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33)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33화(33/183)
<33화>
얼마 안 되어 하녀들이 트롤리를 끌고 나타났다.
“황녀 전하, 식사를 내왔습니다.”
저들이 왜 필로멜을 아직 황녀라 칭하는지가 의문이었다. 전국에 퍼진 가짜 황녀 소식이 황궁 안에만 당도하지 않았을 리는 없고.
“침상에서 드실 수 있도록 간이 테이블을 설치하겠습니다.”
“거동이 불편한 것도 아니고 테이블에서 먹어도 괜찮아.”
“부디 뜻을 거두어 주십시오. 전하는 현재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명백한 환자 취급이었다. 게다가 차려진 음식들도 하나같이 영양식이었다.
“전하께서 편히 쉬실 수 있도록 저희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필요하신 게 있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시길.”
궁금한 정보를 캐물을 틈도 없이 임무를 마친 하녀들이 방을 나갔다.
황궁이고 뭐고 떠나겠다고 조금 전 선언한 입장에서는 괜한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았으나…….
꼬르륵.
그러기엔 배가 너무 고팠다.
떠올려 보니 엊저녁에 식당에서 먹은 빵 한 덩이와 수프 몇 숟갈 이후로는 쭉 공복이었다.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서 그런지 속이 시원한 게 모처럼 식욕도 돌았다.
‘모르겠다. 배부터 채운 다음에 생각해 보자.’
필로멜이 포크를 집어 들었다.
식사를 마치자 이번에는 시종장이 약을 가지고 왔다. 필로멜도 잘 아는 세계수의 열매를 들고.
“내가 환자도 아니고…….”
졸도한 건 며칠간 잠자리가 불편해 잠을 설치던 차에 놀라기까지 해서 일어난 일이지, 몸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시종장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환자이십니다. 그새 얼굴이 반쪽이 되셨는걸요. 아이고, 가뜩이나 마르셨는데 이렇게 뼈대만 남았네요.”
도피 생활로 살이 좀 빠지긴 했지만 저 말은 엄연한 과장이었다.
“멀쩡히 걸어 다니시는 게 신기할 정도입니다.”
시종장에겐 필로멜이 언제 쓰러질지 모를 중환자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걱정이 가득 담긴 시선에 결국 약을 먹고, 뒤이어 나온 식후 차까지 한 잔 마셨다. 덕분에 몸이 아주 늘어졌다.
한평생 고귀한 황녀로 살다가, 요 며칠 불편한 잠자리와 맛없는 음식에 시달린 몸이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사람 마음이 간사하다고 식욕을 해결한 다음에는 목욕과 청결한 옷이 간절해졌다.
필로멜은 자신이 지금 입고 있는 원피스를 둘러봤다. 며칠간 갈아입지 못한 데다 유치장 바닥에 뒹굴었던 탓에 더럽기까지 했다.
이제야 그 옷으로 깔아뭉갠 침대 상태가 걱정되어 살펴봤더니, 침대보와 이불 할 것 없이 거뭇거뭇 더러워져 있었다.
“……이거 비싼 건데.”
요정족들이 제국의 황제를 위해 몇 년에 걸쳐 만들었다는 단 하나밖에 없는 침구.
이불에는 벨레로프의 건국 신화가 정교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거기다 요정 여왕이 직접 축복을 내리기까지 해서 돈으로는 가치를 매길 수 없다고 들었다.
지워지지 않을까 싶어 그나마 깨끗한 소매로 문질러봤지만 오염 부위만 넓게 퍼졌다.
……태양신 벨레론의 자식이자 건국 황제의 얼굴이 얼룩덜룩해졌다.
“몰라! 내가 눕고 싶어서 누운 것도 아니고.”
필로멜은 쓸데없는 짓을 관두고 다시 드러누웠다.
‘……설마 겨우 이거 가지고 죽이기야 하겠어?’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 생각하기로 했다.
일단 죽지 않게 된 건 정말 다행이다. 입적은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여기 계속 머무른다는 건…….
쾅!
그런데 그때 노크도 없이 열린 문짝이 벽을 치며 큰 소리를 냈다.
“아빠! 저 왔어요!”
아름다운 금빛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엘렌시아였다.
“저번에 하다 말았던 주사위 놀이 계속해요!”
필로멜과 엘렌시아의 눈이 마주쳤다.
“어…….”
“…….”
토끼 눈이 된 엘렌시아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세상에! 필로멜 맞죠? 언제 오셨어요?”
“……오늘 아침에요. 오랜만이에요. 엘렌시아 황녀님.”
필로멜은 엘렌시아에게 말을 높여 대답했다.
자신은 가짜 황녀임이 밝혀졌으니 이러는 것이 맞았다.
“정말 잘됐어요! 실종됐다는 소식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엘렌시아는 필로멜에게 다가와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친구라도 만난 듯이 반갑게 웃었다.
착한 엘렌시아에겐 당연할지 몰라도 자신에겐 어색했다.
“고마워요. 절 그렇게 걱정해 주시다니.”
필로멜은 자신의 몰골이 새삼 부끄러워졌다.
옷은 더럽고, 머리는 산발이다. 유스티스 앞에선 의식조차 못 했는데 왠지 엘렌시아한테는 괜찮은 모습만 보이고 싶었다.
시골 소녀와 황녀로 마주했던 저번 만남과는 정반대의 처지가 되어서일까.
