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178)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178화(178/183)
<외전 7화>
화열 살의 유스티스는 현재와 달리 별 볼 일 없고 세도 약한 황자에 불과했다.
어미의 신분은 미천했고, 위로는 쟁쟁한 형제자매들이 많았으며 제위 계승 서열은 한참 아래였다.
그저 그런 시절도 있었지, 하고 넘기기엔 상당히 혹독하고 험난한 시기였다.
새로 준비된 찻잔에서 풍기는 그윽한 차의 향기를 맡고 있자니 새삼스레 감상적인 기분이 되었다.
기억은 조금씩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 * *
“추워.”
마차에서 내린 황자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이었다.
“그야 겨울의 북부니까요.”
옆에 있던 데일이 달래는 듯한 말투로 답하며 어린 소년의 어깨에 자신의 외투를 둘렀다.
“자, 얼른 갑시다. 먼저 보내놓은 심부름꾼이지배인에게 대충 이야기를 해놓았을 겁니다.”
그의 재촉에 유스티스는 떨떠름한 얼굴로 이 작은 도시에서 그나마 가장 좋은 시설을 갖췄다는 호텔을 향해 걸었다.
“고귀하신 화, 황자 전하를 뵙게 되어 가문의 영광이옵니다……!”
생전 팔자에도 없던 고객을 맞게 된 호텔의 지배인은 잔뜩 얼어붙은 채 고개를 조아렸다.
하긴 존재감조차 희미하고 계승 서열 저 밑바닥에 자리한 황자라 하여도 대부분의 일반 백성에겐 감히 고개를 들고 쳐다보지도 못할 황족이었다.
더군다나 오늘의 방문은 상당히 갑작스러웠으니 저리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저, 실례지만 목소리 좀 낮춰 주십시오. 이분의 신분이 새어 나가선 곤란해서요.”
“그럼요, 그럼요. 저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데일의 요청에 지배인이 세차게 머리를 끄덕인 다음에 소년을 흘긋거렸다.
“황자 전하께서 이곳에 머무실 거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이 호텔에서 저 하나밖에 없습니다. 다른 자들에겐 그저 귀한 가문의 자제분이라고만 일러두었으니 걱정 붙들어 매시길.”
아까부터 황자, 황자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주제에 뭘 붙들어 매라는 건지.
유스티스는 혀를 차며 뒤돌아 문으로 향했고, 그 모습을 본 데일이 물었다.
“엇, 어디 가십니까?”
“답답해. 로비에 있을 거야.”
“하지만 방이 준비되었으니 곧바로 그리로 올라가시는 편이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전하를 위해 저희 호텔에서 최고급 귀빈실을 준비해 놓았습니다요!”
지배인도 데일의 의견에 동조했으나 유스티스는 더는 가타부타 말없이 지배인 실을 빠져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배인과의 대화를 마쳤는지 데일이 황급히 따라 나와 그에게 붙었다.
“사람이 많은 곳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알아. 안다고.”
그의 속삭임에 유스티스는 짜증스럽게 맞받아치며 우뚝 멈춰 섰다.
그 역시 언제 어디서나 그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쯤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황태자인 유스티스의 이복형은 호시탐탐 자신에게 걸림돌이 될 만한 아우들의 목숨을 노리고 있으니.
4황자가 독이 든 차를 마시고 절명한 것이 불과 한 달 전 일이었다.
조사가 진행되었으나 그 차를 내간 궁인만 목숨을 잃고 끝끝내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황태자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의 소행이라는 사실을 짐작하지 못하는 사람은 궁 안에 없었다.
유스티스는 조사가 끝나자마자 황궁을 뛰쳐나왔다.
목적지는 예전부터 종종 그에게 자신의 딸과 약혼할 것을 제안하던 오를레타 백작의 영지였다.
제법 부유한 상인 집안을 외가로 둔 4황자도 제거당했다.
그럼 자신은? 유스티스의 어미는 아름다운 외모로 잠시 황제의 눈에 띄었을 뿐인 하녀였고, 병마와 싸우다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하녀 출신의 황비가 남긴 7황자를 지켜줄 울타리는 없다고 보아도 좋았다.
그나마 일찍이 황비를 모셨던 시종 데일이 어린 황자를 돌봤으나 평민 신분인 그 또한 별다른 힘이 없긴 마찬가지다.
차라리 황태자가 싹을 짓이겨놓아야겠단 생각조차 하지 못할 만큼 아예 별 볼 일 없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 7황자는 열 살밖에 안 된 나이임에도 많은 양의 신성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황제의 피를 짙게 물려받았다는 증거.
어리고 어미의 출신이 한미해 후 순위로 밀려났다지만, 황태자가 언제까지고 잠재력 있는 동생을 가만히 두고 볼 가능성은 작았다.
아니, 굳이 황태자가 아니어도 그의 모후인 황후와 그를 지지하는 동복형제들, 혹은 또 다른 황태자의 지지 세력들도 얼마든 보호해 줄 이 하나 없는 7황자를 건드릴 수 있다.
