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164)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164화(164/183)
<164화>
* * *
대사원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일 만한 지점에 이르렀을 때, 벨레론은 드디어 멈췄다.
필로멜은 군데군데 금빛으로 물든 대지를 바라봤다.
점처럼 작지만 사람들의 형상이 보인다. 많은 이들이 살아 있다. 반면 그들을 위협하던 몬스터들은 보이지 않았다.
‘몬스터도 해치워주셨구나.’
필로멜의 안에서 벨레론 신에 대한 신앙심이 약간 자라났다.
신이 나직하게 물었다.
“보이느냐.”
“뭐를 말씀하시는지요?”
“저 괴상하게 생긴 물체의 윗부분 말이다.”
그 말에 필로멜은 ‘줄기’를 쳐다봤다. 그리고 경악했다.
지상에 있었을 때는 몰랐는데, ‘줄기’와 접해 있는 하늘이 검었다.
별이 뜬 밤하늘 같은 느낌이 아니라 매우 불길한 검정 일색이었다.
“균열이다.”
“하늘에도 균열이 가나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세계의 균열이지. 저곳은 다른 세계로 통한다.”
“다른 세계라면…….”
“침입자가 살던 세계이자 미와가 건너간 세계이니라.”
역시.
필로멜의 예상대로 미와 신이 갔다는 세계는 가짜 엘렌시아의 세계였다.
“그럼 미와 신이 게임 시스템을 만든 건가요? 아, 게임 시스템이 뭐냐 하면요…….”
“안다. 미와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나도 종종 그쪽 세계를 구경했으니까.”
다행히 시간을 들여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필로멜은 이 신이 그간 자신이 가져온 의문들에 대한 해답을 가르쳐 줄 존재라 직감했다.
“미와 신은 왜 그런 시스템을 만들었죠? 저를 선택했다는 이야기는 또 뭐고요?”
“질문이 많구나. 뭐, 이럴까 봐 너만 데려온 것이지만.”
하기야 이런 이야기를 저들 앞에서 꺼냈다면 두 신관은 물음표의 바다에 빠졌을 테다.
“우선 시스템이 생겨난 이유부터 말해주자면 미와가 게임 회사란 곳에서 일했기 때문이다.”
예상 밖의 대답에 필로멜은 잠시 멍해졌다.
“신도 회사에서 일하나요……?”
“하하, 미와가 그곳에서도 전지전능한 창조주일 거라 생각하느냐.”
“아닌가요?”
“그곳에선 미와 또한 이방인이자 환생을 거듭하는 한낱 인간에 불과하지. 과거의 기억도 없다.”
그저 다른 세계에 대한 꿈을 자주 꾸는 평범한 인간. 그러고 보니…….
“미와 신은 악신을 봉인하는 데 힘을 많이 소진한데다 이 세계에 힘을 일부 놓고 갔다고 했죠.”
지금의 미와 신이 평범한 인간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곳에 가기 위해선 남은 힘도 버려야 했다. 한 세계란 이계의 신을 덥석 받아들일 정도로 만만치 않거든.”
하긴 이계의 신이 그곳에서 무슨 일을 벌일 줄 알고.
“그때 미와가 떼어낸 힘이 네 친부의 마력이다.”
에스텔리온이라고?
“계속 잠들어 있다가 다른 미와의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고 깨어나 새로운 주인을 찾았지.”
“다른 힘은 왜 돌아왔죠?”
그 질문에는 벨레론도 잠시 뜸을 들였다.
“그저 꿈꾸는 것에서 만족했다면 좋았으련만……. 미와는 직접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 자신이 꿈꾸는 세계의 이야기를.”
그의 얼굴에 먹구름이 낀다.
“처음에는 소설이었지. 젊은 황제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
“설마 그 이야기가……?”
“이 몸 주인의 과거다.”
이것 역시 전혀 상상도 못 한 진실이었다.
“문제는 미와의 창작이 이곳에선 현실이 된다는 것. 그자는 아직 이 세계의 창조주니까.”
벨레론은 설명을 이어갔다.
“미와는 모르고 있다. 자신의 창작물이 누군가에겐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태양신은 지평선을 바라봤다.
