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165)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165화(165/183)
<165화>
* * *
얼마 후, 필로멜과 벨레론은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렇게 해서 저 안에 갔다 오게 되었어요.”
나사르는 어두운 얼굴로 필로멜의 설명을 들었다.
“괜찮아요! 금방 해치우고 이곳으로 돌아올게요!”
필로멜이 위로하듯 덧붙였지만 그의 얼굴은 펴질 줄을 몰랐다.
나사르는 이미 벨레론에게 자신도 ‘줄기’에 들어갈 수 있게 신성력을 나눠달라 청했다. 그러나 신은 고개를 저었다.
“힘을 담을 매개물도 마땅치 않거니와 너에게 줄 여유분의 힘도 없구나.”
벨레론이 맡은 일은 많았다. 그는 대지를 계속 정화하며 악신이 필로멜에게 신경 쓰지 못하게끔 주의도 돌려야 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일정 수준 이상의 수명을 항상 비축해 두고 있어야 하고.”
만약의 경우란 필로멜이 실패했을 시에 이야기다. 그땐 치명적인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벨레론이 악신과 부딪칠 것이다.
나사르는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못하고 이곳에 남기로 했다.
“부디 무사하시기를.”
그가 경건하게 필로멜의 손등을 끌어다 입을 맞췄다.
‘결혼하자! 아니, 먼저 약혼부터 다시 하자!’
처연한 그의 모습을 보며 필로멜은 하고 싶은 말을 꾹 참았다. 그런 말은 돌아와서 멋지게 하고 싶다.
대신 필로멜은 나사르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가볍게 입술을 맞댔다.
갑작스러운 신체 접촉에 그는 얼굴을 붉힌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없는 틈에 한눈팔지 말고 기다려요.”
호감도도 떨어트리지 말고.
“……예!”
그때, 벨레론이 팔로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자, 거기까지. 시간이 없으니 이만 가야 한다.”
필로멜이 마뜩잖게 쳐다보자 태양신은 변명했다.
“이건 몸 주인 의지가 다분히 섞인 행동이다. 나도 원주인의 의사에 반할 순 없다고.”
“아, 예. 뭐 그렇다고 칩시다.”
“얼른 준비나 하여라.”
“잠깐만요.”
필로멜은 상급 지혜의 비약과 힘의 비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무지의 베일도 배낭에서 꺼냈다. 그리고 벨레론이 보지 않는 틈에 나사르의 손에 슬쩍 선물도 쥐여줬다.
“다 됐습니다.”
“좋다. 무운을 빈다.”
신관들도 한 마디씩 얹었다.
“바깥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몬스터가 또 기어 나온다면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나사르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얼굴로 말했다.
“못 하시겠다 싶으면 언제든 돌아오십시오. 저에겐 이 세계보다 필로멜 님이 더 중요합니다.”
굉장히 무거운 사랑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부담스럽기는커녕 기껍게 느껴지는 것을 보면 필로멜도 중증이었다.
“금방 돌아올게요!”
그리하여 필로멜은 ‘줄기’의 안으로 돌입하게 되었다.
* * *
“아, 아프네. 잘 좀 던져주지.”
필로멜은 작게 혼잣말하며 엉덩이를 쓸었다.
그녀는 벨레론이 ‘줄기’를 공격하는 척하면서 뚫은 여러 개의 구멍 중 한 곳을 통해 내부에 진입했다. 시간을 들이지 않고 바로 중심부에 잠입한 것은 좋았으나 착지 감이 영 별로다.
“얼른 끝내고 돌아가자.”
필로멜은 빠르게 주위를 살폈다.
이에리스의 심장을 찾아야 한다.
벨레론에 따르면 심장이란 진짜 심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자가 만든 영역의 핵심 부위다. 없어지면 영역 자체가 붕괴하는.
원래는 악신의 본거지에 있었는데 지금은 ‘줄기’로 옮겨왔다나.
“가까이에 있는 것은 확실해…….”
벨레론이 그녀를 심장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에다 넣어줬으니.
“그럼 어디에 있을까.”
