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148)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148화(148/183)
<148화>
* * *
필로멜은 대신전으로 향하는 동안 에밀리로부터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제가 사라진 황녀를 가까이에서 모셨잖아요. 폐하께선 제가 그 여자 찾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여기셨는지, 여기저기에 절 데리고 다니시더라고요.”
에밀리는 작게 덧붙였다.
“아직 그다지 도움이 된 적은 없지만요. 참! 그러고 보니 제가 드린 그 공책은 어땠어요?”
황궁을 떠나올 때, 그녀에게 침입자의 공책을 건네받았었다.
“내용은 대강 해석됐는데…….”
필로멜은 공책을 별빛 상점으로 가져가 여우에게 들이밀었다. 물론 그런다고 바로 번역이 되진 않았다.
이런저런 실랑이 후에.
“텍스트 읽기 기능을 활성화하시겠습니까?”
드디어 여우가 해결 방법을 제시했다. 여우는 낭랑한 목소리로 공책의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제목, 투르디스 연대기.”
“응? 제목?”
“투르디스는 아름다운 강이 국토를 가로지르는 국가였다. 투르디스엔 다양한 종족들이…….”
결론만 말하자면 제목이 연대기인 소설이었다. 투르디스 왕국이란 곳은 이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혹시 몰라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해서 읽었으나 투르디스 연대기는 침입자의 창작물이 분명했다.
‘순수 창작인지 또 다른 것을 베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이 빠졌다. 나름 기대했는데 공책은 침입자의 심심풀이 자작 소설에 불과했다.
필로멜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 여자의 행방과는 무관한 내용이었어.”
“……별 도움이 안 되었군요.”
에밀리가 눈에 띄게 실망하기에 한마디 덧붙였다.
“가져다준 것만으로도 고마워.”
에밀리는 헤헤 웃었다.
“그래도 다른 방식으로 필로멜 님을 도왔다고요!”
“응?”
“선발식 소식을 듣고 필로멜 님께서 용사가 되시는 데 도움을 드리고 싶었어요.”
“그래서?”
“마침 사람들이 필로멜 님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제가 말했죠.”
“뭐를?”
“황궁에서 켈튼 백작 영식을 날려버리신 일이요! 극적인 재미를 더하기 위해 양념도 좀 쳤고요.”
“……설마 손가락으로 심장을 어쩌고 하는 그거?”
“맞아요!”
그게 너였냐.
“잘했죠?”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듯 에밀리는 필로멜에게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냈다. 마음이 약해진다.
“고맙지만 다음부턴 그러지 마.”
어느덧 세 사람은 대신전에 다다랐다.
에밀리는 필로멜과 나사르를 중앙정원으로 이끌었다.
대신전을 방문하는 귀족 후원자들을 위하여 귀족식으로 꾸며진 정원. 원래도 산책하는 사람이 많은 곳은 아니었는데 오늘은 유달리 사람이 없었다.
원인은 흉흉한 낯으로 정원의 경계를 지키는 황제의 기사들이었다.
“폐하께선 이 안에 계셔요.”
에밀리는 중앙정원의 입구를 가리켰다.
“그리고 제가 이 사실을 알려드린 것은 제발 비밀로 해주세요.”
“왜?”
“폐하께서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필로멜 님께 알리지 말라고 하셨거든요.”
“이유가 뭔데?”
“저야 모르죠. 그냥 우연히 만난 척하며 필로멜 님이 잘 지내는지만 알아 오라고 하셨어요.”
“알았어. 비밀로 할게.”
하지만 갑자기 필로멜이 나타나면 황제는 눈치챌 텐데.
‘얘도 참 간이 큰 건지 나한테 충성하는 건지.’
황제의 명을 대놓고 어긴다.
“다녀오시지요. 저희는 여기서 기다리겠습니다.”
나사르와 에밀리를 그 자리에 남겨 두고 필로멜은 입구로 향했다.
“오랜만이에요, 경들.”
“레이디 필로멜!”
그녀와 안면이 있는 기사들은 황제가 있는 곳을 넌지시 알려줬다. 뭔가 필로멜이 해줬으면 하는 것이 있는 듯한 시선이었다.
그게 뭘까, 생각하며 필로멜은 정원의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정원에 중심에 이르러서 그녀는 황제를 발견했다.
유스티스는 분수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시선은 바닥을 향한 채.
‘어?’
