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31)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31화(31/183)
<31화>
* * *
화아아아아!
광채와 함께 방 한가운데 돌연히 나타난 황제를 보고 놀란 폴란이 달려들었다.
“폐하! 어디 가셨다가…….”
“궁의를 불러와! 얼른!”
폴란은 그가 품에 안은 인물이 누군지 알아봤다.
며칠 전에 실종된 황녀가 축 늘어져 있었다.
빠르게 상황을 이해한 백작이 사람을 시켜 궁의를 불렀다.
필로멜을 침상에 눕힌 유스티스는 궁의가 오는 그 잠깐을 못 참고 초조하게 주위를 왔다 갔다 했다.
“제기랄, 애가 다 죽게 생겼는데 왜 빨리 안 오는 거냐!”
백작이 슬쩍 황녀의 상태를 살폈다. 얼굴색은 안 좋지만 호흡은 안정되어 있고 맥박도 고르다. 죽게 생겼다는 건 과장이라 생각하면서도 황제의 기세가 무서워 입을 다물었다.
수 분 만에 도착했는데 느리다고 억울하게 욕먹은 궁의가 황녀를 진찰했다.
“누적된 피로와 수면 부족으로 인해 정신을 잃으셨을 뿐입니다. 아마도 그 상태에서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으신 모양인데…….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영양을 보충하시면 곧 기운을 차리실 겁니다.
“스트레스?”
“그렇습니다. 기절하시기 전에 무언가 충격적인 소식이나 장면이라도 접하신 게 아닌지…….”
에이브리든 소공작의 보고를 듣고 황제가 사라졌다가 나타났을 때의 시차를 고려하면, 높은 확률로 스트레스의 원인은 그에게 있을 것이다. 황제의 말이나 행동, 혹은 존재 그 자체가.
궁의는 황녀께서 깨어나면 드실 약을 지어 올리겠다며 물러갔다.
근래 소문만 무성한 황녀에 대해 궁금할 법도 한데 궁의는 별다른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그게 소리 없는 전쟁터인 황궁에서 오래 살아남는 법이었다.
“다른 방에 침상을 준비해 놓겠습니다. 폐하께서도 그쪽에서 쉬시지요.”
폴란이 잠든 황녀를 깨우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낮췄다.
“됐다. 나는 여기 있겠다.”
“쓰러지셨던 게 엊그제인데 이동 마법을 두 번이나 사용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다 또 쓰러지시면…….”
“괜찮대도.”
황제가 짜증스레 손을 휘휘 내젓자 폴란으로서는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방을 나서려다 돌아보니, 유스티스가 의자를 끌어다 침대 옆에 두는 모습이 보였다.
필로멜 황녀가 돌아왔다. 그러니 황제도, 황궁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올 것이다.
폴란은 기쁜 마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 * *
푹신하고 매끄러운 천의 감촉이 좋아 필로멜은 이불 속에 파묻혔다.
‘지금이 몇 시지? 일어나서 단장하고 수업 준비를 마쳐야 하는데.’
너무 피곤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이대로 있고 싶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됐다. 그녀에겐 매일 수행해야 할 일과가 있었다. 게다가 오늘 배울 경제학을 가르치는 선생은 꽤 엄한 편이었다. 수업시간에 늦었다간 넌지시 불만을 드러낼 거다.
유난히도 눈꺼풀이 무거워 힘겹게 눈을 떴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천장. 두어 번 눈을 깜빡거리다가 자신의 방이 아니라는 걸 인식했다.
침구에서는 시원하고 묵직한 나무 냄새가 났다.
‘이건 황제의 몸에서 나는 향인데…….’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어서 왜 자신이 이곳에 있는지 기억이 안 났다.
살짝 고개를 돌렸더니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눈을 감은 유스티스의 얼굴이었다.
‘가만, 유스티스……?’
필로멜은 튕기듯이 상체를 일으켜 사위를 둘러봤다.
이곳은 황제의 침실이었고, 필로멜이 몸을 누인 곳은 그의 침상이었다.
전부 떠올랐다. 필로멜은 도망쳤고, 친부를 만났고, 유치장에 갇혔고, 나사르와 생젠에 갔다.
생젠으로 찾아온 유스티스를 예기치 않게 맞닥트렸고……. 그 이후론 기억의 공백이었다.
너무 놀라 정신을 잃은 듯한데, 현 상황에 이르기까지의 중간 과정이 상상이 안 갔다.
황궁까지는 유스티스의 힘으로 이동했을 터다. 그런데 왜 필로멜이 황제의 침상에 누워 있고, 침상의 주인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가? 그것도 자신의 더러운 치마 끝을 손에 꽉 쥔 채.
순간 맥이 탁 풀렸다.
‘잡혀버린 이상 어디에 있든 무슨 상관이람.’
너른 창밖으로는 자신이 나고 자란 황궁의 모습이 비쳤다.
필로멜의 아름다운 감옥.
짧은 도피는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기를 쓰고 도망쳐 봐도 황제의 손바닥 안이었다.
