 베일을 벗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필…….”
“상처를 보여주세요.”
필로멜은 배낭을 뒤적거리며 반창고를 찾았다. 별빛 상점의 상품으로 붙이면 웬만한 상처는 순식간에 치료해 주는 아이템이다.
그러던 중 툭, 무언가 바닥에 떨어졌다.
“아차.”
반창고를 꺼내려다 다른 것이 딸려 나왔다. 직접 만든 쿠키가 든 종이봉투. 가는 길에 간식으로 먹으려고 챙겨뒀었다.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는 렉시온의 시선에 머쓱해져서 필로멜은 재빨리 반창고를 꺼내 들었다.
“어떻게 싸웠기에 이마가 찢어졌어요?”
그의 이마에 반창고를 붙여주며 필로멜이 타박했다.
“제레미아가 다짜고짜 제 머리를 향해 칼을 휘둘렀습니다. 저는 다리 한쪽 부러트리는 선에서 끝내 줬는데.”
형제 싸움이 참 살벌했다.
“그래도 렉시온이 이겼네요.”
“저를 꺾으려면 2년은 이르죠.”
반창고에서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렉시온은 동생을 응시했다.
“눈빛을 보아하니 제 설득에 마음을 바꾼 것은 아니군요.”
“네. 저는 갈 거예요.”
“그럼 왜 제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저를 치료해 줬죠? 그러지 않는 편이 더 합리적일 텐데.”
“글쎄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왠지 이대로 그를 두고 가면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뿐.
더욱이 다른 문으로 가려면 일단 렉시온의 청동상들을 지나야 한다. 여기에서 그를 설득하는 것이 최선이다.
“저는 여태껏 당신을 속여온 나쁜 놈이잖아요?”
“그건 좀 충격이었어요. 근데 뭐……. 돌이켜 보니 저도 처음부터 순수한 마음으로 여러분을 대한 것은 아니더라고요.”
책의 진실을 알아내는 데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고 했다.
‘같이 지내다 보니 즐거워져서 잊어버렸지만.’
이윽고 필로멜은 반창고를 떼어냈다. 그의 이마는 상처 하나 없이 매끈했다.
“그리고 저는 사실 렉시온이 저를 이용만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왜죠?”
“지금도 이렇게 저를 막으려고 하잖아요. 제 안위를 걱정해서.”
“…….”
“악신의 연구를 위해서라면 저를 보내는 편이 더 이득이지 않나요? 저를 미끼 삼아 이에리스를 끌어낼 수도 있잖아요.”
“아무리 저라도 그런 짓까지 하진 않는다고요.”
렉시온은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이마를 문질렀다.
“……뭐라고 할까, 이제까지의 삶에 회의감이 드네요. 편하게 사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이마도 깨지고, 동생이랑 싸우고.”
그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저는 지금 이곳에서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네?”
“제가 도착했을 땐, 필은 이미 떠난 후인 것으로 합시다.”
“렉시온!”
“잠깐만요. 이거 가져가세요.”
그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필로멜에게 건넸다. 제레미아의 변신 목걸이였다.
“외출을 금지하면서 제레미아한테서 압수한 물건입니다. 앞으로 도움이 될 겁니다. 그 애도 당신이 가지고 있기를 원하겠죠.”
필로멜은 목걸이를 챙기면서 슬쩍 물어봤다.
“그런데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뀐 거예요?”
“저는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면서 당신은 그러지 못하게 하는 것은 치사하잖아요.”
“악신에 대한 연구요?”
“그렇습니다.”
“특별히 그 연구를 하고 싶은 이유가 있나요?”
“음……. 딱히 없어요. 그냥 하고 싶으니까 하는 겁니다. 어렸을 때부터 궁금한 것이 생기면 밤에 잠도 못 자는 성격이라. 그리고 원래 하지 말라 정해놓은 짓은 더 하고 싶은 법이잖아요.”
개구쟁이처럼 웃는 렉시온을 보며 필로멜도 마주 웃었다. 이런 면을 보면 그도 어쩔 수 없는 르귄의 아들이다.
“나머지는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해요!”
필로멜은 힘차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래. 나중을 기약하자.’
르귄과 마찰을 빚고 렉시온의 숨겨진 본심을 알게 되면서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필로멜과 그들은 너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가족이 되는 단계를 제대로 거치지 않은 것이다.
‘르귄과 렉시온은 최대한 내 기분을 맞춰주려고 했고, 나도 그들에게 좋은 면만 보이고 싶었어.’
실은 외로웠다. 가족을 원했다. 줄곧 황제를 자신의 가족으로 느끼지 못해왔으니까.
어찌 보면 지금의 상황은 필연적인 것이다. 십수 년간 함께했던 황제와도 서로 무슨 마음을 품고 있는지 짐작하지 못했다.
‘만난 지 이제 겨우 넉 달 된 우리가 서로에 대해 잘 알 리가.’
하지만 그것이 이제까지 쌓은 그들의 관계가 거짓이라거나 헛수고라는 뜻은 아니다.
그때, 필로멜의 시야에 마탑 주변에서 경계를 서는 마법사들이 들어왔다.
“그쪽은 이상 없었나?”
“그래.”
“그렇다면 반대쪽을 둘러볼 차례군.”
그녀는 베일의 효과로 들키지 않은 채 그들을 지나쳤다. 렉시온이 알려준 대로 숲길로 들어섰다. 앙헬리움으로 가는 지름길.
“아앗!”
그런데 앞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필로멜의 몸이 기우뚱했다. 흙바닥이 물컹거렸다.
바닥은 위로 솟구치더니 몸을 일으켰다. 바닥이 아니었다.
거대한 뱀이 흙빛의 보호색을 지우고 본모습을 드러냈다.
“바실리스크!”
르귄이 길들인 상급 몬스터, 바실리스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