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36)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36화(36/183)
<36화>
* * *
다음 날, 필로멜은 느지막이 일어나 델레스 백작 부인과 함께 아침을 먹고 여유를 만끽했다. 더 이상 황녀가 아니니 후계자 수업은 물론이고 다른 일정도 없었다.
그런데 평화롭던 시간이 밖에서 들린 고함에 의해 깨졌다.
“이리 나와! 이 천박한 것아!”
필로멜이 문을 열고 나가자 7년 만에 보는 얼굴이 있었다.
“유모.”
“오호라. 드디어 나오셨군.”
“유모, 제발 그만!”
유모가 필로멜의 처소 앞에서 씨근덕거리고 있었고, 엘렌시아는 유모를 말리는 중이었다.
“여기가 감히 어디라고 네까짓 것이 아직도 얼씬거려?”
유모가 눈을 치뜨며 소리쳤다.
“황제 폐하는 어떻게 꾀어냈을지 몰라도, 나는 안 당하지. 양심이 요만큼이라도 있다면 썩 이곳을 떠나!”
엘렌시아로부터 유모가 황궁에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이런 상황이 펼쳐질 줄 예상했다.
필로멜은 담담한 표정으로 유모를 바라보았다.
“유모가 말 안 해도 떠날 거야. 그러니 시끄럽게 굴지 말고 그쪽이야말로 물러가지? 사람들 눈도 있는데.”
주위에서 궁인들이 긴장된 얼굴로 분위기를 살폈다.
황녀의 유모와 전 황녀의 일이다 보니 섣불리 끼어들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이제 보니 제 어미를 쏙 빼닮았네! 너랑 네 어미 때문에 우리 불쌍한 엘렌시아 황녀님은 여태 아버지 얼굴도 못 보고 사셨어! 알아?”
“난 괜찮으니까 그만해요!”
엘렌시아가 유모의 팔을 붙잡으며 만류했지만 별반 도움은 되지 않았다.
“이 무슨 무례입니까. 당장 그만두지 못해요!”
“넌 빠져!”
원체 성정이 얌전한 델레스 백작 부인도 유모의 상대는 아니었다.
필로멜은 한숨을 내쉬었다.
싫어했다지만 유모는 필로멜의 유년 시절 대부분을 함께 보낸 주 양육자였다. 그런 사람이 대놓고 적대적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진 않았다.
어디를 가도 자신의 존재는 분란만 일으키는 걸까.
필로멜의 기분이 가라앉을 때쯤, 돌연 유모의 몸이 기우뚱 넘어갔다. 누군가 툭 밀친 듯한 모양새였다.
“아악!”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운 유모가 비명을 내지르며 버둥거렸다.
“날 밀었어! 아이고, 허리야! 사람 잡네!”
“……뭐 해?”
필로멜을 비롯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같이 다 유모를 멀뚱거렸다.
“밀었잖아!”
“누가? 내가?”
유모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자 필로멜은 황당해서 반문했다.
“혼자 자빠져놓고 생사람 잡지 말아요! 우리가 다 봤습니다.”
델레스 백작 부인이 나서서 필로멜을 대변하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봐도 유모는 저 혼자 쓰러졌다. 엘렌시아 이외에 그녀의 몸에 손댄 사람은 없었다.
“그럴 리 없어! 분명 누가 밀었는데……. 황녀님은 보셨죠?”
유모가 희망을 품고 물었지만, 엘렌시아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보다 얼른 일어나요. 창피하게 이게 무슨 추태예요?”
엘렌시아가 차가운 표정으로 유모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우려 했다.
유모가 억울한 낯으로 꿍얼거렸으나 엘렌시아가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 않자 도리가 없었다.
“안 되겠어요. 허리를 삐끗했는지 못 일어나겠어요.”
한참을 끙끙거리던 유모가 맥없이 중얼거렸다. 허리 통증은 그녀의 고질병이었다.
결국 네 명의 시종들이 유모의 팔다리를 하나씩 잡고 들어서 짐짝처럼 운반했다.
누구 한 명이 업으려 해도 유모가 워낙 무게가 나가는 데다, 조금만 허리에 손대려고 하면 아프다고 난리여서 그 수밖에 없었다.
“아악, 아파! 아프다고! 살살 좀 옮겨!”
그럼에도 황궁 복도에는 비명이 간간이 울려 퍼졌다.
“애옹.”
뒤쪽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은빛 털의 고양이가 방 밖을 내다보며 만족스럽게 몸을 쭉 펴고 있었다.
