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183)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183화 (외전 완결)(183/183)
<외전 12화>
* * *
“부황 폐하?”
꾀꼬리 같은 목소리에 깊은 회상에 잠겨 있던 유스티스의 정신이 깨어났다.
“폐하, 어디 편찮으신지요?”
장소는 그의 집무실. 유스티스의 옆에 앉은 엘렌시아가 걱정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당장 궁의를 부를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유스티스는 딸을 안심시키며 이제 거의 식어버린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냥 옛날 일이 조금 떠올랐을 뿐이야.”
엘렌시아가 폴란과 이야기하는 틈을 타 잠시 오래된 기억을 꺼내 본다는 것이 그만 지나치게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하오나 용안이 영 좋지 않으셨습니다.”
“괜찮대도. 단지…… 별로 좋지 못한 기억이라서 표정이 굳었던 것 같다.”
“아, 그렇군요.”
엘렌시아는 그제야 안심한 기색을 보이다가 얼마 후, 이렇게 물어왔다.
“혹시 실례만 안 된다면 그게 어떤 기억인지 여쭤도 될까요?”
아직 모르는 부분이 많은 아비에 관해 궁금한 모양이었다.
유스티스는 지긋한 눈빛으로 딸아이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렸을 때, 공부가 너무 하기 싫어서 수업을 땡땡이치고 놀러 갔던 일.”
엘렌시아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폐하께도 그런 때가 있었군요.”
“평범한 꼬맹이였으니까.”
능청스레 거짓말을 입에 담으며 유스티스는 입가를 느슨히 했다.
괜히 무거운 진실을 털어놔 이 아이의 표정을 흐리게 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었다.
데일의 배신을 겪은 후, 유스티스의 인생은 분노의 업화로 점철되었다.
믿을 것은 제 안에 깃든 방대한 신성력과 제법 튼튼한 육체, 그리고 번번이 간발의 차로 죽음을 빗겨 나가게 했던 아슬아슬한 행운뿐.
나약했던 7황자는 그 얼마 되지 않은 것들을 긁어모아 자신을 위협하던 모든 존재를 해치우고 악착같이 생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앞으로 펼쳐질 엘렌시아의 인생은 분노가 아닌 다른 감정으로 가득할 터.
더는 볼 수 없는 그리운 이가 염원했던 대로…….
똑 닮은 생김새를 보고 있자니 이사벨라가 떠올랐다.
권좌까지 거머쥐고도 멈추는 법을 몰라 맹렬히 내달리던 그의 질주를 끝낸 인물.
“폐하께선 화낼 때조차 어쩐지 슬퍼 보이시네요. 무엇이 그렇게 당신을 슬프게 하나요?”
그 언젠가 그녀가 그리 물었던 순간, 유스티스는 비로소 자신이 분노라는 감정으로 도피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먼 옛날 소년은 믿었던 시종의 배신과 죽음을 온전히 감내해 내지 못했다.
그래서 한 가지 감정으로 슬픔이나 허탈감 등의 다른 것들을 그저 검붉게 물들였다.
분노에 몸을 맡기면 적어도 화살을 남에게만 겨냥할 수 있으니.
그러한 속내를 꿰뚫어 본 이사벨라는 유스티스가 그제까지 묻어두고 지낸 여러 가지 것들을 제대로 마주하도록 이끌었다.
처음에는 불쾌해하던 그도 가랑비에 젖듯 천천히 이사벨라의 색으로 물들어갔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이 예고도 없이 끝났을 때, 유약한 남자는 아내가 남긴 가르침을 행하기보단 또다시 도망치는 쪽을 택했다.
그 탓에 평생 후회해도 부족할 실수를 한 아이에게 저지르고 말았다. 필로멜, 유스티스의 가슴 안에 영원토록 참회와 애정으로 남을 아이.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필로멜의 친부는 오래전 그에게 분노를 일깨워 준 남자였다.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유스티스는 그자가 자신과 동급으로, 혹은 그 이상으로 한 아이의 아비가 되기 적합하지 않은 인간이라 판단했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그자야말로 필로멜의 아버지에 어울린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딸을 지키기 위해 악신의 소굴에 들이닥쳤던 행동은 어엿한 아비의 모습이었다.
