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re Is No Place For Fakes RAW novel - Chapter (47)
가짜를 위한 장소는 없다-47화(47/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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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로멜?”
필로멜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자 유스티스가 초조한 목소리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
필로멜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쿵쿵. 가슴이 세게 뛰었다.
이상했다. 사과를 받았는데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나쁘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사과받아서 뭐.’
어차피 변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사실 유스티스만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녀가 그의 친딸이 아닌 것은 맞지 않는가. 유스티스 또한 피해자였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폐하가 그러셔도 제 마음이 편치 않아요.”
필로멜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가벼운 어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물론, 뭐어……. 그때 당시에는 폐하가 조금 원망스러웠지만……. 지금도 아니라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그래도 지나고 보니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었나 싶어요.”
“자연스러운 흐름?”
“제가 폐하의 친딸이 아니니 사랑하지 못했던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
“…….”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난 널 친딸로 알고도 내버려 뒀어.”
한참 뒤에 유스티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직감적으로 아닌 걸 느끼셨을 거예요. 애초에 전 황후 폐하와 전혀 닮지 않았잖아요.”
“그것과는 관계없어.”
“관계있어요. 폐하께서 저에게 정을 주지 않으셨던 게 어찌 보면 당연해요.”
“아니야! 비록 네가 어렸을 때엔 그랬지만…… 지금은 내 딸로 여긴다. 넌 내 딸이야.”
‘또, 그 말인가.’
필로멜은 조소했다.
이참에 확실히 오해를 풀어줘야 할 듯싶다.
“착각일걸요.”
자신이 말하고도 놀라우리만치 단호한 어조가 튀어나왔다.
“뭐?”
“함께한 세월이 있으니 정이 드셨을 뿐이겠죠. 하지만 그 감정은 딸을 향한 애정이 아니에요.”
필로멜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건 애정이 아니었다. 그저 그녀가 그에게서 환심을 사기 위해 한 행동에 길들여진 것뿐이었다.
‘애정이라 착각하는 거지.’
왜냐하면 <황녀 엘렌시아>에서 저 남자가 ‘필로멜’을 어떻게 대하는지 읽었으니까.
물론 지금은 책의 진실성에 조금 의문이 들긴 하지만.
“내 감정이 착각이라고……?”
유스티스가 충격받은 듯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가 많이 혼란스러워 보인 탓에 필로멜은 달래듯이 말했다.
“이제 엘렌시아가 폐하 곁에 있으니까 점차 진짜 딸이 어떤 건지, 가족이 뭔지 아실 수 있을 거예요.”
물론 피가 섞인 모든 가족이 화목하게 지내는 건 아니었다.
당장 자신만 하더라도 친부모와 잘 지낼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유스티스와 엘렌시아는 다를 가능성이 컸다. 그들 가족은 본래 사랑으로 이루어진 관계이니.
황제와 황후는 서로 사랑해서 부부의 연을 맺었고 사랑으로 아이를 낳았다. 책의 다른 내용은 거짓일지 몰라도 이것은 확고한 진실이었다.
“그리고 전 폐하와 저의 관계가 용서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해요.”
용서해 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뜻이었다.
용서하면? 겉모습만 사이좋았던 예전으로 돌아갈 건가.
용서 안 하면? 제 친모에 의해 딸과 생이별하게 된 그에게 복수라도 할 건가.
그러니 이 문제는 이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자신과 그의 관계도 이걸로 끝.
“좋았던 일도, 원망스러웠던 일도 다 잊어버리세요.”
“필로멜…….”
“다 잊고 각자 갈 길을 가는 게 맞아요. 음, 제 보호자 역할은 델레스 백작 부인 같은 다른 분이 맡아주실 수 있으니 굳이 폐하께 수고를 끼치지 않아도 돼요.”
“…….”
“…….”
두 사람 사이에 경계선 같은 적막이 흘렀다. 결코 좁혀지지 않을 거리였다.
‘원래는 이대로 깔끔하게 이별할 셈이었지만…….’
필로멜은 잠시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제게 조금이라도 미안하거나 좋은 감정이 남아 있다면 부탁을 들어주시겠어요?”
유스티스가 고개를 번쩍 들어 필로멜을 바라보았다.
“그게 뭐지? 뭐든 좋으니 말해봐라.”
“이제 제힘으로 혼자 살아보려고 해요. 그런데 당장 뭐부터 해야 할지 좀 막막해서요. 당장 지낼 장소도 없고요.”
집무실로 오는 길에 계속해서 황궁에 남을 적당한 핑계를 고민해 보았지만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떠올랐다.
“델레스 백작 부인은 델레스 백작가에서 지내도 괜찮다고 했지만…… 너무 죄송스러워서요. 아무래도 부인은 아직 절 황녀처럼 대하는 경향이 있다 보니.”
필로멜은 황제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갔다.
“괜찮으시다면 황궁에서 좀 더 머물러도 될까요? 궁인들이 쓰는 숙소라도 주신다면 깨끗이 사용하겠습니다.”
필로멜은 그녀가 황제의 제안대로 입적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것처럼 보일까 봐 덧붙였다.
“물론 제 살길을 찾을 때까지 만이에요. 길게 폐 끼치진 않을게요.”
엘렌시아와 책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면 지체 없이 떠날 거다.
“얼마든지 있어도 돼. 단 궁인 숙소는 허락 못 한다.”