필로멜은 묘한 기분에 잠시 고양이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엘렌시아 황녀님.”
그러고는 유모의 뒤를 따라가려는 엘렌시아를 불러 세웠다. 엘렌시아에게 말해주고 싶은 게 있었다.
“무슨 일이죠?”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유모를 멀리하시길 바라요. 제가 어릴 적 그 사람과 지내본 바로는…….”
“필로멜.”
엘렌시아는 다소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유모를 너무 나쁘게 말하지 말아요.”
“…….”
“오늘 일은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무언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지만 유모는 좋은 사람이에요.”
“아니요. 유모는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만. 당사자가 없는 장소에서 나쁜 말을 하고 싶지 않아요. 옳지 못한 짓이고요.”
말문이 막혔다. 충고하려던 것뿐이었는데, 엘렌시아의 말을 들으니 남의 뒷말이나 하는 사람이 된 기분이었다.
“황녀님, 유모는…….”
“이만 갈게요. 저라도 사고를 당한 유모를 위로해 줘야 할 것 같아요.”
아, 하고 엘렌시아가 하던 말을 멈췄다.
“그런데 입적 얘기는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받아들였나요?”
“아직 황제 폐하께 답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필로멜의 생각은 어떤가요?”
“감사한 제안이지만 제게는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엘렌시아가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긍정적으로 고려해 봐요. 전 우리가 자매가 되면 참 좋겠어요. 이곳에서 지내다 보면 필로멜과 유모도 서로에 대한 오해를 풀 날이 올 거예요.”
그리 말하고 엘렌시아는 유유히 가버렸다.
‘오해?’
어이가 없어서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적어도 유모가 어떤 사람인지는 엘렌시아보다 자신이 백배는 더 잘 알았다.
하지만 엘렌시아는 만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유모를 상당히 신뢰하는 것 같았다.
‘유모가 벌써 구워삶았나?’
“필로멜 님!”
그때 시종들로부터 상황을 전해 들었는지 폴란 백작이 허겁지겁 뛰어왔다.
“이게 대체 어찌 된…….”
“백작님은 무슨 생각으로 저런 여자를 다시 궁에 들이셨나요? 저 여자가 저지른 일을 생각하면 그러시면 안 되죠!”
델레스 백작 부인이 강경하게 따지자, 폴란이 난처해하며 자초지종을 물었다.
잠시 후 자세한 정황을 들은 폴란이 필로멜과 백작 부인에게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옛날에 혼쭐이 나고 조금쯤은 반성했을 줄 알았는데……. 모두 잘못된 판단을 한 제 책임입니다.”
“당장 쫓아내실 거죠?”
“당연합니다. 지금 통보하러 가겠습니다.”
필로멜은 델레스 백작 부인을 방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엘렌시아의 거처로 향하는 폴란과 동행했다.
델레스 백작 부인은 필로멜이 유모를 보러 가는 것을 내켜 하지 않았지만 반대하지는 않았다.
유모는 절대 순순히 물러날 사람이 아니다. 엘렌시아가 자기를 싸고돈다면 더더욱.
필로멜이 간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가만히 앉아 손가락만 빨고 있는 쪽보다는 나았다.
엘렌시아의 거처에 다다르자, 하녀들이 유모는 황녀의 방에서 간호를 받고 있음을 알렸다.
유모는 황녀가 사용하는 호화스러운 침대에 누워 있고 그 옆에는 엘렌시아가 의자에 앉아 있었다. 일개 아랫사람에게 자신의 침대까지 내어주다니, 실로 자비로운 마음씨였다.
필로멜은 한 발짝 뒤에서 지켜보고 백작이 그들 앞에 나서서 유모의 해고와 퇴출을 통보했다.
“너무하십니다! 몸까지 성치 않은 이 늙은이 보고 어디 가라는 겁니까? 나가 죽으라는 얘기나 다름없어요!”
“그러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줬을 때 정신 차렸어야지요. 오늘 당신이 부린 추태를 황제 폐하께 고하면 곱게 나가는 거로는 안 끝날 겁니다.”
“폐하께서 황후님의 유모였던 제게 설마…….”
“지금 확인해 볼까요? 당장에라도 가서 고할 수 있습니다만.”
폴란 백작이 완고하게 나가자 할 말이 궁한 유모는 입만 우물거렸다.
“필로멜 님께 사죄드리는 것도 잊지 마세요.”
