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175)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175화(175/183)
<외전 4화>
“예?”
나사르가 화들짝 놀라 해명하려고 했다.
“아닙니다! 여기엔 피치 못할 사정이-”
하지만 르귄은 눈 깜짝할 사이 손가락을 튕기더니 나사르의 몸을 공중으로 뛰었다.
“사정은 무슨. 말해봐, 이 자식아. 무슨 사정이 있어야 남의 딸 방에서 옷을 벗고 있는데?”
필로멜은 씩씩거리며 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부친의 몸에 매달렸다.
“진정해요! 나사르가 원해서 벗은 게 아니에요!”
“필! 넌 아직 성인도 아니잖아! 너희가 아무리 사귄다지만 이건 너한테 너무 일러!”
“아니, 무슨 상상을 하는 거예요! 카딘이랑 렉시온도 좀 말려 봐요!”
하지만 그들은 태평한 태도로 르귄을 뒤따라 동생의 방으로 들어왔다.
“르귄도 참. 왜 벗긴. 더워서 벗었겠지!”
“카딘, 눈치가 없군요. 나 원 참. 이런 때는 모르는 체해 줘야 하는데…….”
“렉시온도 오해하고 있거든요! 아, 몰라! 르귄, 제가 다 설명할게요!”
“됐어! 내 눈으로 봤는데 뭘!”
딸의 말을 일축한 그가 흉흉한 눈빛으로 나사르를 올려다봤다.
“이 자식, 그래도 대신전에서 필에게 힘이 되어준 것은 사실이어서 내가 큰맘 먹고 교제까지 허락해 줬더니 음흉한 속내를 드러내? 그때로부터 얼마나 지났다고?”
“정말 아니라니까!”
정말 복장이 터질 노릇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그래서 이게 다 시스템 때문이다?”
딸의 방에 자리한 소파를 차지하고 앉은 마탑주가 다리를 꼬았다.
“그렇다니까요.”
필로멜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턱을 괴었다.
“사실 아까부터 마법으로 쟤한테 뭐라도 입히려고 계속 시도해 봤는데 전혀 안 먹히네. 미묘하게 에스텔리온, 그러니까 시스템의 힘도 느껴지고.”
“제 말이 그거예요! 나사르 역시 입고 싶어도 옷을 입을 수가 없대요!”
“흐음, 알았어. 그런 문제라면 내가 한번 살펴볼게. 해결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네, 부탁드려요!”
“그럼 얘는 내가 데려간다. 면밀하게 검토해 봐야겠어.”
“……저기, 잠깐만요. 사과는 안 하세요?”
“뭔 사과?”
“아니, 나사르를 그, 변태로 매도하셨잖아요. 오해가 풀렸으니 사과하셔야죠.”
매도하기만 했다면 다행인가 사실 필로멜이 말리지 않았다면 사람 하나 잡을 뻔했다.
“싫거든!”
그러나 르귄은 콧방귀만 뀌었다.
“절대 싫어! 솔직히 말하자면 어떤 이유로든 내 딸한테 저런 추잡한 모습을 보인 건 용서하기 힘들다고! 그렇지만 너를 봐서 이번 한 번만 특별히 봐주는 거야.”
“추잡…….”
조금 전에 겨우겨우 르귄의 구속에서 풀려난 나사르가 다소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추잡이라니 멋지기만 한데요.”
다행히 곧 필로멜의 말에 얼굴에 화색이 돈 그가 나지막이 그녀를 불렀다.
“저는 괜찮습니다. 제가 아버님이라도 오해했을 상황이었는걸요.”
“그래도 나사르가 이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어요.”
“정말 괜찮습니다. 지금은 그것보다…….”
필로멜도 그가 전하려는 말뜻을 모르지 않았다.
“맞아요. 더 우선해야 할 일이 있죠.”
스페셜 코스튬도 문제였지만 우선 이 사람들을 데리고 이곳을 떠나야 한다.
만에 하나라도 지금 저 옷방 안에 있을 제레미아의 모습이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그 인간은 분명 저지른다!’
불길한 상상에 살짝 어깨를 떤 필로멜이 세 부자를 보며 말했다.
“좋아요. 아무튼 자세한 논의는 르귄의 방에 가서 마저 해요.”
다들 그녀의 유도에 따라 방을 나섰다. 아니, 나서려고 했다.
“잠깐, 방금 뭔가 들리지 않았어?”
카딘이 제 귀에 손을 갖다 대며 소곤거리기 전까지만 해도.
“……들리다니요. 뭐가요?”
“필, 혹시 방 안에 동물이라도 뒀어?”
“그, 그럴 리가요? 무슨 말씀이세요?”
“저쪽에서 재채기 소리 같은 게 들렸어.”
그의 손가락이 옷방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기에 필로멜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잘못 들은 거 아니에요?”
“아닐걸? 내 귀가 얼마나 좋은데!”
렉시온이 드물게 동생의 의견에 동조했다.
“카딘이 머리 쓰는 것은 약해도 짐승 수준으로 발달된 오감을 지니고 있죠.”
“그건, 그래.”
“그럼그럼!”
부친까지 인정하자 카딘이 자랑스럽다는 듯 가슴을 쭉 폈다.
‘별로 칭찬은 아닌 것 같은데…….’
