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182)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182화(182/183)
<외전 11화>
이후 유스티스는 남은 한 명의 호위를 찾아 데일이 어젯밤에 든 암살자란 사실과 로널드가 그의 공범이란 것을 알렸다.
“……그렇군요.”
그는 다소 놀란 듯했으나 그 이상의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배신과 피로 얼룩진 이 바닥에선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었다.
“그럼 앞으로 어찌하실 요량입니까?”
앞으로 저 혼자 떠맡게 될 업무를 상상하는지 그저 피곤한 낯으로 묻는 남자 앞에서 유스티스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 도시의 치안대에 가서 상황을 설명해라. 그러면 로널드를 구속하고 죽은 자들의 시신도 알아서 수습해 놓겠지.”
“네? 하지만 그랬다간 황실에서-”
“그래, 우리의 여정은 여기서 끝이다. 오를레타 백작령엔 가지 않아.”
그자는 유스티스를 말리거나 설득하지 않았다. 어린 황자의 얼굴을 잠시 살피다가 주어진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러 물러갈 뿐이었다.
하기야 애당초 그리할 정도의 의리나 신뢰로 이루어진 관계도 아니다.
유스티스는 새삼스레 생각보다 데일의 배신에 충격을 받지 않은 자신을 깨달았다. 어쩌면 그 역시 그자가 숨긴 야망과 그 야망으로 인해 야기될 파국을 은연중에 예상하였을지 몰랐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래된 인연이었으니.
“이제 됐어.”
유스티스는 그리 읊조린 뒤에 방으로 향했다.
더는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다. 아무것도.
그다음 일은 예상대로 돌아갔다.
이 작은 도시의 치안대는 무려 황자가 얽힌 불온한 사건으로 인해 발칵 뒤집혔다. 괜히 황족의 권력 다툼에 휘말려 봤자 전혀 이로울 게 없는 법. 유스티스는 그들이 쉬쉬하며 조용히 상황을 뒷정리하는 광경을 남 일처럼 지켜봤다.
그리고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소식을 들은 황실에선 그의 귀환을 명했다. 힘없는 7황자는 황실의 명을 거스를 수도 없었으며 거스를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그리하여 제도로 출발하기 바로 전날.
유스티스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저도 모르게 방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암살자가 들었던 그날 밤 이후 첫 외출이었다.
“전하.”
“나 혼자 잠시 다녀오겠다.”
“하오나-”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그에게 따라붙으려던 호위기사는 꺼림칙한 표정을 지었으나 이어지는 말을 듣고는 얌전히 제자리를 지켰다.
“산책 정도는 혼자서 하게 해줘. 어차피 얼마 가지 못할 자유일 텐데.”
목적지는 정원. 딱히 산책을 즐길 생각은 없었으나 발이 가는 대로 거닐다 보니 도달한 장소다.
그는 걷고, 걷고, 그저 걸었다.
그렇게 정처 없이 걷던 중, 연못이 나타났다. 보기 좋은 수초가 자라나고 잉어가 몇 마리 헤엄치는 제법 큰 연못이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을 거닐었던 때, 그를 보필하던 데일은 연못을 보며 이렇게 당부했다.
“듣기로 연못의 수심이 꽤 깊다고 합니다. 성인이면 몰라도 아이는 머리가 잠길 수 있다고 하니 전하께서도 조심하시지요.”
“애 취급하지 마라.”
“송구하오나 열 살은 충분히 애입니다.”
불과 며칠 전에 있었던 일임에도 까마득하다.
그는 그때 무슨 생각으로 암살하려던 대상의 안위를 걱정하는 체했던 것일까.
무슨 마음으로 그의 앞에서 웃고 떠든 것일까.
유스티스는 연못이 마치 배신자의 속마음이라도 되는 듯 노려봤다. 그러나 한참을 물과 눈싸움해도 저 아래 있을 밑바닥은 보이지 않았다.
데일의 말대로 정말 깊긴 한가 보다. 사람이 빠져도 아무도 모를 만큼.
“어이.”
그때 돌연히 들려온 목소리에 유스티스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또 보네, 꼬맹이.”
목소리의 주인은 유스티스 일행을 제외하고는 현재 이 호텔에 남은 유일한 투숙객이었다.
변고가 변고이니만큼 치안대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보내려 들었지만, 다른 손님들이 다 떠나간 후에도 콧방귀나 뀌던 남자.
끝내 굴복한 것은 치안대 쪽으로 최고급 귀빈실은 여전히 이자의 차지란 사실을 방에서 은거하던 유스티스조차 들어서 알고 있었다.
“용건이 뭐지?”
자연스레 날카로운 음성이 튀어나왔다.
따지고 보면 데일의 위협에서 그를 구한 생명의 은인이라 할 수 있었으나 어린 황자는 이자가 거북했다.
단순히 오랫동안 봐온 시종의 목숨을 빼앗았단 것이 그 이유는 아니었다.
뭐라고 할까. 그는 본능적으로 이 남자에게서 어떠한 결핍을 느꼈다. 정확히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는 설명할 수 없었지만…….
“엄청난 죽상이잖아.”
마법사는 느긋한 걸음걸이로 연못가로 다가왔다.
“뭐가 그렇게 슬퍼? 그놈의 배신? 아니면 그놈의 죽음?”
“무슨 상관이지?”
“이해할 수가 없네. 적의 속내를 알아차린 거로도 모자라 그 적이 죽었으면 오히려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닌가?”
처음에는 그의 속을 뒤집어놓기 위해 비꼬는가 싶었지만 진심으로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그 순간, 유스티스는 남자가 지닌 결핍의 단면을 얼핏 엿본 듯한 기분을 느꼈다.
“……네게 내 감정을 설명해야 할 이유는 없어.”
