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24)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24화(24/183)
<24화>
“르귄 님.”
책상 뒤로 간 렉시온이 무릎을 굽혀 말했다. 르귄은 바닥에 앉아 있는 모양이었다.
“어. 왜?”
책상 너머로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의 딸이라 주장하는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뭐? 이제 와서?”
“다소 늦은 감은 있으나 모친에 대한 진술은 자료와 일치합니다. 그런데 자료상에는 모친이 아이를 출산했다는 기록이 없더군요.”
“아마 소식이 없으니 당시 담당자는 임신이 안 됐거나 유산했을 거라 판단했겠지.”
필로멜에 관한 이야기였지만 필로멜은 전혀 알지 못하는 내용이었다.
“지금 이 자리에 오셨는데 만나보시겠습니까?”
“한 번쯤은 봐야겠지.”
이윽고 책상 뒤편에서 어떤 인영이 불쑥 솟아올랐다.
필로멜은 르귄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헝클어진 은발 아래 황금빛 눈동자가 기이하게 빛났다.
유스티스와 나사르를 봐왔으니 웬만한 미남에겐 끄떡도 안 할 자신 있었지만, 그도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리고 매우 젊었다. 막연히 나이가 들었을 거라 상상했는데, 많아봤자 삼십대 초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필로멜과 닮은 구석은…… 눈동자 색이 좀 닮았나? 자신의 것은 그의 것처럼 찬란한 황금빛이 아니라 개나리색에 가깝지만.
문득 필로멜은 렉시온도 그와 비슷한 눈 색을 가졌단 사실을 상기했다.
조금만 더 훑어본다는 게 그만 르귄의 무기질적인 시선과 맞닿았다.
그 순간 기묘한 이질감이 필로멜의 몸을 타고 내려왔다.
‘뭔가 달라.’
왠지 이 사내가 자신, 그리고 여타의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생물체처럼 느껴졌다.
‘뭐지? 이 감각은.’
은발의 남자는 필로멜을 보고는 심드렁한 얼굴을 지우고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안녕? 내 이름은 르귄. 그쪽은 이름이 어떻게 되실까?”
“필…… 입니다.”
본명은 밝힐 수 없어 애칭을 말했다. 정작 애칭으로 불린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 필이구나. 일단 여기 앉아.”
르귄이 소파 위를 점령한 잡동사니를 대충 치워서 자리를 마련해 줬다.
“저는 나갈까요?”
“끝나고 말할 게 있으니까 여기 있어.”
“알겠습니다.”
렉시온의 물음에 르귄은 필로멜과의 볼일이 금방 끝날 양 대답했다.
필로멜과 르귄이 자리에 앉고 렉시온이 근처에 섰다.
“손.”
긴장감에 굳어져 어떻게 말을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던 필로멜에게 그가 손을 내밀었다.
“네?”
“손 좀 줄래?”
필로멜이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자 르귄이 맞잡았다. 단단하고 커다란 손…….
“커흑……!”
갑작스러운 통증에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무언가 몸속에 들어가 온몸을 헤집는 감각이었다.
“으윽…….”
“마력이 없어. 아니, 아주 조금 있네. 하지만 이건 뭐 빈껍데기 수준인걸.”
쭈그린 필로멜을 무감하게 내려다보며 르귄이 중얼거렸다.
“괜찮아요?”
다가온 렉시온이 필로멜 대신 항의해 줬다.
“이 인간이! 이런 건 양해를 구한 다음에 해야지. 마법사가 아니면 견디기 힘들다고요.”
“아, 미안. 내 자식이라고 하니 당연히 마법사인 줄 알고.”
필로멜이 상체를 일으켜서 그들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이게 대체 뭐죠……?”
렉시온이 설명했다.
“르귄 님의 마력을 불어넣어서 당신의 마력을 확인해 본 겁니다. 당신이 진짜 저분의 자식인지 아닌지 마력으로 알 수 있죠. 마력 운용에 단련된 마법사들에겐 좀 따끔한 수준이지만 당신에겐 아팠겠네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원래 좀 저런 인간이라…….”
렉시온의 은근한 비난을 깔끔히 무시한 르귄이 덧붙였다.
“터무니없이 적지만 내 마력이 맞아.”
“그럼……?”
“아가씨가 진짜 내 딸이라는 소리지.”
감동적이지도 극적이지도 않은 상봉의 순간이었다.
‘이게 뭐지?’
그동안 수백 번, 수천 번 친부와 만나는 순간을 그려왔다.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감동의 만남부터 너 같은 건 딸로 인정할 수 없다며 차갑게 내쳐지는 전개까지.
그런데 지금 펼쳐진 상황은 그녀가 전혀 상상치 못한 종류였다.
르귄은 있는지도 몰랐던 친딸을 만난 것치곤 태도가 지나치게 사무적이었다.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는데…….’
왜 임신한 카트린을 두고 갔죠?
저라는 딸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나요?
어떤 마음으로 책 속 ‘필로멜’을 받아주신 거죠?
그리고…… 저에게 조금이라도 애정이 있으신가요?’
수년 동안 묻지 못했던 의문들이 가슴속을 떠돌았다.
르귄이 먼저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많은 얼굴인데 물어봐도 돼.”
필로멜이 입을 달싹거리다 첫 질문을 뱉었다.
“……왜 임신한 어머니를 홀로 두고 떠나셨죠?”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네 어머니가 거기에 남길 바랐을걸. 그런 경우가 아니면 마탑에 머무르는 편을 권장했으니까.”
저 남자가 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
대화가 서로 맞물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필로멜은 다른 것에 더 집중했다.
