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174)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174화(174/183)
<외전 3화>
필로멜은 필사적으로 기억을 더듬었다.
‘생각해! 정확히 무슨 무슨 옷이 있었는지!’
그러나 머리는 안갯속처럼 흐릿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대충 넘기지 말걸, 후회가 막심했다.
“필로멜 님.”
그때 나사르가 그녀의 손을 잡아왔다.
“손끝이 찹니다. 비록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온기를 나눠드리는 것밖에 없습니다만.”
“나사르…….”
“이것 하나만 알아주십시오. 자신을 자책해 봤자 상황이 더 나아지진 않습니다.”
“하지만 너무 큰 사고를 쳤는걸요.”
“이 정도 일은 이에리스의 계략으로 세상이 멸망할 뻔했던 사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 두 손으로 필로멜의 손을 소중한 보물처럼 품은 나사르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때 세상을 구한 분이 바로 필로멜 님이시죠. 그대는 이번 일도 능히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손끝으로 전해진 온기가 필로멜의 마음을 덥혔다. 필로멜이 좌절할 때면 그는 늘 이런 식으로 힘이 되어주었다.
나사르와 함께하는 시간은 필로멜에게 귀하디귀한 보물이나 다름없었다.
그래, 지금 이 순간도…… 나사르가 벗고 있지만 않았다면 완벽했을 텐데.
‘민망해!’
진심으로 위로해 주려는 그에겐 정말 미안하지만, 사실 필로멜은 아까부터 나사르의 이야기에 전혀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적당히 잘 그을린 속살과 예상보다 훨씬 실한 흉부는 필로멜의 정신을 흩트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연이어 닥친 예상 밖 사태에 정신이 없었으나, 조금 진정되고 나자 그의 모습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하하, 고마워요. 나사르.”
어색하게 답한 필로멜은 그의 얼굴을 보기가 죄스러워서 저도 모르게 시선을 내렸다.
하지만 그곳에는 얼굴보다 더 똑바로 마주하기 힘든 부위가 떡하니 있었다.
“저, 저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 아! 그렇군요! 그럼 다행입니다!”
필로멜이 티 나게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속내를 대강 파악한 나사르는 얼굴을 붉혔다.
“그, 그래! 제레미아에겐 아직 차를 내주지 않았네요! 조금만 기다려요!”
필로멜은 핑계를 대며 자리를 피했고, 나사르는 굳은 자세로 정좌했다.
“진짜 놀고 있다, 뿅.”
그 모습을 지켜보던 제레미아가 툭 뱉었다.
“나는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어 놓고 너희는 연애하면 다냐, 뿅?”
“제레미아도 참! 제가 언제 연애했어요?”
“시끄럽다, 뿅! 아무래도 좋으니 얼른 해결책이나 찾아라, 뿅!”
그 서슬 퍼런 기색에 필로멜은 마도구로 물을 끓이다 말고 한 가지 제안을 해보았다.
“르귄한테 가보는 건 어때요?”
“뭐, 뿅?”
“시스템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이대로 넋 놓고 가만히 있을 수만은-.”
“헛소리, 뿅!”
제레미아는 사람 하나 씹어 먹을 듯한 표정을 지으며 테이블을 쾅 내려쳤다.
“그 인간한테 이 꼴을 알릴 바에는 난 혀 깨물고 죽을 거다, 뿅!”
“아니,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생각해요?”
“상상해 봐, 뿅! 그 영감탱이가 내 모습을 보면 어떻게 나올지, 뿅!”
“상황이 상황인 만큼 르귄도 제레미아를 걱정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네가 말하고도 말이 안 되지, 뿅?”
사실이었다. 셋째 아들을 보자마자 폭소하는 마탑주의 모습만 상상됐다.
“나더러 평생 이 꼴로 살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인간이다, 뿅!”
“으으, 부정하기 어렵네요. 그렇다면 렉시온한테만 살짝 알려준 다음에 도움을 받으면-”
“내가 미쳤냐, 뿅? 그 자식이 순수히 협력할 것 같나, 뿅!”
확실히 렉시온이라면 은근히 제레미아를 비웃은 다음에 대가를 요구할 것 같긴 하다.
물론 대가를 받는다고 해서 도움다운 도움을 준다고 확신하기도 힘들었다.
“그럼 카딘은-.”
“그 멍청한 놈이 도움이 되겠냐, 뿅!”
“확실히…… 카딘에겐 좀 어렵겠죠.”
“필로멜, 잘 들어…… 뿅.”
제레미아가 음산하게 읊조렸다.
“내가 아까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고 여기까지 오느라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나, 뿅?”
듣고 보니 같은 마탑 안에 있는 것치곤 그가 필로멜을 찾아오기까지 오래 걸리긴 했다.
“난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기필코 이 꼴을 너희를 제외한 다른 놈들에게 보이지 않을 테다, 뿅! 특히 그 세 인간한테는, 뿅!”
“하지만 르귄에게만은 알리는 편이 여러모로-”
“죽어도 싫다, 뿅! 차라리 나를 죽여, 뿅!”
제레미아의 태도는 거대한 바위처럼 굳건했다. 십 분 넘는 실랑이 끝에 필로멜은 그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했다.
‘하기야 고작 별명만으로도 그토록 몸서리치는 사람이 이런 모습을 들키고도 멀쩡할 리 없나…….’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세 명이 둘러앉아 머리를 맞대 보았으나 뚜렷한 해결책은 나오지 않았다. 시스템 역시 돌아오지 않았다.