“싫으면 하지 마. 크게 궁금하지도 않았어.”
할 말을 했으니 갈 줄 알았으나 그자는 떠나긴커녕 그를 지긋이 응시했다.
“너 포기했지?”
유스티스가 무시해도 계속해서 떠든다.
“한심하네. 발악다운 발악 한 번 못 해보고 완전히 놓아버린 꼴이라니.”
“닥쳐. 네가 뭘 안다고.”
“왜 몰라? 세상 다 잃은 것 같은 죽상을 하고 있는데. 삶에 대한 의지는 내버린 채 그저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려고 마음먹은 얼굴이야.”
소년은 그저 입을 꾹 다물었다.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그라고 하여 포기하고 싶어 포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방도가 없는걸.
실은 약삭빠른 오를레타 백작이 나약한 황자의 힘이 되어줄 리 없다는 사실은 유스티스 본인이 제일 잘 알았다.
그는 그저 신성력도 제법 많고 혈통도 좋은 적당한 짝을 제 딸에게 선물하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황태자가 이복동생의 목숨까지 거둘 생각은 없다는 가정하에서나 성립하는 이야기.
백작은 필시 황태자의 의중을 알아채는 즉시 그를 버릴 것이다. 어쩌면 이미 알아차렸을 수도 있고.
그러니 여기에서 그만 발버둥을 멈추기로 한 유스티스의 결정은 현명한 셈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는 주제에 좋을 대로 떠들기는.
“아무렴. 사실 네 인생관까지 내가 상관할 건 없지. 그렇지만 헤어지기 전에 이 말만은 꼭 하고 싶네.”
그런데 다음 순간, 헛기침한 남자는 의외의 말을 입에 담았다.
“이대로 포기하기엔 네 삶이 아깝지 않아?”
유스티스는 반사적으로 그와 시선을 맞췄다.
“이 세상에는 네가 할 수 있는 가치 있는 일이 많아. 너에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뭐?”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에게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들이 나왔다.
남자의 눈빛은 드물게 진지했으며 특별히 거짓을 고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갑자기 나한테 이러는 저의가 뭐야?”
설마 판에 박힌 가식적인 설교라도 늘어놓을 셈인가.
삶은 귀중한 것이라든가, 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을 생각하라든가, 죽을 각오로 열심히 살아가라든가, 하는 그런 오지랖이 대해와 같이 넓은 참견들 말이다.
정말 그럴 작정이라면 유스티스는 그 헛소리를 비웃어줄 생각이었다. 네가 나의 처지가 되어본 적 없으니 할 수 있는 속 편한 소리라고.
하지만 남자는 별다른 대꾸 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어디선가 종이 한 장이 날아왔다.
“자, 읽고서 아래에 서명해.”
유스티스는 얼떨결에 빼곡히 글자가 들어선 종이의 첫머리를 읽어봤다.
[신체 제공 및 권리 포기 동의서]척 보기에도 매우 불순한 제목이었다.
“사실 내가 이다음에 연구해 보고 싶은 대상 중 하나가 벨레로프 황족의 신성력이거든.”
설명을 요구하는 유스티스의 눈길에 마법사가 웃으며 답했다.
“뭐, 그보다 흥미로운 것들이 더 있는 데다 황족을 건드리면 여러모로 귀찮아져서 차순위로 미뤄두고 있었는데 여기에서 딱 널 만나게 된 거지.”
“……그래서?”
“네 삶은 내 보배로운 연구 활동에 밑거름이 될 거야. 신성력을 뽑아내면 좀 아프겠지만, 그래도 죽지 않을 정도로 잘 조절해 볼게.”
“…….”
“아까운 실험체니까 잘못되면 나도 곤란해. 아, 그리고 네가 인간으로서 누리는 몇 가지 자유는 제한하겠지만, 대신 신변의 안전은 보장할게. 어때? 네가 이제껏 살았던 한심한 삶보단 훨씬 가치 있는-”
북북, 유스티스가 종이를 찢어버리자 남자가 깜짝 놀라 악 소리쳤다.
“지, 지, 지금 뭐 하는 거야! 내가 기껏 고심해 가며 작성한 서류인데!”
하지만 유스티스는 한발 더 나아가 갈가리 찢은 종잇조각들을 땅바닥에 떨어트리고는 마구 짓밟았다.
“너 따위 인간이 바라는 대로 해줄 성싶나!”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그는 건방진 낯짝에 대고 손가락질해 주었다.
“두고 봐! 다시는 그 입에서 한심하다느니 실험체가 어쩌고 하는 소리 안 나오게 해줄 테니까! 이 머저리! 양아치! 막돼먹은 놈!”
실성한 듯 소리치는 유스티스의 안에서 어떤 것이 활화산처럼 끓어올랐다.
이제까지 공포나 서러움 같은 것들에 짓눌려 제대로 표출된 적 없던 분노였다.
“난 내가 바라는 대로 살 거다!”
한번 터져 나온 용암은 그간 자신을 억압해 온 다른 감정들을 마비시키며 그의 안에 자리한 모든 것을 활활 태웠다.
유스티스는 그제야 그가 진즉 분노했어야 할 존재들을 향한 선명한 분노를 느꼈다.
검을 들고 달려들던 데일의 앞에서 한번 모든 것을 버리고 나니 남은 것은 그것뿐이었다. 이제부터 이 삶의 원동력이 될 한 줄기의 맹렬한 불꽃.
“왜 저래…….”
그리고 본의 아니게 분노를 끌어낸 당사자는 성난 걸음으로 떠나는 황자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내저었다.
“화를 조절하는 데 문제가 있나 봐.”
자신이 도화선에 붙인 조그마한 불씨 하나가 이후 한 사람의 인생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칠지 알지 못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