사면초가. 이런 상황에서 유스티스가 기댈 수 있는 구석이란 그에게 원하는 바가 있는 오를레타 백작 정도였다.
아직 깊은 대화는 나누지 못한 터라 정확한 백작의 속내는 모르겠으나 그로선 하나 남은 구원의 동아줄을 움켜잡아야 했다.
하아, 소년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렀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언제까지 죽음이 그를 덮칠까 두려워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걸까.
‘아마 평생이겠지.’
설령 운이 좋아 오를레타 백작의 딸과 약혼하여 백작의 비호를 받는다고 하여도 완벽히 그의 안전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백작이 과연 황태자의 마수를 막아줄 수 있을까? 과연 도중에 마음이 바뀌진 않을까?
남들은 그더러 지고한 혈통을 이었으니 복 받았다 할지 모르겠지만, 소년의 인생은 늘 죽음의 그림자와 함께했다.
평민이 되어도 좋으니 적어도 밤엔 걱정 없이 잠드는 것이 그의 소원이었다.
“황자 전하.”
그때 데일의 잠긴 목소리에 의해 유스티스는 상념에서 벗어났다.
“제발 방으로 가시지요.”
사실 로비든 방이든 그에겐 어느 쪽이나 똑같이 답답하고 걱정이 끊이질 않는 장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로비로 가겠다고 고집한 것은 소년 나름의 반항이었다.
하루빨리 오를레타 백작령에 당도해도 모자란 판국에 돌연 출몰한 몬스터 떼로 인해 그곳으로 통하는 길이 막혔으니 예민해질 수밖에.
마음 같아선 몬스터 떼고 뭐고 뚫고 지나가고 싶었으나 현실적으로 무리였다.
그러한 난데없는 사정 탓에 유스티스 일행은 예정에도 없던 작은 도시에 머물며 당분간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기로 하였다.
몬스터 떼는 이동할 수 있는 만큼 확실한 안전을 챙기려면 멀리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랬다간 시일이 지나치게 오래 소요된다.
황실에서 보낸 군대가 몬스터 떼와 전투 중이라 하니 일단 어느 정도의 안전이 확보된 이 도시에서 기다리는 것이 상책인 듯하였다.
마탑이 자리한 앙헬리움과 가까운 덕에 북부의 도시에는 꽤 많은 마법사가 거주한다.
그들도 비상시엔 싸울 수 있는 전력이다.
“……알았어. 방으로 갈게.”
기세가 한풀 꺾인 음성으로 유스티스가 말하자, 데일의 낯이 환해졌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리로 오시지요.”
그를 이다지도 걱정해 주는 사람을 두고 투정이나 부리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다.
그런데 유스티스가 데일을 따라 발걸음을 돌리려던 때였다.
“지금 나랑 장난해?”
날카로운 비난이 소년의 고막을 파고들었다.
소년은 반사적으로 그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는데, 로비의 카운터 앞에서 한 남자가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좋은 말로 할 때 빨리 내 방 내놔.”
“손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곤란한 건 이쪽이거든? 왜 내가 예약한 방을 못 주겠다는 거야?”
“계속 설명해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 방은 다른 분이 쓰셔야 한다니까요.”
“왜 내 방을 다른 놈이 쓴다는 건데? 며칠 전에 예약할 때까지만 해도 그런 말 없었잖아!”
“그, 그건 죄송합니다. 저희 측의 착오로 이중 예약이 되는 바람에…….”
“그럼 그쪽한테 다른 방을 주고 그 방은 나한테 줘.”
“아, 안 됩니다! 그분이 먼저 예약하셨습니다!”
“아니면 지금 당장 그 방과 똑같은 최고급 귀빈실을 하나 더 만들어내!”
“아니, 그렇게 무리한 말씀을 하셔도…….”
남자가 위협적으로 카운터를 쾅쾅 두드리자 직원의 안색이 새파래졌다.
마법사인가?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걸친 로브를 보면 알 수 있었다.
마법사라고 해서 전부 다 실력이 뛰어나란 법은 없지만, 일반 백성들에겐 단지 마법사란 것 자체만으로 충분히 두려울 만했다.
“만들어내! 싫으면 그놈한테 가서 그 방을 내놓으라고 네가 설득하고 와!”
아무튼 양아치 같은 인간의 행패를 보고 있던 유스티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자가 예약했다는 최고급 귀빈실이란 지배인이 그를 위해 준비했다는 방이었다.
지배인으로선 황자에게 가장 좋은 방을 내줄 수밖에 없었겠지만, 예약한 방을 빼앗긴 입장에선 기분 나쁠 만했다.
물론 저런 행태는 추하기 그지없지만.
유스티스가 데일을 보며 명했다.
“저자를 불러와.”
“네?”
“방을 바꿔주겠다고 해. 괜히 이 소동 때문에 시선이 몰려봤자 좋은 게 없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래.”
이런 상황에선 어른스러운 쪽이 양보하는 것이 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