유스티스가 이십 년이 넘는 세월 속에서 조금씩 변했듯 그 역시 변한 것이다.
바른대로 말하자면 어떻게 그런 작자의 밑에서 필로멜이 나왔는지 아직도 의문일 만큼 그자는 여전히 싫었지만…….
“살다 보면 못 본 척 외면하고 싶은 것들이 많죠. 그래도 외면하기만 해선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요. 자, 우리 함께 마주해요. 유스티스.”
생전에 이사벨라가 일렀듯 그는 솔직히 인정하기로 하였다. 필로멜을 더욱 행복하게 해줄 그 아이의 아비는 자신이 아니라고.
그런가. 지금도 외면하지 말고 똑바로 마주해야 할 때인가.
바닥을 드러낸 찻잔을 쳐다보다가 문득 깨달음을 얻은 유스티스가 입을 열었다.
“엘렌시아.”
“네, 폐하.”
“폐하가 아니라 아빠 또는 아버지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다.”
엘렌시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 하지만 황녀로서 체통을 지켜야…….”
“네가 진정으로 그걸 원한다면 더 말하진 않겠다. 그렇지만 한 번쯤은 네가 정녕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자신에게 물어보면 어떨까.”
영 익숙하지 않은 종류의 이야기라 그는 신중히 단어를 고르며 말을 이어갔다.
“나는 옛날부터 내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기에 후회가 남는다. 네 어머니인 이사벨라 역시 내게 늘 솔직해져도 된다고 했었지. 넌 나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았으면-”
“아빠.”
서로의 시선이 마주 닿자 엘렌시아는 배시시 웃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알았어요. 마음 써주셔서 감사해요, 아빠.”
대견한 딸의 대답에 유스티스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퍼졌다.
그때도 이렇게 해야 했는데. 필로멜이 아빠에서 폐하로 호칭을 바꿨던 그때도.
그렇지만 그는 후회스러운 과거에 매몰되기보단 현재를 바라보려고 노력하였다.
“실은 좀 놀랐어요.”
엘렌시아는 쑥스러운 듯 옷매무새를 매만졌다.
“아빠가 이렇게 말씀해 주실 줄은 몰랐거든요. 아, 그래도 사람들 앞에선 전처럼 부를게요. 역시 위엄 있는 황녀로 보이고 싶네요.”
“편할 대로 하여라.”
“저, 그리고…… 황후 전하, 그러니까 저를 낳아주신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이사벨라의 이야기?”
“네, 더 듣고 싶어요. 어떤 분이셨는지 계속 궁금했어요. 안 될까요?”
잠시간 눈을 내리깔았던 유스티스가 다소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연히 안 될 것 없다.”
그 역시 바라던 바다. 이제껏 엘렌시아가 카트린만을 어미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 조심스럽게 굴었지만, 사실 줄곧 이사벨라와 함께했던 시간을 공유하고 싶었다. 그녀가 목숨을 걸어가며 탄생시킨 이 소중한 아이와.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까.”
그런데 갑자기 말하려니 말문이 막혔다. 그만큼 이사벨라와의 추억은 손쉽게 풀어놓기엔 그에게 너무나도 거대한 의미를 지녔다.
“그럼 나중에 말씀해 주셔도 괜찮아요.”
“알았다. 그때까지 기억을 정리해 봐야겠군.”
그렇게 두 부녀가 다음을 기약할 때였다.
“폐하! 큰일입니다!”
용무가 생겼는지 유스티스가 한창 회상에 빠져 있던 중에 자리를 비웠던 폴란 백작이 호들갑을 떨며 돌아왔다.
황제는 책망하는 눈빛으로 과거에 자신을 배신했던 시종보다도 더 오랜 세월을 함께한 충실한 심복을 응시했다.
“경망스럽다, 폴란.”
그럼에도 딸과의 오붓한 시간을 방해한 남자는 채신머리없이 소리쳤다.
“그게 정말 큰일이란 말입니다! 지금 바깥에 누가 와 계신데요!”