필로멜이 알기로 시스템이 이렇게 오랫동안 먹통이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그러던 중, 그녀가 처음 옷장 메뉴를 조작했던 때로부터 네 시간가량이 지났을 무렵.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겠군, 뿅.”
아까 전부터 묵언 수행하던 제레미아가 조용하게 일렀다.
“네? 그게 무슨-.”
그가 여동생과 그녀의 연인을 바라봤다.
“너희도 입 밖에 내지 못했을 뿐이지 계속 생각하던 것 아니냐, 뿅? 시스템은 아예 사라져 버린 것이라는 추측 말이다, 뿅.”
“…….”
“…….”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으므로 필로멜과 나사르는 그저 고개만 수그렸다.
시스템의 힘은 선발식 습격 사건 때부터 조금씩 약해지고 있었다.
오늘내일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잠깐만요. 그건 좀 이상해요.”
퍼뜩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필로멜이 반론을 제기했다.
“봐봐요.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의 옷도 시스템의 일부인데 멀쩡히 존재하잖아요. 시스템이 사라졌다면 다 정상으로 돌아왔겠죠.”
우선 제레미아는 순순히 동생의 의견에도 일리가 있다고 인정했다.
“하지만 우리의 상태가 그냥 이렇게 고정된 것이라면, 뿅? 시스템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고정된 상태가 쭉 이어져 나간다면, 뿅?”
“……그럴 수도 있는 건가요?”
“가능성을 배제하긴 어렵다는 이야기다, 뿅. 지금도 시스템은 사라졌는데 우리는 계속 이 꼴이잖냐, 뿅.”
전적으로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이 있는 필로멜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레미아의 가설이 사실이면 어떡하나? 저절로 고정된 상태가 풀릴 가능성은 없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강제적으로 옷이 바뀐 네 사람은 평생 그런 차림으로 살아가야 하나?
나사르의 모습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제레미아는 말할 것도 없을 테고, 나사르도 계속 저 모습으로 있긴 당연히 싫겠지.’
사람이 어떻게 일평생 반라로 산단 말인가.
아직은 필로멜을 위해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으나 필시 심중이 복잡할 것이다.
그때 나사르가 입을 열었다.
“역시 아버님께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가 말하는 아버님이란 르귄을 뜻했다.
“솔직하게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지요.”
“뭐, 뿅? 누구 멋대로-”
“셋째 형님이 싫으시다면 저와 필로멜 님만 가겠습니다.”
발끈하는 제레미아의 앞에서도 나사르는 침착하게 제 주장을 관철했다.
“어차피 아버님께 상황을 설명하는 데엔 저 하나만 있어도 되지 않습니까? 형님에 관한 것은 비밀에 부치지요.”
“…….”
“형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시스템은 아버님의 힘인 에스텔리온과 뿌리가 같습니다. 그분이라면 문제를 해결하실 수도 있습니다.”
마침내 제레미아가 뜻을 굽혔다.
“쳇, 알아서 해…… 뿅.”
기실 그도 나사르가 생각한 바를 이미 염두에 두고 있을 테다. 다만 부친에게 제 모습을 보이기 싫단 마음이 더 강했겠지.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필로멜 님. 가실까요?”
“아, 네!”
필로멜이 나사르를 따라 르귄의 방으로 가려던 그때였다.
“필! 안에 있어?”
쿵쿵쿵, 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찾아가려던 인물의 음성이 들려왔다. 때마침 르귄이 찾아온 것이다.
펄쩍 뛰어오른 제레미아가 속삭였다.
“나는 없는 척해라, 뿅. 애초에 방에 들이지 마, 뿅……!”
“물론이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옷방에 들어가 계실래요?”
필로멜은 제레미아를 옷방으로 안내하며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르귄,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곧 나갈게요!”
잠시 후, 문을 연 필로멜은 바깥에 있는 사람이 한 명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필, 안녕!”
“좋은 오후입니다, 필.”
“카딘, 렉시온…….”
두 형제가 필로멜을 보며 인사했다.
“두 분은 어쩐 일로?”
그 물음에 마탑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 자식들이 멋대로 나를 따라왔어.”
“따라온 거 아니거든! 나는 나대로 오늘은 필이랑 놀아야지 생각했다고!”
“생각해 보니 마지막으로 다 같이 모인 지 꽤 된 것 같더라고요. 요 앞에서 두 사람과 마주친 김에 같이 왔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설마 이렇게 떼거리로 왔을 줄이야.
그러나 생각해 보면 카딘은 그렇다 쳐도 르귄의 귀에 들어간 정보는 높은 확률로 그의 비서인 렉시온도 알게 된다.
‘기왕 밝히기로 한 거, 이참에 말하자.’
그러한 결론에 도달한 필로멜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실은 여러분께 알려드릴 것이 있어요. 아주 중요한 문제예요.”
르귄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뭔데?”
“자세한 이야기는 르귄의 방에 가서 말하고 싶어요. 나사르도 함께요. 자, 나사르.”
필로멜의 부름에 나사르가 필로멜의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버님, 안녕하십니까. 사실 저는 현재 심각한 문제에-”
그러나 그의 말은 뒤이어 나온 고함에 삼켜졌다.
“너! 너!”
경악한 르귄이 그에게 손가락질하며 소리쳤기 때문이다.
“왜 벗고 있어! 이 변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