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176)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176화(176/183)
<외전 5화>
그러한 필로멜의 노력으로 제레미아가 부친과 형제들에게 동물 잠옷을 걸친 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기쁜 일이었다.
“자, 대답해 보실까?”
그러나 산 넘어 산이라고 또 다른 난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연유로 동생의 옷방에 숨어 있었지? 게다가 들키니까 검까지 들고 난리 치네? 대체 내가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르귄의 추궁에 렉시온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당히 수상합니다.”
“에이, 수상하긴. 배가 고파서 저기 숨어 필의 간식을 훔쳐 먹고 있었던 것 아니야?”
카딘은 동생을 옹호하는 건지 비난하는 건지 구분하기 모호한 발언을 뱉었다.
“…….”
그리고 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제레미아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한마디 툭 던졌다.
“내가 뭘 했든 알아서 뭐 하게?”
“뭐?”
르귄이 한쪽 눈썹을 구부렸지만, 제레미아는 그저 고개를 홱 돌렸다.
“댁네한테 자세히 알려줄 이유는 없다. 이건 필로멜과 나 사이의 일이니까. 필로멜.”
“네?”
“내가 억지로 이 방에 침입했나?”
“아니요.”
“아니면 몰래 저 옷방에 숨어들었나?”
“아니죠.”
“내가 저곳에서 죽치고 있던 것이 너의 의사에 반하는 일이었나?”
“그것도 아니에요.”
제레미아는 여봐란듯 목을 쭉 내빼었다.
“봐봐, 아무런 문제도 없지?”
그의 잘난 얼굴에 삐딱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에도 굳이 이유를 알고 싶다면, 이렇게만 알고 있으면 된다. 거기 있는 세 사람과 얼굴 마주치고 싶지 않아서 잠시 피신해 있었다고.”
과연, 하고 필로멜은 목구멍 속으로 감탄 아닌 감탄을 삼켰다.
필로멜이라면 절대 시도하지 못할 정면 돌파였다. 게다가 상당히 싹수가 없었다.
“이 자식이, 버릇없게!”
르귄이 표정을 구기며 셋째 아들을 노려봤다.
“내가 할 말이야! 나도 네 못생긴 얼굴 마주하고 싶지 않거든!”
적어도 제레미아와 눈 색 제외하고는 똑 닮은 그가 할 말은 아니었다.
“필! 저런 놈은 내버려 두고 내 방으로 가자! 금발 머리! 너도 따라와!”
“앗, 같이 가요. 르귄.”
필로멜은 그의 손에 이끌려 방을 나가면서도 제레미아를 뒤돌아봤다.
어쩐지 그라면 르귄이 이렇게 반응할 것을 계산하고 일부러 평소보다 더 건방지게 말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필로멜은 부친이 나사르의 상태를 검사하는 장면을 지켜봐야 했다.
마음 같아선 그도 당장 원래대로 돌려주고 싶었으나 지금 바로 그리한다면 르귄이 진상을 알아챌 가능성도 존재했다.
무엇보다 그가 제레미아의 수상쩍은 행동거지를 목격한 다음이니 조심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도 허투루 마탑주 자리를 차지한 것은 아닌지 르귄의 눈치는 비상하기 그지없었다.
“필.”
몇 시간 후, 필로멜이 시스템이 돌아왔다며 나사르를 평상복으로 되돌리자 그는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딸을 불렀다.
“제레미아가 입었던 옷이 도대체 뭐길래 그렇게 숨기려고 기를 쓰는 거야?”
“……네?”
“내가 쭉 모를 것 같았어?”
마탑주는 길쭉한 손가락을 꼽으며 현재의 결론에 도달한 근거를 하나하나 열거했다.
“당시 제레미아한테 느껴졌던 에스텔리온. 기억을 더듬어 보면 평소에 그 녀석이 내 자식으로서 지닌 힘과는 느낌이 조금 달랐어.”
“…….”
“그리고 그 녀석 역시 그 뭐더라? 어쩌고 게임에 출연한다고 했지. 네가 금발 머리의 옷을 갈아입힐 수 있었다면 제레미아의 차림에도 같은 원리로 개입할 수 있었겠지.”
