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35)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35화(35/183)
<35화>
* * *
“전하, 정말 돌아오셨군요!”
방에 들어선 필로멜을 보자마자 델레스 백작 부인이 반색했다.
“오랜만이에요, 부인.”
“그동안 대체 어디 계셨던 거예요? 오랫동안 함께 있었던 저에게도 한마디 말도 없이!”
“……미안해요. 말 못 해서.”
“아니에요, 아니에요. 돌아오신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전 황녀님께서 잘못되셨을까 봐 걱정되어서…….”
코를 훌쩍이는 백작 부인이 필로멜을 힘껏 껴안았다.
“잘 돌아오셨어요. 정말로요.”
백작 부인의 몸도, 음성도 떨리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격렬한 환대가 좀 당황스러웠지만 필로멜은 천천히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다녀왔어요.”
그런데 이 늦은 시간까지 필로멜을 기다리던 사람은 백작 부인 혼자만이 아니었다.
“황녀님, 뵙고 싶었어요!”
“저는 돌아오실 줄 알았다니까요.”
“또 떠나시는 건 아니죠? 가시려거든 꼭 저희에게 얘기하셔야 해요.”
필로멜은 제각기 할 말을 쏟아내는 하녀들을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뺐다.
“너희들! 반가운 마음은 알겠지만, 피곤하신 분을 붙잡고 무슨 짓이지?”
“죄, 죄송합니다!”
백작 부인의 꾸중에 하녀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너무 뭐라 하지 마세요.”
필로멜은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백작 부인을 말렸다.
그들이 준비해 준 목욕물에 몸을 담갔다가 나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자 무척이나 개운했다.
그사이 하녀들은 물러가고 방 안에는 백작 부인만이 있었다.
“부인도 그만 가서 쉬어요.”
“아니요. 전 괜찮습니다. 오늘 밤은 이곳에서 보낼 거예요. 여기, 소일거리도 가지고 왔는걸요.”
안락의자에 앉은 부인이 뜨개질 거리를 들어 보였다. 필로멜은 그녀가 무슨 마음으로 자신의 곁에 남는지 알 것 같아 재차 권하지는 않았다.
필로멜은 난롯불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아 젖은 머리가 마르기를 기다렸다.
“황녀님.”
문득, 델레스 백작 부인이 입을 열었다.
“……네.”
“왜 떠나셨는지 묻지 않을게요. 이미 다른 분들이 많이 질문했을 테니까요.”
“…….”
“대신 이것 하나만 약속해 주세요. 다시는 말도 없이 떠나지 않으시겠다고요. 저한테만은 알려주고 가세요.”
“……네. 약속할게요.”
필로멜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떠날 때 제일 마음에 걸렸던 그녀였기에 지키기 힘든 약속인 것을 알면서도 할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백작 부인과 하녀들이 자신을 이렇게까지 걱정하고 생각해 주었다는 사실이 얼떨떨했다.
함께 지낸 시간이 시간이니 가끔 가다 떠올려 주지 않을까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필로멜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 그녀들이 자신의 실종 때문에 제일 난처한 입장에 처했을 게 분명한데.
그들에게 미안하면서도 조금은 기쁜 이 감정을 뭐라고 명명해야 할까?
애옹.
그 순간, 밖에서 들린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애옹애옹.
울음소리는 한 번에 그치지 않더니, 창문을 긁는 소리까지 함께 들렸다.
“길고양이라도 숨어들었나?”
백작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테라스 문을 약간 열었다.
조르르.
작은 털 뭉치 같은 무언가가 순식간에 방 안으로 침입했다.
“에구머니나!”
“애오오옹.”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놀라 자빠질 뻔한 백작 부인을 지나 필로멜에게 다가왔다.
“예쁘다.”
흰색이라고 하기에는 유난히도 반짝이는 털을 보며 필로멜이 감탄했다.
고양이가 친근하게 필로멜의 다리에 몸을 비비자 용기를 얻어 머리를 쓰다듬어봤다.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아이답지 않게 털이 매우 고왔다. 더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놈이 보는 눈은 있나 보네요.”
“사람을 피하지 않는데 주인이 있는 아이일까요?”
“글쎄요. 만약 주인이 있다면 지금쯤 열심히 이놈을 찾고 있겠어요. 상태를 보아하니 상당히 귀염받고 자란 것 같아요.”
