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158)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158화(158/183)
<158화>
그녀의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대신관이 밝게 말했다.
“너무 긴장하지 말게나. 자네 혼자서 악신을 상대해야 하는 것은 아니야. 우리 신전도 있어.”
그가 검지로 창밖을 가리켰다.
“저기, 저 탑 보이지?”
대신전의 정 가운데, 미려하게 조각된 석탑이 우뚝 솟아 있다.
“구세의 탑이군요.”
신관들이 먼 옛날부터 제 신성력을 조금씩 비축해 놓았다는 탑.
“이제는 아주 방대한 신성력이 모였지. 악신이 쳐들어와도 항전할 수 있을 정도야.”
그렇다면 저 탑으로 르귄을 도울 방법이 없을까.
필로멜이 그러한 질문을 하려던 때였다.
부르르. 주머니에 넣어둔 필로멜의 통신석이 진동하며 반짝였다.
필로멜은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 연락을 무시하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가 르귄이었다.
그녀는 재빨리 통신을 받았다.
“르귄!”
르귄이 악신의 본거지로 들어간 이후로 쭉 그와의 통신은 먹통이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무사해요? 악신을 물리쳤나요?”
질문을 쏟아내는 필로멜의 귓가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필, 지금 대신전이야?
“그, 그렇죠.”
-도망쳐! 이곳이 아니었어! 놈은 지금 대신전에 있을 거야!
필로멜이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기도 전에 일은 터졌다.
쾅!
그 순간, 귀가 먹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의 굉음과 함께 충격이 필로멜을 휩쓸었다.
필로멜은 추가적인 충격을 대비해 수그리고 있다가 얼마 후, 몸을 일으켰다.
“이게 대체…….”
유리가 산산이 깨져 나간 창 너머로 바깥 풍경이 눈에 보였다.
구세의 탑이 폭발했다.
“구세의 탑이……!”
대신관의 얼굴이 당혹감과 절망감으로 물들었다.
한때 대신전의 자랑이었던 탑은 형체도 남기지 않고 파괴되었다. 폭발의 충격으로 곳곳으로 날아간 탑의 잔해들 때문에 그 주변부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사람 살려!”
어떤 이가 잔해에 깔린 사람을 붙잡고 소리쳤다.
재앙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늘에서 검은 무언가가 탑이 있던 자리로 하강했다. 그리고 그것이 땅에 닿는 순간, 거대한 줄기가 순식간에 하늘 높이 자라났다.
‘줄기.’
딱 떨어지는 표현은 아니었으나 저 검붉은 물체는 그 단어로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대신관이 중얼거렸다.
“저게 무엇일꼬……?”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넋 놓고 구경할 틈은 없다.
“악신이에요!”
르귄이 알려줬다.
“저것은 분명 이에리스의 술수입니다! 얼른 발바드의 검을 손에 넣어야 해요!”
왜 의심해 보지 않았을까.
악신은 필로멜의 정신에 침입했다.
‘물리적으로도 내 가까이에 있었던 거야!’
혼란한 와중에도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했다.
대신전은 위기에 빠졌다. 필로멜은 다리를 삐끗한 대신관을 부축하여 발바드의 검이 안치된 보관실에 도착했다.
화아아아아!
대신관이 신성력을 발하자 금고의 문이 열렸다.
“이게 발바드의 검이네.”
필로멜은 건네받은 검을 유심히 들여다봤다.
‘낡고 볼품없어.’
전반적으로 손때가 탄 데다 칼자루는 어떠한 장식도 없이 가죽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스릉, 검을 검집에서 빼보니 날도 이가 다 빠져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가.’
발바드는 전설 속 인물이고, 그가 쓰던 물건이라면 검도 당연히 무척 오래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성물이니까 이 정도 상태로 보관될 수 있었을지도.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단검이어서 필로멜도 어렵지 않게 들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어?”
자세히 보니 검신이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이를 알아챈 대신관이 말했다.
“그대를 주인으로 인정했군. 그 검에는 선한 마음씨를 알아보는 재주가 있다던데.”
그리 들으니 좀 쑥스럽다.
필로멜은 검을 챙겨 들었다.
“이제 밖으로 나가봐요!”
1층으로 향하는 길에 대신관으로부터 그가 얼마 전 받았다는 예언의 자세한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그 검으로 악신의 심장을 찌르면 세상에 평화가 찾아온다는 예언이었네!”
검으로 심장을.
신의 서와는 달리 직관적이어서 좋다.
1층에 가까워졌을 때, 그들은 다른 무리와 마주쳤다.
“대신관님! 여기 계셨군요!”
“지금 큰일이 났습니다!”
대신관을 찾고 있던 신관들이었다. 대신관이 대답했다.
“나도 봤네. 구세의 탑이 파괴되고 괴상한 물체가 생겨났지.”
“그뿐만이 아닙니다!”
필로멜은 그들의 얼굴에 드리운 감정을 읽었다.
“몬스터입니다!”
“그 식물 같은 곳에서 무수한 몬스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극도의 공포심이었다.
* * *
“아아아악!”
“신관님, 살려주세요!”
“왜 대신전에 몬스터가 있는 거야!”
그야말로 아비규환.
바깥에 펼쳐진 광경을 본 필로멜은 굳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끼에에에엑! 검게 물든 몬스터들이 사람들을 무참히 도륙해 댔다.
‘하나, 둘, 셋, 넷…….’
필로멜은 몬스터의 숫자를 세다가 그만뒀다. 어림잡아도 한 자릿수는 아니다. 이곳에서 보이는 수만 해도 이만큼이라면, 대신전 전체에는 기백의 몬스터가 날뛰고 있을 터.