그의 입이 호선을 그렸다. 예의 성격 나빠 보이는 미소였다.
“무엇보다 하필이면 금발 머리의 옷에 문제가 생겼던 때 제레미아는 네 옷방 안에 숨어 있었어. 난 이게 도저히 우연의 일치라곤 생각되지 않는데.”
아무리 보아도 그는 아들을 놀릴 생각으로 가득했으므로 필로멜은 그저 딱 잡아떼는 수밖에 없었다.
“글쎄요. 무슨 말씀이신지 전 잘 모르겠네요. 제레미아는 말 그대로 르귄 님 일행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에요.”
“거짓말. 필, 나한테만 살짝 알려줘.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알려주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알려주면 내가 좋은 거 줄게? 응?”
“진짜 그런 거 없다니까요.”
필로멜을 유혹하여 정보를 알아내려고 하는 자는 부친뿐만이 아니었다.
“필, 제게만 살짝 알려주세요.”
“렉시온까지 왜 이래요?”
“저는 르귄 님과 달리 좋은 목적에서 알려고 하는 겁니다. 큰일을 겪은 동생을 위로해 주려고요.”
“미안하지만 전혀 믿기지 않아요.”
“우리 사이에 너무한 거 아닙니까?”
렉시온이 가짜로 상처받은 척하던 때, 마침 그들을 발견한 카딘이 다가왔다.
“알려주다니 뭘? 재미있는 이야기야? 뭔데, 뭔데? 나도 끼워주라!”
오직 그만이 늘 그랬듯 별생각 없어 보였다.
하지만 카딘 또한 자신의 동생이 토끼 잠옷을 입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악의는 없더라도 폭소할 것이 분명했다.
고로 필로멜은 무덤까지 그 비밀을 가지고 가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아, 그래서 나사르와 제레미아를 제외한 다른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냐고?
제레미아를 토끼 잠옷에서 해방한 직후, 필로멜은 그 두 사람도 평상복으로 되돌려주었다.
그러고는 그 몇 시간 사이 부디 둘에게 별일이 없었길 간절히 기원했다. 그러나…….
“뭐, 뭐라고 하셨죠?”
통신석을 붙든 필로멜이 말을 더듬었다.
“어라? 통신이 안 좋은가?”
곧이어 엘렌시아의 대답이 돌아왔다.
“하여튼 얼마 전에 아빠한테 아주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요!”
올 것이 왔구나. 필로멜은 마른침을 삼켰다.
“어, 어떤 일인데요……?”
“대신 몇 사람을 불러서 회의하던 중에 아빠의 옷이 갑자기 바뀐 것이 아니겠어요?”
혹시나가 역시나였다.
“정말 신기한 일 아닌가요? 알다시피 황궁 내에선 마법 사용이 불가하잖아요! 설령 가능한 사람이 있더라도 그 힘으로 아빠한테 옷을 갈아입힐 이유는 없지 않나요?”
“…….”
“믿어줘요, 필로멜. 저도 후계자 교육의 일환으로 그 자리에 있었는데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믿어요. 믿고말고요.”
왜냐하면 그 원인이 바로 여기 있으니까.
“대체 어찌 된 영문일까요? 아빠의 말에 따르면 그 옷 벗을 수도 없었다는데.”
“……저, 엘렌시아.”
“네?”
“이건 단순한 궁금증인데요. 그때 황제 폐하가 입으신 옷이 뭐였는지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사실 필로멜은 그것이 너무 궁금하여 지난 며칠간 밤잠도 설치었다.
뼈저린 실수를 범했던 그 날, 몇 시간 만에 다시 나타난 창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유스티스: 밤의 황제
무슨 옷 이름도 아니고 딸랑 그렇게만 적혀 있었으니 도무지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래도 필로멜은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밤의’라는 수식어는 신경 쓰이지만, 그나마 뒤에 오는 단어가 무려 ‘황제’이니 황제에게 어울리는 복장이 아닐까 하고.
“아, 그거 샤워 가운이었어요.”
