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42)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42화(42/183)
<42화>
* * *
잠시 후 두 사람은 황녀의 처소 내에 마련된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하녀들은 차를 내온 다음 자리를 비켜줬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장난스러운 웃음기를 띤 채였다.
“……드세요.”
필로멜은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잔을 가리키며 차를 권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나사르는 말만 그리하고 차에 손을 대지 않았다.
필로멜의 얼굴을 한참 물끄러미 보던 나사르가 입을 뗐다.
“무탈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저는 전하께서 정말 어찌 되시는 줄 알고…….”
잔뜩 목이 멘 목소리. 흡사 죽었다가 살아 돌아온 가족이라도 목격한 듯한 감격이 느껴졌다.
“……예. 뭐, 그렇게 됐어요.”
필로멜은 떨떠름하게 답했다.
‘하긴 내가 궁에 돌아오면 죽는다고 그렇게 엄살을 피웠으니.’
마차에서의 대화가 떠올라 괜히 민망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뭐든 다 하겠다는 말은 하지 말걸 그랬다.
“몸은 어떠십니까? 갑자기 혼절하셔서 정말 놀랐습니다.”
“걱정 마요. 그땐 피곤한 데다 불시에 충격을 받아서 그런 거고 몸에는 아무 이상 없어요.”
“그렇군요. 다행입니다.”
하지만 필로멜의 발끝부터 머리끝까지 주의 깊게 살피는 시선은 떨어지지 않았다.
부담스러워진 필로멜이 화제를 전환했다.
“그러고 보니 나사르. 셍젠에서 여기까지 되게 빨리 오셨네요. 이동 마법을 이용하셨나요?”
“예. 그렇습니다. 그렇게 황녀 전하께서 사라지신 후, 저도 얼른 수도로 와야겠다는 생각에 마탑으로 향했습니다.”
“마탑이요? 마탑이라면 한동안 개방을 안 하지 않나요?”
마탑 앞에서 사기당할 뻔했을 때, 브로커가 해준 얘기가 떠올랐다.
“그래서 저도 에이브리든의 이름을 대고 입장해야 하나 싶었는데…….”
대귀족 가문이라면 어디에서나 예외를 만들 수 있는 법.
“그 근처에서 우연히 수도로 향하는 마법사 일행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저도 같이 온 거죠.”
“운이 좋았군요.”
수도로 가야 할 때, 우연히 목적지가 같은 마법사 일행을 만나다니. 그것도 우연하게도 타인을 동반한 이동 마법이 가능한 유능한 자들로 말이다.
“더 신기했던 건 그분들도 황궁에 오시는 길이었다고 합니다.”
나사르는 가볍게 웃어 보이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어제 오전 황궁 소속 마법사 중 두 명이 갑작스레 사직했는데, 연락을 받고 빈자리에 지원하기 위해 왔다더군요.”
“황궁 마법사가 두 명이나요? 별일이네요. 조건이 좋아서 웬만하면 다들 그만두지 않으려 하는데.”
사실 아무래도 좋은 화제였지만, 따로 할 말이 없어 필로멜은 흥미 있는 척했다.
나사르는 성실히 대답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다만 오신 분은 세 분이어서 한 분은 이곳에서 일할 수 없다는 게 안타깝네요.”
“유능한 사람이라면 황궁 말고도 고용을 원하는 곳이 많으니 괜찮을 거예요.”
“저희 가문에서도 실력 좋은 마법사들을 항상 구인 중입니다.”
“그렇군요.”
“…….”
“…….”
그리고 예상했던 침묵이 감돌았다.
‘망했다.’
필로멜은 할 말을 찾지 못해 속으로 혀를 찼다.
예전에는 흔한 사교계 화젯거리로도 한참을 주거니 받거니 했지만, 지금 와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것은 이상했다.
‘나는 이제 황녀도 아니고, 나사르의 약혼자도 아니니까.’
문득 황녀가 아닌 한 사람의 ‘필로멜’로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알 수 없어졌다.
평생 남에게 흠 잡히지 않는 황녀가 되는 게 목표였고, 적당한 때에 도망치는 게 삶의 목적이었다. 나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진정한 자신은 깊숙이 숨긴 채.
그건 죽음의 위험으로부터 필로멜을 지켜주던 가면이었다.
‘그렇다면 죽을 걱정이 사라진 지금은?’
가면을 벗어 던진 지금은, 원래 그 아래 있던 얼굴이 어땠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십 년 넘는 세월을 알고 지낸 나사르와도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난 어떤 사람이었지……?’
그때였다.
“고양이를 기르시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나사르의 말에 허공을 부유하던 필로멜의 정신이 돌아왔다.
“고양이요?”
“전하께서 보살피는 아이가 아닌가요?”
언제 따라 나왔는지는 몰라도 은색 고양이가 응접실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저리 가.”
필로멜은 자리를 피하라는 의미로 훠이훠이 손을 내저었다.
진짜 고양이면 모를까 인간이 남의 대화를 엿듣는 행위는 엄연한 사생활 침해다.
침실에서 백작 부인, 하녀들과 한 대화는 어쩔 수 없었다지만 이 대화까지 듣게 할 생각은 없었다.
“애옹.”