‘그리고 조금 전, 그 신관의 말이 맞다면 계속 불어난다……!’
멀리에서 절박한 비명이 들린다.
“신관님!”
“제 뒤로 오십시오! 어서!”
신관들이 신성력으로 몬스터들을 상대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몬스터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의 수도 너무 많았다.
대부분이 용사 선발식을 구경하러 온 이들이다. 오늘 대신전은 사람들로 미어터질 지경이었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피 냄새가 필로멜의 코를 찔렀다.
“웁……!”
필로멜은 치밀어오는 구토감을 간신히 짓눌렀다.
사람이, 그것도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간다. 너무 현실감 없는 풍경이다. 뿅망치를 꽉 쥔 그녀의 손이 사정없이 떨렸다.
필로멜은 무의식적으로 주머니에 든 통신석을 더듬어봤다.
‘르귄……!’
통신은 진즉 끊어졌다. 바로 구세의 탑이 폭발했을 때.
비단 필로멜이 가진 통신석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아까부터 통신석을 붙잡고 있던 어느 신관이 알렸다.
“대신관님! 외부와 연락이 안 됩니다! 무언가가 통신을 막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내부와의 연락은 어떤가?”
“되었다, 안 되었다 오락가락합니다. 그런데 통신이 연결되어도 잡음이 너무 많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연락을 돌리게나. 대신전 밖으로 사람들을 피신시켜야 해!”
“그, 그것이…….”
젊은 신관이 거의 흐느끼듯이 대답했다.
“정문 가까이에 있던 이들과 방금 연락이 닿았는데, 그곳엔 특히 몬스터가 더 몰려 있답니다.”
“다른 문들은?”
“모든 곳을 확인한 것은 아니오나 상황은 다 비슷해 보입니다.”
대신관은 침음했다.
돌연 나타난 몬스터 떼.
외부와의 고립.
지켜야 할 수많은 이들.상황은 최악이다.
시간이 흘렀다. 몇 분 되지 않았으나 숨 막히는 시간이었다.
그들을 노리는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유독 크게 들린다.
“크르르르.”
현재 이 주위는 몇몇 신관들이 신성력을 펼쳐서 몬스터의 접근을 막고 있었으나 울음소리까지 막을 순 없었다.
얼마 후, 드디어 대신관의 결단이 내려졌다.
“사람들을 성물 보관소로 모으시게. 이곳에서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티어 보세.”
그가 말을 이었다.
“아무리 외부와의 연락이 끊겼다지만 이곳 상황을 보면 지원군이 올 걸세.”
누군가 손을 들었다.
“봉화를 올리지요? 요즘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재료는 봉화대에 상시 비치되어 있습니다.”
다른 이들도 차츰 입을 열기 시작했다.
“전서구는 어떨까요?”
“하지만 하늘에는 비행형 몬스터가 있어서 비둘기가 무사히 도착할지는…….”
“해봐야 아는 것이지요.”
아까까지만 해도 우왕좌왕하던 이들이 대신관의 지도하에 평정심을 되찾아갔다.
“저, 대신관님.”
그때, 어느 신관이 말했다.
“사람들을 한곳에 모은다는 것이 과연 좋은 생각일까요?”
사람들이 주목하자 그녀는 제 주장을 폈다.
“일단 그 많은 사람들을 한데 모으기도 힘들며, 사람이 몰리면 몬스터 또한 몰릴 것입니다.”
“그래서?”
“구세의 탑이 폭파된 현재, 우리에게 저들을 한 방에 쓸어버릴 화력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대목에서 신관들은 구세의 탑이 있던 자리를 힐긋거리며 탄식을 흘렸다.
“그러니 차라리 각개격파를 하는 편이 낫지 않나 싶습니다.”
“……아쉽지만 지금은 그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네.”
묵묵히 신관의 의견을 듣던 대신관이 ‘줄기’를 가리켰다.
“저 밑에 있는 땅을 보시게나.”
필로멜을 비롯한 사람들은 곧 이변을 알아챘다.
땅이 검붉게 변했다. ‘줄기’와 같은 불길한 색. 대신관을 제외한 모두가 몬스터에게만 눈이 팔려 땅의 이변을 이제야 인지하게 된 것이다.
그들을 경악하게 한 것은 그 외에도 또 있었다.
“꽃과 풀이……!”
검붉게 변한 땅 위의 초목들이 모조리 시들어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잠깐! 저 검붉은 색이 점점 퍼지는 것 같지 않나요?”
한 신관이 제기한 의문이 맞았다. 자세히 보니 검붉은 땅은 주변부로 서서히 확장 중이었다.
대신관이 이 기현상의 정체를 알려줬다.
“악신의 힘에 의해 땅이 오염된 것이네. 생명을 낳는 힘을 빼앗고 불모지로 만드는 게야.”
사람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악신이라니……. 며칠 전에 들은 이야기가 사실이었어.”
본디 이에리스의 존재는 신관들 중에서도 일부에게만 허락된 진실. 대다수의 신관들은 대신관이 예언을 받은 후에야 그에 대해 알게 된 듯했다.
“저 땅을 밟으면 인간도 식물처럼 목숨을 잃겠지. 당장은 멀쩡해 보일지 몰라도 생명력을 잃는 걸세.”
“그러면 대신관님께서 사람들을 한데 모으라 하신 이유는…….”
“우리들의 힘으로 정화할 수 있는 범위는 한계가 있으니.”
즉, 신관들은 땅을 정화하며 몬스터를 상대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아직도 끝없이 줄기의 틈새에서 기어 나오는 저것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