“하지만…….”
“어허.”
유모가 내키지 않은 얼굴로 빠르게 속살거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렇게 상황이 마무리되는 듯싶었으나, 복병이 나타났다.
“유모가 너무 불쌍해요.”
엘렌시아가 유모의 주름진 손을 쓸며 울먹였던 것이다.
“유모는 허리를 다쳐서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다고요. 그런데 어떻게 궁을 나갈 수 있겠어요?”
“하오나, 다른 죄를 묻지 않은 것만으로도…….”
“백작에겐 일말의 자비심도 없나요? 적어도 유모의 허리가 다 나을 때까진 여기 머물게 해주세요.”
“황녀님, 저를 위해서 그렇게까지……. 이리 착하셔서 험난한 세상을 어찌 살아가실까.”
유모까지 코를 훌쩍이며 두 손으로 엘렌시아의 손을 꼬옥 마주 잡았다.
그런 엘렌시아의 모습에 하녀들도 감격한 눈치였다.
필로멜과 폴란 백작만 제외한 채, 방 안에는 감동의 물결이 흘렀다.
“필로멜.”
엘렌시아가 의자에서 일어서 필로멜을 마주 봤다.
“아빠가 화내실까 걱정이라면 제가 잘 말씀드려 볼게요. 그러니 유모를 용서해 주면 안 될까요? 유모도 이렇게 반성하고 있잖아요.”
그녀가 폴란 백작이 아닌 필로멜을 지목함으로써 유모를 내보내려는 주체가 필로멜로 바뀌었다.
필로멜을 대신해 폴란 백작이 나섰다.
“아무리 사정이 딱해도 아니 될 일입니다.”
“하지만 유모에게 피해를 당한 사람은 폴란 백작이 아니라 필로멜이잖아요. 백작은 물러나세요.”
돌연 엘렌시아의 말투가 명령조로 바뀌었다.
필로멜은 냉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봤다.
‘여기서 거절하면 나만 오갈 데 없는 노인을 쫓아내려 안달 난 악한이 되는 건가?’
어차피 곧 떠날 곳이다. 자신의 평판 따윈 아무래도 좋았으나, 평판을 포기해도 원하는 목적을 이룰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 엘렌시아가 이 일을 유스티스에게 가져가면, 그는 십중팔구 친딸의 편을 들어줄 테다.
필로멜만 나쁜 사람이 되고, 유모는 멀쩡히 황궁에 남는 소득 없는 미래가 펼쳐질 바에는 차라리…….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필로멜이 입을 열었다.
“좋아요. 황녀님의 말씀대로 해요.”
“정말이요?”
“네. 유모가 허리가 회복되는 즉시 나간다고 약조한다면야 반대하지 않겠습니다. 대신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필로멜이 검지를 펴들었다.
“유모, 내가 여덟 살 무렵에 계단에서 굴러 다리가 부러진 적이 있었지?”
“네? 아, 그런 일도 있었습죠.”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유모가 기억을 더듬는 듯 흐릿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유모가 거동이 불편한 내 곁에 머물며 스물네 시간 돌봐줬던 것도 기억나?”
“물론이죠! 그때 황녀님, 아니 필로멜 님의 밥도 제가 떠다 먹이고, 이동하실 땐 업어다 드렸죠.”
추억을 회상하는 유모의 눈이 황홀감에 젖었다.
유모에게는 황녀의 보호자로서 권력을 제 맘대로 휘두르던 인생의 황금기였을 것이다.
“아플 때 유모가 옆에서 힘이 되어줘서 정말 좋았어.”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유모의 잔소리와 오지랖에 매 순간 노출되었던 탓에 필로멜에겐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필로멜은 활짝 웃으며 유모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니 황녀님께도 그런 식으로 힘이 되어드리는 건 어떨까?”
“……엘렌시아 황녀님께요?”
“이번에는 아픈 사람이 유모이지만, 유모는 자리에 누워서도 많은 일을 할 수 있잖아. 말로 가르침을 주는 것뿐이라면 몸을 쓸 필요도 없고.”
그러자 유모가 자신감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죠. 황녀님의 어머니인 이사벨라 님도 다 제 가르침을 받으며 자라셨어요. 필로멜 님이 제 노고를 이리도 잘 알아주실 줄은 미처 몰랐네요.”
“마침 침대도 넓겠다, 매일 내 옆에서 잤던 그때처럼 이 방에 머물며 황녀님을 잘 보살펴드리면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