유스티스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어디로……?”
현재 필로멜이 사용하고 있는 서궁은 후계자를 위한 거처였다. 하지만 그녀가 진짜 황녀가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이상 이제는 엘렌시아에게 그곳을 내줘야 했다.
“남궁을 준비시켜 놓을 테니 거기에 머물거라.”
‘남궁?’
필로멜은 고개를 갸웃했다.
남궁이면 궁을 방문하는 국빈에게 제공하는 숙소였다.
“그렇지만 국빈이 아닌 제가 남궁에 지내는 건 이치에 안 맞습니다.”
남궁의 국빈관은 보통 타국의 황족이나 높은 귀족이 와야지만 개방하는 곳이었다.
심지어 해당 국가의 세가 약하다 싶으면 남궁의 국빈관이 아닌 일반 방을 줄 정도로 콧대 높은 기준을 자랑하기도 했다.
“네가 왜 국빈이 아니지?”
“그야 전 이제 황녀도 아니니까…….”
“네가 내 딸이 되기 싫다고 해도 너에게 입은 은혜까지 저버릴 생각은 없다.”
“……은혜요?”
“넌 나에게 엘렌시아를 찾아준 은인이지 않나. 그 애가 평생 초야에 묻혀 살아갈 뻔한 걸 네가 찾아준 거야. 네가 아니었으면 난 평생 엘렌시아의 존재도 모르고 살았겠지.”
황제의 입에서 막힘없이 말이 흘러나왔다. 미리 준비라도 해온 듯한 달변이었다.
“게다가 네가 내 딸이 아닌 이상, 그 애는 황제의 유일한 자식이자 후계자다. 나는 물론이고 제국으로서도 쉬이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입었어.”
일이 그렇게 되나?
은인이라.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얼떨떨했다. 누구 하나 탓하는 사람 없어도 자신은 평생 죄인으로 살아왔기에.
황제는 거침없이 말했다.
“사례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벨레로프 황가의 수치다. 모두가 나를 금수만도 못한 놈이라고 욕하겠지. 날 금수만도 못한 놈으로 만들 테냐.”
“아니, 그게 그러니까…….”
유스티스의 말을 듣다 보니 어쩐지 거절하기가 어려워졌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말려들었다.
사실, 기왕이면 넓은 방을 쓰는 편이 필로멜에게도 이로웠다. 혼자라면 다락방도 상관없지만, 고양이의 탈을 쓴 친부가 딸린 입장에선 분리된 공간이 필요했다.
장황한 설득을 한참 들은 후에야 필로멜은 결국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남궁으로 부탁드릴게요.”
그렇게 필로멜은 자신이 원할 때까지 남궁 국빈관에서 지내기로 결정됐다.
남들의 이목을 끌 결정이 분명했지만…… 그건 황궁에 남기로 한 순간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그 후 필로멜은 잡혀간 궁인들을 풀어 달라 요청했다.
황제는 내키지 않아 했지만 그렇게 하겠다고 약조했다.
그러고도 남궁 체류와 관련된 기타 사항들에 관한 대화가 오갔다. 여러 면에서 둘의 의견이 상이했으나, 대부분 필로멜이 원하는 방향으로 정해졌다.
“필로멜.”
집무실을 떠나려던 찰나 진중한 부름이 발길을 잡았다.
“난 이걸 일종의 기회라 여기겠다.”
“네?”
“반드시 내가 한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내겠다.”
그러니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주었으면 좋겠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는 그리 말하는 듯했다.
“……물러가 보겠습니다.”
필로멜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방에서 나왔다.
‘난 할 만큼 했어.’
황제가 헛된 기대를 품어도 제 탓은 아니었다.
저러다 조만간 포기하겠지.
“어라, 필로멜. 아빠를 만나고 오는 거예요?”
집무실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필로멜은 엘렌시아와 마주쳤다. 그녀는 유스티스를 만나러 가는 길인 듯했다.
“네. 일전에 제안해 주신 입적 논의를 끝마쳤습니다.”
필로멜은 엘렌시아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어떻게요? 입적되기로 했어요?”
엘렌시아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녀의 입적에 상당한 관심이 있는 듯했다.
“아니요. 폐하껜 죄송하지만 거절했습니다.”
“그런……. 어째서요? 필로멜과 더 같이 있고 싶었는데…….”
모양 좋은 금빛 눈썹이 축 늘어진다. 실망으로 얼룩진 얼굴을 보며 필로멜은 그것이 과연 진심일지 생각했다.
엘렌시아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
“저에게 맞지 않은 자리인걸요. 하지만 너무 안타까워하지는 마시길.”
엘렌시아의 푸른 눈동자가 의아함으로 물들었다.
“비록 입적은 사양했지만 당분간 황궁에 머무르기로 했답니다. 황제 폐하께서 감사하게도 남궁의 국빈관을 내어주기로 하셨거든요.”
순간 그녀의 표정이 허물어졌다. 남은 건 빈 도화지를 닮은 허여멀건 한 민낯이었다.
“절 이리도 생각해 주시는 황녀님을 계속 뵐 수 있게 되어 정말 기뻐요. 황녀님도 기쁘시죠?”
엘렌시아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그 얼굴을 보며 필로멜은 확신했다.
그녀는 필로멜이 이곳에 남는 걸 반기지 않는다.