이상한 점을 알아챈 것은 그와의 거리가 열 발자국 정도 남았을 즘이었다.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황제는 남의 기척을 기민하게 감지하는 자이다. 7년 전의 그때도 문밖에 있던 필로멜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저, 폐하……?”
그의 몸이 흠칫 굳었다. 놀라움에 물든 푸른 눈동자가 필로멜을 향했다.
“필로멜?”
진짜 눈치채지 못한 듯하다.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 잠깐!”
황제가 재빨리 몸을 일으키더니 멀어지기 시작했다. 필로멜은 그를 따라갔다.
“폐하, 어디 가세요!”
“너야말로 왜 따라오지?”
“그야 폐하께 드릴 말씀이 있으니까……!”
필로멜은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자신을 피하는 것이다.
‘아니, 잘못한 것은 그쪽이면서 왜 자기가 날 피하는 거야!’
오기가 치민 필로멜은 발을 재게 놀려 유스티스를 따라잡으려 했다. 그러나 타고난 다리 길이의 차이는 극복하지 못했다.
“아얏!”
결국 그녀가 넘어지고 말았다.
“필로멜!”
저만치에 떨어져 있던 황제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괜찮나? 상처는!”
“무릎이 조금 까진 것 같네요.”
그가 사방에 대고 소리쳤다.
“궁의! 궁의를 불러라!”
“……폐하, 대신전에 궁의도 데리고 오셨나요?”
“아.”
데려오지 않았군.
필로멜은 제 다리를 붙들고 있는 남자의 얼굴을 흘끔거렸다.
낯빛이 파리한 데다 평소보다 눈빛의 날카로움도 덜한 것이……. 살면서 본 그의 모습 중 가장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마탑에서 르귄과 렉시온이 나눴던 대화가 떠오른다. 황제가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고 했지.
괜히 마음이 불편해진다.
“치료가 가능한 신관을 부르도록 하겠다.”
필로멜은 주머니에서 반창고를 꺼내며 그의 말에 대꾸했다.
“이것만 있으면 괜찮아요.”
반창고의 효과로 상처는 금세 아물었다.
“…….”
“…….”
어색한 침묵이 시작됐다.
필로멜은 황제가 또 도망칠까 싶어 옷자락을 꼭 잡았으나,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후에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말씀해 보세요. 왜 도망치신 거예요?”
“……이제는 이렇게 내 얼굴을 봐도 괜찮은가.”
“네?”
“예전에 네가 내 얼굴 따위는 보기 싫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나?
그날의 진상이 밝혀졌을 때는 그런 말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보기 싫었으면 애초에 쫓아가지도 않았다고요.”
“필로멜.”
그가 한참을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다 입을 열었다.
“내게 다시 한번 용서를 구할 기회를 주겠나.”
“……주지 않으면 잘못에 대해 사과하지 않아도 되나요?”
“어떨 때는 말 없이 눈앞에서 사라져 주는 편이 더 나은 선택일 때도 있으니까.”
그럴지도 모른다. 확실히 필로멜도 처음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는, 사과고 뭐고 황제의 얼굴을 마주하는 것 자체가 싫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저는 사과 받고 싶어요.”
유스티스의 사과는 예상 밖의 서두로 시작되었다.
“혹시 왜 나의 권능이 순간이동인지 알고 있나?”
보통 신성력으로 행해지는 마법을 ‘권능’이라 부른다.
“글쎄요. 황족이 어떠한 권능을 갖게 되는지는 임의로 정해지는 것이 아닌가요?”
“이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진실이지만, 황족의 권능은 그자의 성향에 따라 정해진다.”
“성향이요?”
“예를 들면 공격적인 성향을 지닌 황족은 파괴의 권능을 발현하는 식이지.”
“이타적인 사람은 치유 능력을 가지게 된다거나 하나요?”
“이해가 빠르군.”
<황녀 엘렌시아>와 게임 속 진짜 엘렌시아의 권능이 치유였다.
‘반면 가짜 엘렌시아는 그런 능력을 한 번도 보여준 적 없었지.’
치유라면 남의 호감을 쌓기 쉬운 능력인데 왜 보이지 않았는지 줄곧 궁금했었다.
‘안 한 것이 아니라 못 한 것이었어.’
문득 필로멜은 그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그런데 갑자기 이 이야기는 왜 꺼냈을까?
“그렇다면 폐하의 권능인 순간이동은…….”
황제는 순간적으로 필로멜의 시선을 피했다.