“이제 아주 온 건가요?”
“그런 건 아니고…….”
말끝을 흐리자 엘렌시아는 그 이상 파고들지 않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아빠는 어디 계시죠?”
“글쎄요. 어디 가시는 것 같던데요.”
오히려 필로멜이 묻고 싶었다. 주인은 어디 가고, 남의 방을 자신이 점령하고 있는 현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게 뭐죠?”
필로멜은 엘렌시아가 들고 있던 물건을 가리키며 말을 돌렸다.
종이로 만들어진 판과 상자가 보였다.
“아, 이거요? 마침 잘됐어요! 필로멜이 저와 함께 주사위 놀이 해줄래요?”
엘렌시아의 손에 이끌려 방 한쪽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종종 유스티스와 필로멜이 티타임을 가질 때 썼던 테이블이었다.
“주사위 놀이 해본 적 있어요?”
엘렌시아는 테이블에 판을 펼치고 상자에서 주사위와 조그마한 말들을 꺼내놓았다.
“해본 적은 없지만 대충 어떤 건지 알아요.”
심심풀이 삼아 하녀들이 하는 것을 몇 번 구경했다.
주사위를 굴려 나온 숫자만큼 자신의 말을 판 위에서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판에 그려진 여러 개의 칸마다 적힌 각각의 문구대로 말의 지위가 낮아지거나 높아졌다. 다 같이 농노에서부터 시작해서 제일 먼저 황제에 도달하는 사람이 승리자가 되었다.
“제가 예전 집에 있을 때 즐겨 하던 놀이였는데, 이곳에 와서 심심해하는 절 보고 어느 하녀가 가져다줬어요. 지금은 아빠나 유모가 상대해 줘요.”
“유모요?”
“제 어머니의 유모도 하셨던 분이요! 듣기로는 필로멜도 유모의 손에서 자랐다고 하던데.”
황궁을 떠날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다.
“지난번 아빠랑 했을 때, 급한 일이 생겨서 아빠가 나가셨어요. 그래서 오늘 하러 왔는데…….”
“곧 오실 거예요.”
필로멜은 시무룩해진 엘렌시아를 적당히 위로했다.
소설 속에도 있던 장면이건만, 평민 아이들이나 할 법한 놀이를 하는 황제가 잘 그려지지 않았다. 진짜 황제가 황제를 목표로 하는 놀이를 하는 것도 좀 우스웠다.
‘잘해야 현상 유지고, 못 하면 신분 추락인데.’
어쨌든 두 사람은 놀이를 시작했다.
왜 황궁에서 엘렌시아와 주사위 놀이를 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해맑은 태도에 휘말렸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처음 해보는 놀이가 꽤 재미나서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하녀들이 놀 때 나도 끼고 싶었지.’
항상 큰 흥미 없는 양 굴었지만 실은 함께하고 싶었다.
두 사람은 서로 번갈아 주사위를 굴리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말을 전진시켰다. 막상막하였다.
필로멜이 말을 움직여 도착한 칸에는 ‘당신은 황궁의 시녀로 들어갑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상인에서 시녀로 전직했다. 귀족 중에서도 신원이 보증된 귀족만이 될 수 있는 시녀는 나름 중상위 계급이다.
“필로멜, 시녀가 되는 거예요?”
“네. 그렇게 됐어요. 다음은 황녀님 차례예요.”
“놀이가 아니라 진짜로요. 내 시녀가 될래요?”
말을 움직이던 필로멜이 고개를 들어 엘렌시아를 쳐다봤다.
“전 아직 모르는 거 천지니까 아는 게 많은 필로멜이 옆에서 가르쳐 줬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필로멜이 걱정돼요. 그동안 계속 황궁에서 살았는데 이제는 갈 곳이 없잖아요. 제 시녀로 이곳에서 같이 살아요. 네?”
그 순진한 얼굴에 말문이 막혔다.
“……제 처지를 살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사양하지요. 저는 황궁에 남아 있을 생각이 없습니다.”
가까스로 태연해지려고 노력하며 필로멜이 대답했다.
엘렌시아의 시녀가 되라니, 소름이 돋았다.
시녀 일이 싫다거나, 자존심이 상한다거나 하는 그런 종류의 문제가 아니었다. 엘렌시아의 시녀가 되는 것이 바로 <황녀 엘렌시아>의 전개이기 때문이었다.
엘렌시아가 나타나 가짜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필로멜’은 황녀 사칭죄로 처벌받을 위기에 처한다.
하지만 이를 가엽게 여긴 엘렌시아가 황제에게 선처를 호소하고, 더 나아가 쫓겨나야 할 ‘필로멜’을 자신의 시녀 자리에 앉혀준다. 악에 받친 ‘필로멜’이 은혜를 원수로 갚아버리지만 말이다.
벗어나려고 발악해도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나? 원치 않아도 엘렌시아의 시녀가 되어버리는 운명일까?
싸늘한 공포가 가슴에 퍼졌다.
“정말요? 그냥 여기에 남으면 안 돼요? 제가 잘해줄게요.”
“황녀님의 마음만 받겠습니다.”
“……치, 알았어요. 아쉽네요.”
엘렌시아는 거듭하여 권하지 않고 필로멜이 건네준 주사위를 굴렸다.
도르르 굴러가는 주사위 소리가 묘하게 크게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