“누군데?”
누가 와 있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는 유스티스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무려 태양신까지 몸에 담았던 그인데 어지간한 자의 방문에 놀랄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폴란의 입에서 나온 인물의 이름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필로멜 님이 오셨습니다! 에이브리든 공자와 함께요!”
유스티스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뭐? 필로멜이 왜 기별도 없이!”
“저도 뵙자마자 달려온 것이라 자세한 사정은 듣지 못했습니다만, 폐하께 사과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하시던데요?”
“나한테 사과를?”
“네.”
유스티스가 사과하면 사과했지 대체 필로멜이 그에게 사과할 것이 뭐 있단 말인가.
불현듯 어떤 가능성이 머릿속에 생겨났다.
“……엘렌시아.”
“네.”
“혹시 말이다. 정말 혹시…….”
그는 떨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열었다.
“그때의 일을 필로멜에게 말한 것은 아니겠지?”
“그때라니요?”
“왜, 내가 그 괴상한 차림을 했던 때 말이다.”
“아, 그 샤워 가운에-”
“그만, 거기까지만.”
조금도 떠올리기 싫은 그 날의 기억에 유스티스가 말을 막자, 엘렌시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설마 필로멜에게조차 말하면 안 되는 이야기였나요?”
“…….”
“죄송해요! 저는 그것도 모르고.”
“아니다. 네가 죄송할 것은 없지.”
딸의 표정이 흐려지는 것을 본 유스티스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말하면 안 되는 이야기까진 아니야.”
그저 그가 상당히 창피할 뿐. 게다가 필로멜에게 괜한 마음의 짐을 지워주기도 싫었다.
사실 유스티스는 당시부터 그 망측한 이변이 필로멜에게서 비롯되었으리란 어렴풋한 추측을 품고 있었다. 그 아이는 엘렌시아의 몸을 빼앗았던 침입자처럼 시스템인지 뭔지 하는 기묘한 힘을 다룰 수 있었으므로.
필로멜의 성격상 유스티스가 겪은 상황을 알게 되면 필시 미안해할 터이니, 말하지 않을 속셈이었다. 그런데 설마하니 엘렌시아를 통해서 진실이 새어 나갔을 줄은.
“…….”
그래도 뭐. 유스티스는 표정을 푼 뒤에 아직 주눅 들어 있는 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는데 이제 와 어쩌겠는가.
“같이 필로멜을 맞으러 갈까?”
오매불망 그리던 손님을 보는 것은 그 어느 때라도 즐거운 법이다. 특히 가족과 함께라면.
* * *
한편 그 시각, 마탑에 자리한 마탑주의 집무실엔 서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또 다른 서류를 한 아름 들고 온 렉시온은 한숨을 내쉬며 잔소리했다.
“르귄 님, 도대체 일은 언제 하실 겁니까?”
“내 마음 내킬 때.”
책상에 엎드린 인물의 성의 없는 대답에 그가 한탄하듯 중얼거렸다.
“아무튼 필이 없으면 늘 이 모양이지.”
“시끄러워. 일할 기분이 안 나는데 나더러 어쩌란 거야?”
“얼씨구 이건 또 뭡니까? 낙서?”
책상 위에서 발견된 종이에는 안경을 쓴 사람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사람의 머리에는 악마 뿔이 돋아나 있었고 그 위에 멍청이, 잔소리쟁이, 속이 시꺼먼 놈과 같은 욕설이 적혀 있다.
렉시온은 망설임 없이 종이를 찢어버렸다.
“이 자식이…….”
“낙서할 여유가 있으시다면 일이나 보세요.”
그런데 평소 같았으면 곧바로 되받아쳤을 사람이 오늘따라 말이 없다.
“르귄 님?”
아리송한 얼굴의 마탑주가 고개를 기울였다.
“뭐라 할까. 아주 옛날에 너 같은 건방진 놈을 만난 것도 같은데…….”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고 이내 명쾌한 결론이 도출되었다.
“뭐, 별일 아니겠지!”
그는 원래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금방 잊는 사람이었다.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