필로멜이 그리 생각하거나 말거나 그녀의 둘째 오라비는 옷방 쪽으로 다가갔다.
“동물이 들어왔다면 얼른 잡아야지. 어쩌면 몰래 침입한 악신의 잔당일 수도 있고.”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왜 그래, 필?”
“그, 사실은…….”
내키진 않지만 제레미아의 존엄성을 보호해 주기 위해선 거짓을 고해야 하는 순간이었다.
“안에서 제 고양이가 쉬고 있어요. 그러니 방해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고양이?”
“네, 실은 나중에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떠돌이 고양이 한 마리를 방에 들였거든요. 제가 기를지 다른 주인을 찾아볼진 모르겠지만, 일단은 이곳에 두려고요.”
“뭐야, 그런 거였어? 난 또 뭐라고.”
다행히도 카딘은 시원스레 물러났다.
“좋아! 배도 고파졌겠다, 다들 이만 가자!”
“기다려 봐.”
그러나 불행히도 예상외의 복병이 등장했다.
“이 녀석의 말을 듣고 정신을 집중해 봤더니 뭔가 느껴지는데?”
르귄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저 옷방 안에서 희미하지만 에스텔리온의 기척이 느껴져.”
아뿔싸. 생각해 보면 시스템의 힘으로 옷이 갈아입혀진 나사르에게 에스텔리온이 느껴진다면 제레미아에게서도 느껴지는 것이 당연했다.
“예? 설마요. 착각 아닐까요?”
“아니야. 확실히 느껴져.”
필로멜의 노력에도 그의 주장은 변함없었다.
“그리고 필.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있는데 어떻게 다른 고양이를…….”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어쨌거나 비켜봐. 에스텔리온을 풍기는 수상한 고양이를 내버려 둘 순 없잖아. 아니, 애초에 정말 고양이가 맞아?”
그가 성큼성큼 옷방으로 접근하기에 필로멜은 문을 등지고 그를 막아섰다.
“알았어요. 이것만 말할게요. 실은 고양이가 아니에요. 하지만 이 안을 보여드릴 수 없는 이유가 있어요.”
이 방에서 시간을 죽이는 내내 비장한 얼굴로 자신의 검을 쥐고 있던 제레미아가 눈에 선하다. 최악의 경우엔 가족 간에 칼부림이 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절대 이에리스의 잔당 같은 위험한 존재는 아니에요. 제가 보장할게요. 그러니까 그냥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부탁이에요.”
딸의 절실한 간청 앞에선 하얀 악마라 불리는 남자 역시 머뭇거렸다.
“하아, 그래. 알았어.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라고 말하고 싶지만, 렉시온!”
르귄이 필로멜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긴 틈에 렉시온이 빠르게 옷방의 문을 열었다.
“르귄!”
“네 부탁 들어주고 싶어도 마탑의 책임자는 나야. 전체의 안전을 위해선 정체 모를 존재를 내가 확인하지 않을 순 없다고.”
마탑주로서 책임감을 발휘하는 것은 칭찬받아 마땅한 태도였지만, 왜 그게 하필 지금이란 말인가.
아무튼 필로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문은 열렸고, 렉시온과 카딘이 조심스럽게 그 안을 살폈다.
상황이 그쯤 이르자 필로멜과 나사르에게도 더는 그들을 말릴 명분이 없었다.
‘제레미아, 미안해요…….’
그래도 칼부림만은 제발 참아주길. 필로멜이 속으로 기도하던 그때였다.
“어, 저기! 뭔가 하얀 게 있는데?”
청력뿐 아니라 시력도 좋은지 어두운 옷장 안을 살핀 카딘이 소리쳤다.
곧이어 렉시온이 마법으로 주위를 밝혔다.
망했다. 이제 제레미아의 존재가 발각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필로멜은 눈을 질끈 감으려 했다. 그런데-
‘어?’
그녀가 어떤 이변을 눈치챈 것과 거의 동시에 옷방 안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그래, 실컷 봐라! 자, 보라고!”
발각당하는 것보단 당당히 나서는 쪽을 택한 제레미아가 옷방 안에서 뛰쳐나왔다.
“비웃을 테면 비웃어 봐!”
“…….”
“…….”
“…….”
실성한 사람처럼 검을 빼 든 그를 앞에 둔 채, 사람들은 침묵에 빠졌다.
“제레미아.”
가장 먼저 입을 연 이는 그의 부친이었다.
“너, 필의 옷방에서 뭐 하고 있었던 거야?”
“뭐 하고 있긴 당연히 영감탱이와 거기 두 놈이 오기에 피해 있었…….”
돌연 그의 말이 뚝 끊겼다. 제레미아는 그제야 제 말투의 변화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응?”
그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의 몸을 살폈다. 평범한 옷을 걸친 몸을.
그렇다. 그는 원래의 상태로 돌아온 것이다.
‘아슬아슬했어…….’
안도의 한숨을 내쉰 필로멜은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창을 바라보았다.
몇 개의 이름이 창 위로 나열되어 있고, 그중 제레미아의 이름 옆에는 평상복이라는 단어가 떡하니 적혀 있다.
조금 전, 시스템의 힘이 돌아왔던 그 순간. 필로멜이 생에 다시 없을 무서운 반응 속도로 제레미아의 옷을 바꾼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