그러자 고양이가 어기적어기적 느릿하게 응접실을 나갔다.
기분 탓이겠지만 왠지 눈이 좀 째진 것 같았다. 마치 삐진 것처럼.
“고양이가 말귀를 알아듣는군요. 마치 사람 같습니다.”
그야 사람이니까.
필로멜은 말을 삼키며 대화 주제를 돌렸다.
“……차가 식기 전에 얼른 들어요.”
드디어 그가 찻잔을 잡기 위해 고개를 살짝 숙이는데.
‘어?’
필로멜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나사르, 잠시만 그대로 있어 봐요.”
“예? 어어.”
필로멜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까이 다가가자 나사르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결 좋은 금발이 필로멜의 손가락을 간질였다. 그가 숨을 훅 들이켜는 게 느껴졌다.
“가만히.”
필로멜이 움찔 움직이려 하는 어깨를 살짝 잡아 눌렀다.
누구에게는 몇 초에 불과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영원 같은 시간이 지났다.
“이제 됐어요. 이게 머리에 붙어 있었네요.”
손에 잘게 부스러진 나뭇잎 조각들을 쥔 필로멜이 후후 웃었다.
멍하니 그것을 보던 나사르가 자신의 뒷머리를 더듬었다.
“……급히 오느라 옷매무새를 미처 점검하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이런 모습 보여드려서.”
나사르는 이동 마법으로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자택에 들르지 않고 바로 온 듯했다. 가족이나 에이브리든의 사용인 중 누가 나뭇잎을 봤다면 알려주지 않았을 리 없으니.
“소공작은 항상 완벽한 줄 알았더니 이런 면도 있었네요.”
필로멜은 씩 웃으며 그를 놀렸다.
“……평소에는 신경 쓰고 다닙니다.”
그녀의 농담에 나사르의 잘생긴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익었다.
‘엄청 창피한가 보다.’
생젠에서 돈을 빌려달라고 했을 때도 느꼈지만, 그는 부끄럼을 잘 타는 성격인 것 같다.
“아, 혹시 저한테 냄새도 납니까? 한나절 넘게 말로 달리기만 해서…….”
나사르가 킁킁 옷 냄새를 맡더니 안절부절못했다.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자책이 배어 있었다.
“죄송하지만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차후에 제대로 연통을 넣고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냄새는커녕 풀 향을 닮은 상쾌한 향기만 난다고 대답하려 했는데 그가 서둘러 일어섰다.
“꼭 다시 올 테니 기다려 주십시오.”
나사르는 필로멜을 향해 몸을 숙인 후 문밖으로 나섰다.
‘왜 저러지? 뭐, 아무렴 어때.’
하녀를 부르기도 뭐해서 필로멜이 직접 찻잔을 치우려 할 때였다.
“전하.”
반쯤 열린 문 너머로 누군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물론 나사르였다.
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제가 없는 동안 또 어디 가시지 않을 거죠?”
마치 주인이 사라질까 두려워 끙끙대는 것 같은 강아지 같은 모습이 조금 웃겼다.
“알았어요. 나사르가 다시 올 때까지 어디 안 갈 테니까 다녀오세요.”
어차피 르귄이 말한 대로 책이 여기 올 때까지는 필로멜은 가고 싶어도 어디 못 간다.
“약조하시는 겁니다.”
“그래요.”
“감사합니다!”
얼굴에 화색이 돈 나사르가 힘차게 대답하고 사라졌다.
나사르도 은근히 덜렁대는 구석이 있었구나, 하고 필로멜은 색다른 감상을 느꼈다.
‘나를 걱정해서 한걸음에 황궁까지 와주다니.’
듣기로는 내가 사라지자 나사르는 열심히 전국을 누비며 찾아다녔다고 한다.
약혼자로서의 의무감이 제일 큰 이유라 생각하면서도 필로멜의 기분이 좀 들떴다.
약혼 관계가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친구 같은 사이라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러나 필로멜의 머리에서 나사르에 관한 생각은 곧바로 사라졌다. 다른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이걸 어떻게 치우지?”
이제 황녀가 아니니 ‘내가 마신 차 정도는 내 손으로 치우겠다!’라는 마음을 가진 것 자체는 좋으나…….
항상 하녀들이 알아서 치워줬기 때문에 필로멜으로서는 차기(茶器)들을 어디에 갖다 놔야 하는지도 몰랐다.
설렁줄로 백작 부인이나 하녀들을 부르면 한사코 본인들이 치우겠다고 할 테니 가능하면 부르고 싶지 않았다.
필로멜은 근처에 물어볼 사람이 없을까 싶어 찻주전자와 찻잔이 놓인 쟁반을 들고 방을 나섰다.
“어.”
그런데 밖으로 나오자마자 낯선 얼굴의 하녀와 눈이 마주쳤다.
단순히 필로멜의 처소 앞을 지나는 중이라고 여기기에는 가만히 서 있는 자세가 영 수상쩍었다.
필로멜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기서 무얼 하고 있었지?”
“황녀님! 아니, 저기, 그게…… 죄송합니다!”
“나는 무얼 하고 있었는지 물었는데.”
“그게 그러니까…….”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하녀의 태도가 한층 수상함을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