“은색 고양이는 처음 봐요.”
요리조리 봐도 고양이의 털은 회색도 백색도 아닌 은색이었다.
한참을 고양이에게서 눈을 못 떼는 필로멜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백작 부인이 말했다.
“주인을 찾을 때까지 이곳에서 돌봐줄까요?”
“그러고는 싶지만 제가 언제 다시 떠나게 될지 몰라서…….”
백작 부인의 얼굴이 흐려졌다.
“정녕 떠나실 건가요? 그냥 저희와 함께 여기에 계시면 안 되나요?”
“저는 황녀가 아닌걸요. 언제까지고 이곳에 있을 순 없어요.”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얼마나 애타게 황녀님을 찾으셨는데요. 친딸이 아니라고 박대하시지는 않을 거예요.”
“……폐하가 저를 애타게 찾으셨다고요?”
눈에 불을 켜고 찾은 건 알겠지만 ‘애타게’란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요.”
그러나 필로멜은 백작 부인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찬물을 끼얹기가 어려웠다.
“뭐. 저를 입적하고 싶다고 말씀하시기는 했지만요.”
“정말이요? 그래서 어떻게 대답하셨죠?”
“사양했는데 시간을 가지고 생각해 보라 하셔서…….”
“받아들이세요!”
그녀가 힘차게 외쳤다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송구합니다. 그런 건 황녀님께서 정하실 문제인데 건방지게 제가 감히.”
“천만에요. 저를 생각해 주셔서 한 말인데요.”
백작 부인으로서도 필로멜이 나고 자란 황궁을 떠나는 것보다 그녀와 함께 안락하게 살기를 원할 테다.
“외람되지만 제 의견을 말씀드리자면, 이곳에서의 삶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요. 저도 앞으로 정말 잘해드릴 자신 있고요.”
“지금까지 해주신 것만으로 충분해요.”
“어차피 친딸은 엘렌시아 황녀님이시니, 후계자 교육이나 업무 같은 고된 일은 전부 그분이 하실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황녀님은 이제부터라도 편히 사셔도 괜찮잖아요.”
“마음 써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저는 정말 괜찮아요.”
엘렌시아의 자리를 나눠 가진 삶이 그리 편하지는 않겠지만, 저를 생각해 주는 백작 부인의 마음이 고마웠다.
문득 필로멜의 시선이 아직도 근처에 있는 고양이에게로 향했다.
귀를 쫑긋거리는 모습이 마치 필로멜과 백작 부인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돼.’
착각이겠지, 생각하며 필로멜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진짜 어디에도 안 갈 거니까 이만 쉬러 가세요.”
필로멜이 머리를 얼추 말리고 침대에 눕는 동안에도 백작 부인은 뜨개질 거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황녀님께서 잠드실 때까지만 있을게요.”
얼른 자는 편이 그녀를 쉴 수 있게 해주는 일 같아 필로멜은 눈을 감았다.
그러나 황제의 침실에서 실컷 자고 온 탓인지 수마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난로 앞에 자리를 잡은 고양이도 잘 준비하는지 몸을 동그랗게 말고 눈을 감았다.
고양이는 일단 오늘은 여기서 재우기로 했다. 내일 주인이나 주인을 찾을 때까지 돌봐줄 사람이 없나 알아봐야겠다.
잠들지 못하는 필로멜에게 백작 부인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신경 쓰이는 일이라도 있으세요?”
신경 쓰이는 일이라면 차고 넘쳤다. 앞으로의 일이나, 소설과는 묘하게 다른 상황들. 그리고…… 엘렌시아의 의뭉스러운 태도.
불과 어제 겪은 일인데도 르귄과의 만남과 출생의 비밀은 까마득한 예전 일처럼 느껴졌다.
“그냥 좀 머리가 복잡하네요.”
“제가 큰 도움이 되진 못하겠지만, 이야기라면 얼마든지 들어드릴 수 있으니 괜찮다면 말씀해 주세요.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해지기도 한다잖아요.”
마음은 고마웠으나 대부분의 고민은 털어놓을 수 없는 종류였다.
필로멜은 그중 그나마 말해도 괜찮을 것을 꺼냈다.