“……기억이 안 난다고요?”
“십 년도 더 된 일이니까.”
당연하다는 듯한 르귄의 태도에 말문이 막혔다.
카트린과 르귄은 정말 하룻밤의 인연에 불과했다.
“제 어머니 이름은 카트린 하운즈. 저와 많이 닮았어요. 제 얼굴을 봐도 떠오르는 기억이 없나요?”
르귄은 얼굴을 필로멜에게 가까이 붙이더니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염색.”
“아.”
그러고 보니 아침에 염색했었지. 지우고 올걸 그랬다.
르귄이 손가락을 까닥하자 머리에 시원한 기운이 번졌다. 눈 깜짝할 새에 필로멜의 머리카락이 본래의 색을 되찾았다.
“음. 뭔가 떠오를 것 같기도 한데…….”
팔짱을 끼고 기억을 더듬던 남자가 산뜻하게 웃었다.
“미안. 잘 모르겠다.”
“……어떻게, 어떻게 기억도 못 할 수가 있죠?”
“기억해야 할 이유라도 있어?”
당당히 되묻는 남자를 보니 필로멜의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런 것보다 원하는 게 뭐야? 늦게라도 날 찾아온 이유는 원하는 게 있어서지? 마력이 적으니 마법사가 되는 건 무리겠고 역시 돈인가.”
손등이 젖어들었다.
필로멜은 손등을 적신 물기가 자신의 눈물이란 걸 조금 늦게 깨달았다.
“네 어머니가 안 받아간 액수까지 보태서 섭섭지 않게 줄 테니…….”
오랜 세월 눈물을 잊고 살았다. 세상은 필로멜이 운다고 달래주지 않았기 때문에.
“왜 울어?”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심으로 이유를 모르는 듯했다.
“필요 없어요. 돈이든 뭐든 당신이 주는 거라면 필요 없어.”
“왜?”
“우리는 피만 섞였을 뿐 남이나 다름없으니까요. 실례했습니다. 찾아오는 게 아니었어요.”
필로멜은 얼마 없는 짐을 챙겨서 문으로 향했다.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을 테니 잘 사세요.”
나가려던 필로멜이 돌아서서 자신을 세상에 태어나게 한 남자에게 마지막으로 고했다.
“……왜 저렇게 화를 내지?”
르귄은 필로멜이 떠난 자리를 망연히 쳐다봤다.
“아, 정말! 좋게 말할 수도 있었는데 당신이란 인간은…….”
렉시온이 짜증을 내며 서둘러 방을 나섰다.
돌아가는 길도 모르면서 필로멜은 정처 없이 뛰었다.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났는지 뜨거운 것이 계속 흘러내렸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마음속 한구석에는 친아버지의 애정을 갈구하고 있었다. 바보같이.
“잠깐만요!”
따라온 렉시온이 불러 세웠다.
필로멜은 소매로 눈가의 물기를 대충 닦고 고개를 돌렸다.
“무슨 일이죠?”
“나가는 곳까지 안내해 드릴게요. 그동안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
마탑을 빠져나가려면 다른 수가 없어 필로멜은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왔던 그대로 부유석을 타고 내려가면서 렉시온이 입을 열었다.
“혹시나 하였지만 당신은 본인의 탄생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는 것 같군요. 어머니가 안 가르쳐 주셨나요?”
“제가 뭘 모른다는 거죠? 아뇨, 모르는 게 많긴 해요. 하지만 이것 하나는 잘 알게 됐어요. 제 친부라는 사람은 본인의 자식을 가진 여자도 기억 못 하는 파렴치한이라는 사실이요.”
렉시온의 잘못이 아닌데도 날 선 말이 나갔다.
렉시온이 볼을 긁적였다.
“그 말이 맞긴 한데…….”
“미안해요. 괜히 화풀이해서. 렉시온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인데.”
“그건 아닙니다. 상관있어요.”
“네?”
“따지자면 제가 당신의 이복오빠니까.”
예상치 못한 말에 필로멜은 숨을 들이켰다.
“그렇군요…….”
“별로 안 놀라네요.”
그의 눈동자 색뿐만 아니라 얼굴선 등이 르귄과 닮은 것 같다 생각했었다.
“결혼은 안 했다 들었으니 사생아를 두 명이나 낳은 파렴치한이네요.”
“네 명입니다. 저 말고도 당신의 오라비가 두 명 더 있거든요.”
“…….”
“참고로 저희 세 명의 어머니는 모두 다릅니다.”
충격적인 사실에 충격적인 사실이 한 아름 더 얹어졌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집구석이야.
머리가 지끈거린다.
렉시온이 마저 말했다.
“르귄 님에 대한 당신의 평가는 부정하지 않겠지만……. 당신도 자신의 출생에 얽힌 비밀을 알고 싶지 않나요?”
필로멜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설명을 시작했다.
“르귄 님은 사랑을 모르는 남자입니다. 정확히는 사람이 가진 대부분의 감정을 모르죠. 당신이 그에게 바랐던 부모로서의 애정, 관심, 뭐 그런 것들을 티끌만큼도 이해하지 못할걸요.”
“……그렇지만 여러 여자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가졌잖아요. 그저 욕망밖에 없었던 건가요?”
“그게 오해인 부분인데. 그는 어느 여성과도 친밀한 관계를 맺은 적이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자식을 낳았단 말이죠?”
“실험입니다.”
……실험?이해하지 못한 필로멜에게 렉시온이 부연하여 설명했다.
“즉, 우리들은 실험을 통해 태어난 아이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