필로멜은 무지의 베일을 몸에 두른 채 발걸음을 뗐다. 당장은 길이 하나밖에 없는 탓에 쭉 걷는 수밖에 없었다.
꿈틀꿈틀.
“으엑.”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박동하는 ‘줄기’의 검붉은 내부가 징그러웠다.
필로멜은 애써 보이는 것들을 무시한 채 쭉 나아갔다. 그러다 탁 트인 장소와 맞닥트렸다.
휑한 공터의 중앙에 웬 제단처럼 생긴 물체만 덩그러니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어떤 사람이 누워 있었는데…….
‘저 인간은!’
눈에 익은 노란 머리.
가짜 엘렌시아였다.
엘렌시아는 몸을 일으키더니 돌연 버럭 소리쳤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데! 지루하다고!”
당연하게도 필로멜에게 한 소리는 아니었다. 침입자의 곁에는 신관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있었다.
“이방인이시여. 조금만 참으시지요. 곧 이에리스 님의 계획이 완성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게 언제냐고! 벌써 몇 시간은 이러고 있잖아!”
“그것까지는 저도 잘…….”
“하아. 나 배고파졌어. 먹을 것 좀 가져와.”
“아까 빵을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런 맛없는 것을 나더러 먹으라고?”`
“시기도 시기인데 그냥 드시는 편이…….”
“이봐, 처신 잘해. 나를 잘 모시라는 이에리스 님의 전언을 잊어버렸어?”
그 말에 신관은 입술을 짓씹으며 침묵했다.
필로멜은 그 신관의 정체를 대강 파악했다. 저자가 바로 신전 내부의 배신자다.
이에리스가 구세의 탑을 폭파하는 데엔 신전 측의 협력자가 필수적이었다.
신관은 하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먹을 만한 것을 가져온 교도가 있는지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그래. 후딱 다녀와.”
거만하게 손을 팔랑이는 엘렌시아를 뒤로한 채, 신관은 필로멜이 있는 방향으로 다가왔다.
그는 필로멜이 왔던 쪽으로 나가며 작게 중얼거렸다.
“저, 망할 것이……!”
침입자는 이곳에서도 심보를 곱게 못 쓰는 듯했다.
신관이 사라진 뒤, 엘렌시아는 픽 한숨을 내쉬었다.
“하, 어째 맘에 드는 인간이 한 놈도 없네. 황제, 그놈이 짜증 나게 굴긴 했지만 그래도 해달라고 한 것은 거의 다 해줬는데.”
그때, 지진이라도 난 듯 ‘줄기’가 쿵쿵 울렸다.
“우왓!”
그 탓에 침입자는 제단 밑으로 굴러떨어질 뻔했다.
“또 이 지랄이야! 대체 뭔데!”
벨레론이 ‘줄기’를 공격하는 것이다. 악신이 필로멜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정말! 이따위 세상 확 멸망해 버리라지!”
엘렌시아가 천장에 대고 소리칠 때였다. 그녀의 등 뒤로 서늘한 감촉이 닿았다.
“다치고 싶지 않으면 꼼짝 마.”
“피, 필로멜?”
필로멜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엘렌시아가 뒤를 돌아보려 했다.
필로멜은 자신의 무기를 바짝 엘렌시아 가까이에 댔다.
“가만히 내 말이나 들어.”
가짜 엘렌시아의 솜털이 쭈뼛 곤두섰다.
“어, 어떻게 갑자기 뒤에서?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그건 네가 알 바 없고.”
“겁대가리를 상실했니?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겁대가리를 상실한 쪽은 세계 멸망에 협력하는 너겠지.”
필로멜이 무기로 엘렌시아의 등을 툭툭 건드렸다.
“……나한테 뭘 원해?”
“악신이 너한테 접근하지 말라고 한 장소, 그곳으로 안내해.”
사실 악신이 이 여자에게 그런 말을 했으리라는 것은 필로멜의 추측이었다.
모종의 이유로 악신한테 엘렌시아는 현재 중요한 존재다.
‘그리고 아까의 대화로 판단하건대 꽤 오랜 시간 이 장소에 머무른 듯했어.’