그러나 이어지는 엘렌시아의 목격담은 그와 같은 얄팍한 기대를 산산이 부수었다.
“그렇게 가볍고 시원해 보이는 옷을 입으신 아빠는 처음이었죠.”
평상시의 유스티스라면 죽어도 입지 않을 옷이란 뜻이었다.
“그렇군요. 매우 진노하셨겠어요…….”
“음, 제대로 말씀을 못 하셔서 그렇지 당황하고 화난 것처럼 보이시긴 했어요.”
“말씀을 못 하시다니요?”
“실은 입에 장미꽃을 물고 계셨거든요. 그것도 마음대로 못 빼시는 것 같더라고요.”
“…….”
필로멜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그저 이 말만을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불행 중 다행인지 엘렌시아가 말해주길, 유스티스가 대신들을 철저히 입단속한 덕에 그날의 일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야 뭐, 그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래도 혹시 몰라 엘렌시아에게도 연락해 보길 잘했어…….”
통신이 끝난 후, 필로멜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전에 그녀가 황제의 비서관인 폴란 백작한테 연락했을 때, 그는 이 사실을 함구했다.
“이해는 가. 주군의 명예를 위해서겠지.”
하지만 필로멜으로선 제 실수로 인해 남들이 입은 피해를 모르는 것보단 아는 것이 속 편했다. 미안함과는 별개로 말이다.
“역시 킬리언의 소식도 알아봐야겠어.”
필로멜은 마음먹은 즉시 여기저기 연락하여 킬리언 에스칼의 소재를 물었다. 대답은 의외의 존재에게서 나왔다.
“아, 그 용사 후보생?”
첫 연락 이후 종종 필로멜에게 연락해서 시시껄렁한 잡담을 늘어놓던 세계수가 알은체했다.
“아세요?”
“알다마다. 걔 요즘 내 근처에서 얼쩡거리잖아. 진정한 용사로 거듭난다나 뭐라나.”
하긴 역사 속 수많은 위인이 세계수 밑에서 수행하다가 깨달음을 얻긴 하였다.
“그, 그 사람은 요즘 어떻든가요?”
“어떻다니?”
“신변에 변고는 없는지 궁금해서요.”
“변고라고 할까. 엄청난 일이 하나 있긴 했지.”
“엄청난 일이요?”
“며칠 전에 걔가 글쎄……!”
필로멜은 그 당시 킬리언의 이름 옆에 적혀 있던 글자를 떠올렸다.
-킬리언: 줄리엣의 드레스
뒤이어 세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장을 했지 뭐야!”
정신이 아득해지는 바람에 필로멜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여, 여장이요?”
“그래! 새롭게 거듭난다더니 그런 쪽으로 거듭날 줄은 몰랐지……. 예전에도 수행 중에 진정한 자신을 찾는 경우가 가끔 있긴 했지만.”
“……킬리언은 뭐라던가요?”
“갑자기 이렇게 되었다는 둥 자기 의지가 아니라는 둥 이상한 변명만 하던데? 나더러 고쳐달라더라. 별난 녀석.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그거 변명이 아니라 진담이었을 거예요.”
“에이, 그럴 리가-”
“그럴 거예요.”
필로멜은 그의 무고함을 강력히 주장한 다음에 통신을 끊었다. 그러고는 잠시간 창밖을 내다보다가 조용히 혼잣말했다.
“좋아, 정했어.”
그로부터 십여 분 후, 그녀는 나사르의 방으로 찾아가 어느 제안을 건넸다.
“여행이요?”
“네, 적어도 한 달 정도는 다녀오려고요. 내킨다면 나사르도 함께 가지 않을래요?”
“어디로 가시는데요?”
“벨레로프 제국의 황궁과 중앙 평원이요.”
고민해 봤는데 이건 통신으로 대화할 게 아니라 직접 얼굴 보고 사과해야 할 문제 같았다.
상당히 동떨어진 두 개의 목적지를 들은 나사르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아름다운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그대와 함께라면 기꺼이.”
필로멜 역시 그러했다.
-외전 1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