“목적지에 빨리 도착하고 싶어 하는 성격이셔서? 답답한 것을 못 참으시는 편인가요?”
“……아니야. 순간이동의 권능은 회피 성향이 강한 사람에게서 나타난다.”
그는 잠시 심호흡을 하더니 필로멜의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
“나는 그동안 계속 도망쳐 왔다. 과거의 내 잘못으로부터.”
그제야 이해가 갔다.
필로멜은 도망친 자신을 데리러 온 황제를 본 후에야 그의 순간이동 능력을 알게 되었다.
그는 왜 하나뿐인 딸에게까지 자신의 권능을 철저히 숨겼을까. 그 능력은 유스티스에게 부끄러운 힘이었기 때문이다.
“진작 너에게 사과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않았지. 우리의 관계가 완전히 파탄 날까 두려웠어.”
“…….”
“한 번 막다른 길에 가로막혔다고 생각된 적이 있는데 그제야 명확하게 보이더군.”
황제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사죄를 말하면서도 너보다는 내 두려움이 우선이었어. 자격이 없었다. 부모로서도,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도.”
필로멜은 아무런 반응 없이 그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너무 늦었지만 미안하다.”
그가 용서를 구한다.
“어렸던 너를 방치했던 것, 그런 폭언을 했던 것, 끝까지 그 사실을 숨겼던 것. 그리고 그 밖의 것들 전부 내 잘못이다.”
“폐하.”
“날 평생 미워해도 괜찮아. 두 번 다시 내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네 앞에 절대 나타나지 않겠다.”
그는 필로멜이 당장 떠나기라도 할 것처럼 다급히 말했다.
“이것 하나만 들어다오.”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
“너는 강하고 좋은 아이다. 어디에 가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잘 살 거다. 그러니…….”
유스티스는 잠깐 눈을 감고 숨을 가다듬었다가 눈을 떴다.
“건강 잘 챙기고, 다시는 누구의 눈치도 살피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길 바란다.”
그것으로 끝.
선선한 가을바람이 어디선가 불어왔다. 정원은 향긋한 꽃내음으로 가득했다.
필로멜은 머릿속으로 할 말을 정리하다가 곧 포기하고는 입을 열었다.
“저는 솔직히 폐하를 용서하지 못하겠어요.”
“……그렇겠지.”
“좀 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유스티스는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이 필요한가?”
“하아, 복잡한 문제예요.”
필로멜은 머리를 긁적였다.
“용서한다, 아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쪽인지 딱 떨어지지 않는다고요. 다른 생각할 거리도 많고 머리가 복잡해서…….”
그녀도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몰랐다.
그냥 복잡했다. 예전부터 황제와 관련된 일들은 늘 필로멜에게 양가적인 감정이 들게 했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관계의 본질일지 모른다.
유스티스가 말했다.
“머리가 아프면 굳이 생각할 필요 없어. 내가 나쁜 놈이니…….”
“그리고! 아까부터 느꼈는데 자꾸 자신을 깎아내리지 마세요.”
“…….”
“제 기분까지 안 좋아져요.”
“알겠다. 네가 그렇다면 하지 않으마.”
대답은 잘한다.
필로멜은 청명한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좋아. 이것도 일단 용사 선발식이 끝난 다음에 생각하자.’
마탑 가족들과의 일도 그렇고 산적한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는 용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명확히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
“폐하께서 좀 더 일찍 사과하셨다면 좋았을 텐데요…….”
“…….”
“좀 더 일찍. 제가 황궁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아니 기왕이면 도망치기 전에…….”
7년 전, 그 말을 들었던 직후에. 아니면 훨씬 그 이전에.
‘그랬다면 우리의 관계가 지금처럼 뒤틀리지는 않았을 것 같아.’
진심을 숨기거나 상대의 눈치를 살피지 않으며, 제대로 된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면.
필로멜은 상상해 봤다. <황녀 엘렌시아>를 들고 아비에게 달려가는 어린 자신의 모습을.
그리했다면 좀 더 일찍 엘렌시아를 찾아냈을 테다. 침입자가 나타나도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진 않았을지 모른다.
‘르귄과도 더 빨리 만나고, 나사르와는 훨씬 전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을 수도 있어.’
하지만 잠깐의 달콤한 상상일 뿐이었다. 필로멜의 상상은 바람에 지는 꽃잎처럼 흩어졌다.
유스티스가 나직이 대답했다.
“그러지 못한 것이 내 평생의 후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