악역은 주어진 운명을 바꿀 수 없었다. 그리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무슨 수를 써도 바뀌지 않는데 노력하는 쪽이 바보였다. 7년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바보짓을 했다.
“필로멜.”
필로멜이 어떤 의욕도 나지 않아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는데 이름이 불렸다.
“폐하.”
어둡게 잠긴 푸른 눈이 필로멜을 바라봤다.
“일어났군. 몸은 어떻지?”
피곤한지 미간을 주무르는 모습을 보니 자신보다는 유스티스가 누워 있어야 할 것 같았다.
“괜찮습니다. 비켜드릴 테니 폐하께서 여기서 주무세요.”
“아니다. 네가 더 누워 있어라.”
필로멜은 그 말을 따랐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더 이상 살기 위해 아등바등하며 머리 굴리기가 싫었다. 만사가 다 귀찮아졌다.
머리를 비운 필로멜에 비해 유스티스는 심란한 얼굴이었다.
“왜…… 떠났지?”
그는 한참 만에 당연한 걸 물었다.
필로멜은 여상히 대답했다.
“제가 폐하의 친딸이 아니니까요.”
그도 이미 잘 알고 있을 텐데 왜인지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취조하듯 여러 질문들이 이어졌다. 필로멜의 입에서 대답이 술술 흘러나왔다. 신기하게도 모든 걸 내려놓으니 그 유스티스도 예전만큼 무섭지 않았다.
“그 편지는 네가 쓴 게 맞나?”
“네.”
“그동안 어디에 있었지?”
“생젠 근방 이곳저곳에요.”
앙헬리움에 간 것에 대해선 그다지 알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나사르가 정식으로 보고를 올린다면 들킬 게 불 보듯 뻔했지만, 그냥 필로멜의 마음이 그랬다.
“생젠으로 간 이유는?”
“그냥 전부터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었어요. 예전에 에이브리든 소공작과 방문했을 때 도시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거든요.”
새빨간 거짓말까지는 아니었다.
“그동안 무슨 변고는 없었나.”
“변고라면…….”
“괴한을 만났다거나. 아니면 크게 아팠다든가.”
“별일 없었습니다.”
출생의 비밀을 맞닥트리고, 난생처음으로 뺨을 맞아보긴 했지만. 아, 철창에 갇힌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얼굴색이 안 좋지? 많이 여위었고.”
“잠자리와 음식이 몸에 안 맞았나 봐요.”
필로멜은 무심히 그를 바라봤다.
‘밖에 나가서 고생한 난 그렇다 쳐도, 본인은 왜 살이 빠졌대.’
아주 약간 궁금했다. 아주 약간.
마른세수한 유스티스가 진지한 눈을 했다.
“필로멜. 친딸이 아니라고 해서 네가 떠날 필요는 없어. 피가 안 섞였어도 넌 내 딸이다.”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피가 섞이지 않았는데 어떻게 딸일 수 있나. 입양 가족처럼 혈연 없이도 가족인 사람들이 있으나, 유스티스와 필로멜에겐 해당 사항이 없었다.
필로멜은 카트린이 남의 둥지에 밀어 넣은 뻐꾸기 알에 불과했다. 원래 있던 알은 둥지 밖으로 밀어버리고 자기가 부모 새의 자식인 척하는.
엄밀히 따져 필로멜이 밀어버리지는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엘렌시아는 부모와 떨어져 자랐다.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설명을 바라는 눈으로 쳐다보자 유스티스가 엄숙히 선언했다.
“내가 너를 입적하겠다.”
입적.
필로멜은 가만히 두 글자를 곱씹었다. 자신을 그의 양딸로 들이겠다는 뜻이었다.
혼란스럽다. 대체 왜 그런 결론이 도출되지?
“……왜죠?”
“넌 내 딸이니까.”
대답을 들었지만 의문만 짙어졌다. 머리가 다시금 아파져 왔다.
기껏 모든 걸 체념한 후에 어떤 결말이든 받아들이자는 마음이 든 참이었다.
설령 그것이 죽음이라고 해도. 그런데 전혀 예상 밖의 딴소리가 나왔다.
필로멜은 우선 가장 궁금한 점부터 질문했다.
“음. 그러니까…… 저를 죽일 의향이 없으신 건가요?”
“……내가 왜 널 죽이지?”
유스티스가 황망히 되물었다. 마치 필로멜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도 꺼낸 듯이.
“그럼 왜 그렇게 저를 찾아내려고 하셨죠?”
“갑자기 사라졌으니까.”
“찾아서 벌주고 싶었던 거 아니에요?”
“네가 저지른 죄도 아닌데 왜 너에게 벌을 주겠나. 너와 엘렌시아를 뒤바꾼 자는 네 친모이지 네가 아니다.”
“…….”
정론이어서 받아칠 말이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유스티스의 입에서 바른말이 나오니 미칠 듯이 어색했다.
“벌을 주려는 게 아니면 왜 그토록 저를 찾으셨나요?”
“내 딸이 사라졌으니까.”
잘못 들었나 싶어 한 번 더 물었는데 더 충격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딸? 지금 나보고 딸이라고 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