“시간이 지나 미와는 일자리를 가지게 되었다. 운 좋게도 자신의 이야기를 게임으로 만들 기회도 얻었지.”
“그게 바로…….”
“너도 잘 아는 게임이니라.”
모든 일의 발단이 된 그 게임. <돌아온 황녀님의 두근두근 궁정 생활>
“……이번에는 그 황제의 딸이 겪는 이야기를 썼군요.”
그리고 악녀 필로멜이 나오는 이야기였다.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
가짜 엘렌시아는 게임의 내용을 쓴 사람을 그리 지칭했다. 결국 그 게임 시나리오 라이터가 미와인 셈이다.
진실을 알게 되자 필로멜은 왠지 화가 났다.
“왜 미와 신은 절 선택했죠? 그 사람에게 저는 자기 이야기에 나오는 등장인물에 불과하잖아요.”
미와가 만든 발바드의 검은 필로멜을 주인으로 택했다.
치사하다. 필로멜을 악역으로 창조해 냈으면서 동시에 악신을 물리칠 자로 선정하다니.
‘분명 용사가 된 것은 내 자유 의지였어. 하지만…….’
미와가 그 게임의 시나리오 라이터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자가 만든 운명에 놀아난 것만 같은 느낌이다.
“작은 아이야.”
벨레론이 그녀를 어르듯 다정하게 일렀다.
“수많은 영웅담에서 괴물을 무찌르는 용사는 누구냐.”
“글쎄요. 보통…… 주인공이죠.”
“맞아. 주인공이지. 미와는 너를 주인공으로 택했다. 그러니 네가 자동으로 용사가 된 것이지.”
“주인공이 아니라 악역이겠죠. 주인공은 엘렌시아…….”
그 순간 필로멜의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진실의 눈동자로 가짜 엘렌시아의 과거를 엿봤을 때, ‘컴퓨터’라는 기계에 떠오른 문자열.
[……사실 필로멜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캐릭터입니다. 아무래도 주인공은 엘렌시아다 보니 필로멜의 이야기를 충분히 풀어내지 못한 것 같아요.] [하여 제 희망 사항일 뿐이지만 만약 ‘돌황궁’의 속편이 제작된다면 필로멜을 주인공으로 삼고 싶습니다.]그래. 분명 그랬다.
미와는 필로멜을 다음 작품의 주인공으로 삼고 싶어 했다. 비록 희망 사항에 그친 듯했지만.
“그렇다면 혹시 시스템이 제 눈에 보인 이유는…….”
주인공인 엘렌시아에게만 보였어야 할 게임 시스템이 필로멜에게도 보인 이유는.
“제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벨레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미와가 구상 중인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왠지 모르게 납득이 가는 부분이 있었다.
“시스템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것은 그 때문일까요?”
“아마도.”
정식으로 쓰인 이야기가 아니기에 필로멜의 플레이어 자격도 불완전하게 주어진 모양이다.
어쩐지 가슴 한구석에 미약한 온기가 번졌다.
‘악역이 아니라 주인공.’
더욱이 그녀가 사는 이 세상도 단순한 남의 창작물이 아니었다. 모두가 살아 숨 쉬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때, 태양신은 “덧붙여서 말하는데” 하고 입을 뗐다.
“미와는 지금 엄청난 실의에 빠져서 어떠한 창작도 못 하고 있다. 침입자가 쓴 소설이 공식으로 인정받아 충격받은 듯해.”
“그럴 만도 하네요.”
본인이 창작한 이야기를 남에게 가로채인 셈이니.
“그리고 그런 미와를 이에리스가 이곳으로 데려오려 하지.”
“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저 균열은 미와를 끌어들이기 위한 통로이니라.”
“이유가 뭐죠?”
“그래야 자신이 완전히 부활할 수 있으니까.”
바로 오늘 대신관이 필로멜에게 들려준 말이 떠올랐다.
미와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이상 이에리스는 부활하고 만다. 바꿔 말하자면 미와가 이곳에 있어야 악신은 부활할 수 있다.
필로멜은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균열을 응시했다.
“저곳으로 미와 신이…….”
“그리고 미와가 기억과 힘을 되찾기 전에 이 세상을 멸망시킬 셈이겠지.”