“음……. 폐하와 엘렌시아 황녀님 말인데요. 혹시 저 없을 때,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글쎄요. 저도 두 분을 가까이서 뵐 일은 없어서요. 무슨 일이라 하심은 구체적으로 어떤?”
“뭐라고 해야 할지……. 왠지 두 분 사이가 좀 서먹서먹해 보여서요.”
정확히는 서먹한 것은 유스티스 혼자였고, 엘렌시아는 매우 살가웠지만.
“그거야 당연하지요.”
“당연하다고요?”
“네. 두 분이 부모와 자식 사이라지만 사람 대 사람으로는 며칠 전에 처음 만난 사이잖아요. 친밀한 쪽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피로 이어진 부모와 자식 간엔 남들과는 다른 끈끈한 정 같은 게 있지 않나요.”
그래. 자신과 유스티스 사이에는 없었던 유대감.
금방이라도 바닥이 꺼질 것만 같은 불안감 속에 살며, 줄곧 혈연 간의 유대감을 바라왔었다.
피를 나눈 카트린도, 르귄도 내게 그런 걸 줄 수 없는 사람들이었지만 말이다.
백작 부인은 뜨개질을 멈추고는 필로멜을 응시했다.
“황녀님. 아니 이제부턴 필로멜 님이라 불러야 할까요.”
“편한 대로 하세요.”
“필로멜 님, 전에 말씀드렸던 제 딸 얘기 기억하세요?”
“아, 유학 갔다가 얼마 전에 돌아왔다던.”
백작 부인의 딸이라면 엘리타에서 대학에 다니며 정치학을 전공했다고 들은 것 같다.
“후후. 저희 딸은 어릴 적부터 크면 아빠와 결혼할 거라 하던 아이였는데, 지금은 남편과 데면데면해요. 서로 어찌나 어색해하는지. 아마 저 없으면 말 한마디 안 할걸요.”
그녀의 가족에 대해 자세히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저는 부모 자식 사이도 본질적으로는 다른 인간관계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해요. 양쪽 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만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거죠. 우리 집 부녀가 그동안 떨어져 있어서 어색해하는 것처럼 황제 폐하와 황녀 전하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한 델레스 백작 부인의 눈에선 연륜이 묻어 나왔다.
“……그런가요.”백작 부인의 이야기를 들으니 더 알 수 없어졌다.
‘책에서는 황제와 엘렌시아는 만나자마자 각별한 부녀지간이 되었는데.’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필로멜 님께 저희 가족을 소개해 드리고 싶어요. 제 얘기를 듣고 다들 필로멜 님을 만나고 싶어 한답니다.”
델레스 백작 부인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저를요?”
필로멜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이곳을 떠나셔야만 한다면, 당분간만이라도 저희 집에서 머무르시는 게 어떨까요? 저도 이참에 영지에 내려가서 푹 쉴 겸.”
“시녀 일은 어쩌고요?”
“필로멜 님도 안 계시는데 그만둬야죠.”
“대신 엘렌시아 황녀님의 시녀가 되면…….”
“어머. 제가 모시는 분을 쉽게 바꾸는 사람으로 보였나요? 좀 섭섭한데요.”
백작 부인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딸아이도 돌아왔겠다, 슬슬 영지로 내려가려던 참이었어요. 필로멜 님 탓이 아니니까 마음 쓰지 마세요.”
“…….”
필로멜은 그것이 자신을 위한 거짓말이라는 것을 알았다. 백작 부인은 자기 일을 매우 좋아하며, 원래대로라면 훗날 엘렌시아의 시녀가 된다.
“시골이긴 해도 고즈넉하고 인심 좋은 곳이죠. 오시면 분명 마음에 드실 거예요.”
고향에 대해 조곤조곤 설명하는 목소리를 자장가 삼으며 필로멜은 생각했다.
어쩌면 오랜 세월 스스로 벽을 쌓고 지내왔을지도 모르겠다.
어차피 엘렌시아의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녀와 일정 수준 이상 가까워지지 않으려 했었다. 주인공의 것을 탐내다 벌을 받는 악역이 되고 싶지 않았다.
델레스 백작 부인 말고도 지레 겁을 먹어 포기한 게 있지 않을까.
‘만약 있다면, 지금이라도…….’
애옹,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