심장이 근처에 있는 중심부에.
악신이라면 필시 누군가 심장을 공격하는 것에 대비하여 충분한 방범용 장치를 해두었을 터.
혹시라도 엘렌시아가 그 장치에 휘말리지 않을까 우려하여 미리 일러둘 만도 했다.
“그, 그걸 어떻게 네가……!”
그리고 그 추측은 정답이었다.
엘렌시아는 간단한 유도 심문에 걸려들었다.
“됐고. 안내나 해.”
“내가 미쳤어? 위험한 장소에 널 안내하게?”
“지금 네 뒤에 있는 이 물건은 안 위험해 보여?”
“히익!”
필로멜이 몇 번 더 건드리자 엘렌시아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찌르지 마!”
아마도 필로멜이 든 무기를 칼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아, 알았어! 가면 되잖아!”
결국 제 몸의 고통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침입자가 항복했다.
“그래. 잘 생각했어.”
“그래도 근처까지만 안내해 주고 난 안 들어갈 거야!”
“잔말 말고 앞장서.”
노란 뒤통수를 보며 필로멜은 생각했다.
‘차라리 심장보다 엘렌시아를 먼저 발견한 것이 다행이야.’
어차피 그녀는 이 인간도 찾아야 했다. 침입자야말로 균열을 닫을 열쇠니까.
벨레론은 말했다.
“이에리스는 균열을 더 벌어지게 만들기 위해 이방인의 영혼을 이 세계로 끌어들였지.”
본래 균열이란 웬만한 크기인 경우, 세계의 회복력에 의해 알아서 수복된다. 아직 봉인된 상태인 악신의 힘으로는 회복력을 웃도는 큰 균열을 만들기엔 무리가 있다.
다만 이 세계에 본디 ‘이곳에 있어선 안 되는 존재’가 있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모순점 때문에 세계의 회복력은 작용하지 못한다.”
그래서 악신은 모든 힘을 끌어다 침입자의 영혼을 불러왔다. 영혼엔 물리적인 실체가 없는 데다 침입자 스스로가 강렬히 소망했기에 가능했다고 한다.
마침 적당한 영혼이 없나 탐색하던 악신의 눈에 띈 것이다.
‘나도 엘렌시아처럼…….’
죽기 직전 이자의 간절한 마음속 바람이.
결국 가짜 엘렌시아는 처음부터 끝까지 악신의 장기짝에 불과했다.
필로멜은 차가운 눈으로 여자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것도 모른 채 본인의 소설이 뛰어난 덕에 이곳에 왔다고 오해하며 날뛰던 꼴이란.’
꼴불견.
그러나 필로멜은 이자에게 친절히 진실을 알려줄 의향 따윈 없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부족하다.
“빨리 걸어.”
필로멜의 차가운 음성에 느릿느릿 제단을 벗어나던 엘렌시아가 움찔거렸다.
“……나 원래 걸음걸이가 느리거든.”
그때였다.
“이방인이시여! 음식을 얻어왔습니다!”
조그만 바구니를 든 신관이 공터에 나타났다.
필로멜의 주의가 한순간이지만 신관에게 쏠린 틈, 엘렌시아가 그녀를 옭아맸다.
“적이야! 필로멜이 왔어!”
“예? 적이라니요?”
“아이템의 효과로 눈에 보이진 않지만 여기 있다고! 내가 붙들고 있는 틈에 얼른 해치워!”
분위기를 파악한 신관이 재빨리 허리춤에서 단도를 빼 들었다.
필로멜은 미약한 피로감을 느꼈다.
‘가능하면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는데…….’
뭐, 됐다. 이것도 이것대로 나쁘지 않으니.
“아악!”
그녀는 왼손으로 가볍게 엘렌시아를 밀쳐낸 후에 오른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위로 향해 들어 올렸다.
탕!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 여파로 무지의 베일이 벗겨져 필로멜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는 총구를 멍하니 서 있는 신관에게 겨누고 있었다.
“칼 버려.”
그녀가 가지고 있던 무기는 리볼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