세상이 멸망한다고?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지만 비현실적이면서도 불길한 풍경을 보니 새삼 실감된다.
필로멜의 양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둘 순 없다. 이곳은 그들이 살아가는 소중한 세계다. 또한…….
‘이제 막 나사르의 호감도를 100% 채운 참인데!’
아직 나사르와 이렇고 저런 일도 못 해봤다.
그 외에도 필로멜에겐 하고 싶은 일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
마탑 가족들과 좀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다. 나사르와 뀨뀨를 타고 대신전에 왔을 때처럼 여행도 해보고 싶고, 진짜 엘렌시아도 만나고 싶다.
‘황제와도 아직 못다 한 이야기가 있고.’
필로멜은 유스티스의 몸을 빌린 신을 바라봤다.
“어떻게 하면 악신을 저지할 수 있나요?”
“간단해. 대신관이 받은 예언대로 발바드의 검으로 이에리스의 심장을 찌르면 된다.”
고작 그것으로?
필로멜의 마음을 읽었는지 태양신이 먼저 말했다.
“내가 직접적으로 악신과 부딪칠 수 없는 이유는 수명 문제도 있지만, 주는 저 균열 때문이다.”
“균열이 어째서요?”
“신과 신이 격돌한다면 엄청난 힘의 충돌로 인해 균열은 더욱 확장된다. 자칫하다간 이에리스를 돕는 꼴이 되지.”
하지만, 하고 그는 말했다.
“신의 힘을 빌린 인간은 달라. 그래서 미와는 잠들기 전에 검 한 자루를 인간들에게 남겼다. 혹시라도 이후에 악신이 부활하려 들면 저지할 수 있도록.”
미와는 이에리스가 균열을 통해 자신을 불러오려고 할 것까지 예상한 것이다.
필로멜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할 수 있다. 미와의 힘인 게임 시스템이 너의 편이야.”
벨레론이 턱짓으로 ‘줄기’ 쪽을 가리켰다.
“저곳은 이에리스의 영역이어서 평범한 마법이나 신성력, 오러 등은 듣지 않는단다.”
“그렇지만 시스템의 힘은 작동하는군요.”
별빛 상점의 상품은 평소처럼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미와의 힘은 이에리스의 것과 성질이 유사하기 때문이지.”
벨레론은 필로멜을 잠자코 보다가 목소리를 한 톤 낮춰 말했다.
“만약 하기 싫다면 지금 말하거라. 강요할 생각은 없다.”
“다른 대안이 있나요?”
“이 몸의 남은 수명을 모조리 끌어다 부딪치는 수밖에. 이 세상을 멸망하게 둘 순 없으니.”
“그건 최후의 수단이에요.”
그리고…….
필로멜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아직 그 몸의 주인과 전 풀어야 할 앙금이 남았습니다! 저희를 구해주신 것은 감사하오나 수명 좀 아껴 쓰세요!”
신벌도 각오하고 신에게 올린 직언이었으나, 벨레론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재미있구나, 재밌어.”
뭐가 그리 웃긴지 그녀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사람과 한 신은 그 후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결심을 굳혔군.”
“네.”
“내가 최대한 보조하겠지만 쉬운 일은 아닐 테다.”
“각오한 바예요.”
“이것을 가져가거라. 오염으로부터 너를 지켜줄 거다.”
그가 품에서 주섬주섬 어떤 물건을 꺼냈다. 홍염의 반지다.
“이게 왜……!”
황궁을 두 번째로 떠나던 날, 필로멜은 황제에게 홍염의 반지를 되돌려주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주머니를 뒤져보니 있던데.”
화아아아아아!
반지의 보석이 신의 손안에서 빛을 뿜었다. 여태껏 본 적 없는 강렬한 빛이었다.
“원래 있던 신성력에 더해 내 힘도 가득 넣어두었다. 이것이 있다면 놈의 영역 안에서도 네 주변은 쾌적하겠지.”
태양신은 직접 필로멜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고작 반지 하나 끼었을 뿐인데 들이켜는 공기가 맑고 따뜻했다.
필로멜은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줄기’를 노려봤다.
이제 주인공이 활약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